[대니얼 김의 야!토크! ]전 애리조나 단장 "BK없이는 우승할 수 없었다"

입력 2011. 10. 21. 16:34 수정 2011. 10. 22.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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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 단독 인터뷰]

2001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1월에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3월에는 인천공항이 정식으로 개항을 하였다. 물론 연예계 빅뉴스는 H.O.T.의 해체소식이었다. IT의 큰 이슈는 WINDOWS XP가 출시되었다는 것. 그리고 당시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애플 사에서는 iPod라는 mp3 플레이어를 출시하기도 하였다. 9월11일에는 3천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월드트레이드센터 테러가 발생하여 미국이 잠시 휘청거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가 있다. 아시안계 선수가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마운드에 오른 해가 2001년이었다. 물론 그 주인공은 당시 22세였던 김병현이다.

올 시즌 9월10일. 애리조나 구단은 우승 10주년 기념 행사를 갖었다. 밥브랜리 감독과 코칭스태프. 그리고 당시 팀 멤버들이 전부다 초대된 대대적인 행사였다. 아쉽지만 아직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는 미구엘 바티스타, 크레이그 카운셀, 그리고 김병현은 참석을 하지 못했다.

그날 행사에서 팬들에게 처음으로 소개된 사람은 당시 단장이었던 조 가라지올라 MLB사무국 소속 운영팀 부사장이었다.

그렇다면 10년 전 월드시리즈 우승의 설계자 노릇을 했던 가라지올라 전 단장은 야구선수 김병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먼저 BK가 없었다면 그 해 우리가 우승할 수 없었습니다"며 아주 자신 있게 첫 한마디를 내뱉었다. 당시 4차전과 5차전에서 연거푸 홈런을 양키스에게 내주고 마운드에 주저 앉았던 김병현의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은 많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BK는 당시 다이아몬드백스 불펜의 전부였습니다. (커트)실링과 (랜디)존슨이 확실한 원투펀치의 역할을 했지만 당시 팀의 불펜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죠. 그래서 우리는 BK에게 의존을 많이 했고 특히 정규 시즌 후반에서부터 월드시리즈 직전까지 BK의 활약을 대단했습니다."

김병현의 활약은 2001년 시즌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기록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4차전과 5차전에 각각 2이닝씩을 던지며 세이브를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포스트시즌에서 2경기 연이은 2이닝 세이브를 기록한 마무리 투수는 단 3명밖에 없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의 활약은 대단한 것 이었다. 한마디로 중간 셋업맨과 마무리 역할을 동시에 맡은 선수가 바로 김병현이었다.

"팬들은 당시 양키스 구장에서 BK가 내준 홈런을 기억하지만 저는 항상 BK에게 고마운 마음뿐입니다"며 가라지올라 단장은 회상하기도 하였고 또한 그를 상당히 강한 맨탈의 소지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BK가 월드시리즈 우승 후 더 좋은 투수가 되었다는 거죠. 다들 월드시리즈 충격이 클 거라고 말들이 많았지만 그 다음 시즌 BK는 올스타 경기에 뽑힐 정도로 더 성숙한 투수로 컴백했었죠"

실제로 그는 2002시즌 8승2패 36세이브를 기록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당시 그가 거둔 36세이브는 당시 애리조나 구단의 역사상 최고치를 의미했다. 1999년 김병현이 미국에 진출하면서 받은 계약 총 액수는 225만 달러였다. 2011 신인 드래프트 1차 라운드에서 밀워키 브루워스에 지명된 좌완 유망주 제드 브래들리 선수가 받은 200만 달러 보다 많은 액수를 10년 전에 받은 것이다.

당시 파격적인 계약 조건을 제시한 주인공인 가라지올라 전 단장은 김병현의 투구모습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난 직후 계약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하였다. "김병현의 미국인 에이전트한테서 연락이 왔었죠.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줄 테니 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더라고요" 가리지올라 단장에게 전달된 비디오 테이프는 김병현이 미국 대학대표팀을 상대하며 20개의 삼진을 기록했던 경기였다.

굳게 마음을 먹고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지만 한가지의 허들이 남겨져 있었다. 계약을 성사시키려면 단장이 꼭 한국에 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가라지올라 전 단장은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김병현의 미국 진출은 현실로 이뤄졌다.

"저는 아직도 BK와 함께 미국대사관에 비자 받으러 갔던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의 차분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한국에 잘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라며 그 당시를 기억했다.

10년이란 시간은 어떻게 생각하면 짧고 어떻게 생각해 보면 긴 시간이다. 20대 초반에 최고의 무대에서 섰던 김병현. 그가 월드시리즈에서 홈런을 내주며 마운드에서 내려오던 모습은 참 외로워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야구선수로서 그의 길을 가고 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일본이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10년 전에도 또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는 야구선수이다.

대니얼 김 (OSEN 객원 칼럼니스트)전 뉴욕메츠 직원 / 신시네티 REDS 스카우팅 코디네이터 Daniel@dk98group.com Twitter.com/dk_bluemag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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