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만약..' 정말로 이적할 '뻔' 했던 사건 TOP10

이원희 기자 2015. 7. 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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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N=이원희 기자] 축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때 만약..'이라는 상상을 펼치기도 한다. 선수들의 이적 사건도 마찬가지. 당시 선수들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축구 역사가 달라질 수 있었다. 이에 유럽축구 전문매체 <90min>가 정말로 이적할 '뻔'했던 사건 TOP10을 소개했다.

10. 레반도프스키 → 블랙번

바이에른 뮌헨에서 활약하고 있는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는 수준급 공격수로 평가받는다. 유럽 명문 클럽 소속이지만 한때 블랙번 로버스 유니폼을 입을 수도 있었다. 2010년 블랙번은 폴란드 레흐 포츠난에서 뛰던 레반도프스키 영입을 위해 400만 파운드(약 70억 원)를 제시했다. 이적 협상은 순조로웠으나 아이슬란드에서 화산 폭발이 일어나 레반도프스키가 영국행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레반도프스키의 이적은 무산됐고 블랙번은 자연재해를 탓해야만 했다.

9. 셰브첸코 → 웨스트햄 

2006년 첼시로 이적한 안드레이 셰브첸코는 악몽 같은 생활을 보냈다. 셰브첸코는 프리미어리그에 적응하지 못하며 부진을 거듭했다. 이적료 3,000만 파운드(약 525억 원)가 무색했다. 셰브첸코와 잉글랜드의 인연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 1995년 웨스트햄 감독 해리 래드냅과 코치였던 프랭크 램파드 시니어는 정체불명 인물들에게 2명의 선수를 테스트 해달라고 협박 받았다. 래드냅는 인터뷰를 통해 "두 명 중 한 명이 테스트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정체불명의 인물들은 그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100만 파운드(약 17억 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램파드가 너무 비싸다고 했다. 그 한 명이 셰브첸코"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8. 히바우두 → 볼턴 

2000년대 볼턴 원더러스는 탄탄한 팀이었다. 팀 내 스타플레이어도 즐비했다. '아프리카 테크니션' 제이-제이 오코차와 유리 조르카에프가 대표적이며 페르난도 이에로도 볼턴에서 활약했다. 2004년 볼턴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영입을 준비했다. 영입 대상은 브라질 히바우두였다. 히바우두는 바르셀로나와 AC밀란 생활을 뒤로하고 새로운 팀을 찾고 있었다. 볼턴이 적극적으로 히바우두에게 접근했고 히바우두도 반응했다. 히바우두는 "볼턴으로 이적하고 싶다"고 밝혔지만 마음을 바꿔 그리스 올림피아코스를 택한다.

7. 제라드 → 첼시

2005년 제라드는 두 가지의 선택지를 받게 된다. 하나는 리버풀에 남는 것. 나머지는 첼시로의 이적이었다. 리버풀은 제라드에게 클럽 최고주급인 10만 파운드(약 2억 원)를 제시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첼시는 제라드 영입을 위해 3,000만 파운드(약 489억 원)의 이적료를 준비했다. 현지 언론들은 제라드의 첼시행을 예상했지만 제라드는 결국 리버풀 잔류를 선택했다.

6. 이브라히모비치 → 아스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언제나 당당했다. 16세이던 이브라히모비치는 스웨덴에서 유망한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고 아스널이 입단 테스트를 제의했다. 아스널은 편의시설과 등번호까지 준비하며 이브라히모비치 영입에 심의를 기울였다. 이브라히모비치의 대답은 '노'였다. 이브라히모비치는 "즐라탄은 테스트를 받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기며 아스널의 제의를 거절했다.

5. 호날두 → 아스널 

벵거 감독이 정상급 선수를 놓쳤다. 때는 2003년이다. 벵거 감독은 스포르팅 리스본의 크리스티아노 호날두를 주시하며 영입을 추진했다. 18세 호날두도 이적을 준비하며 등번호 '9'가 새겨진 아스널 유니폼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스널이 리스본에 적은 이적료를 제시해 협상이 불발됐다. 호날두는 아스널을 대신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향했다. 벵거 감독의 후회가 막심하다.

4. 개스코인 → 맨유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도 후회했다. 바로 잉글랜드의 재능 폴 개스코인을 놓친 사건이다. 퍼거슨은 "감독 생활 중에서 가장 큰 실수"라며 아쉬움을 삼켰다. 퍼거슨 감독은 1988년 폴 개스코인 영입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맨유는 21세 개스코인의 영입을 눈앞에 뒀으나 토트넘에 빼앗겼다. 토트넘은 개스코인의 부모님에게 집을 선물하면서 이적 계약서에 사인을 받았다.

3. 칸토나 → 셰필드 웬즈데이

전 셰필드 웬즈데이 감독 트레버 프란시스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범하고 만다. 프란시스는 에릭 칸토나에게 관심을 가지며 영입을 검토했다. 칸토나도 셰필드 웬즈데이 이적에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남은 절차는 며칠간의 입단 테스트뿐이었다. 하지만 궂은 날씨로 프란시스는 칸토나의 실력을 제대로 확일할 수 없었다. 프란시스는 입단 테스트 기간을 연장하길 원했으나, 자존심에 금이 갔던 칸토나는 리즈 유나이티드로 발걸음을 옮겼다.

2. 지단 → 블랙번

'중원의 사령관' 지네딘 지단이 블랙번과 연결된 적이 있었다. 당시 지단은 유망주에 불과했다. 블랙번 케니 달글리시 감독은 지단의 영입을 구단에 건의했으나 블랙번 구단주 잭 워커의 답변은 부정적이었다. 워커 구단주는 "팀 셔우드가 있는데 지단이 왜 필요합니까"라며 달글리시의 건의를 단호히 거절했다. 참고로 팀 셔우드는 현재 아스톤빌라 감독을 맡고 있다. 결과적으로 블랙번은 축구 역사상 위대한 선수를 놓쳤다.

1. 마라도나 → 셰필드 유나이티드

아르헨티나에서 유망주를 물색하던 전 셰필드 유나이티드 해리 하슬람 감독의 눈이 번쩍였다. 바로 디에고 마라도나 때문이었다. 하슬람 감독은 마라도나의 재능을 알아보며 구단에 영입을 요청했다. 예상 이적료는 20만 파운드(약 3억 5,000만 원). 셰필드 유나이티드는 마라도나의 이적료가 너무 비싸다고 판단해 알렉스 사베야를 대체자로 영입했다. 사베야의 이적료는 16만 파운드(약 2억 8,000만 원)였다. 셰필드 유나이티드가 4만 파운드(약 7,000만 원)만 더 가지고 있었으면 그들은 '축구의 신'과 함께할 수도 있었다.

mellor@stnsport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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