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시즌2] 류현진이 보여준 '5초 신공'

스페셜 2014. 3. 2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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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스페셜9 제휴] 어제(23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류현진의 시즌 첫 등판의 가장 큰 고비는 다저스가 3-0으로 앞서던 4회였다. 2루수 디 고든과 유격수 핸리 라미레스가 번갈아 버벅대면서 1사 1,2루의 위기를 자초했다. 여기서 나온 타자가 마크 트럼보. 계속 눌려 있던 D백스는 추격의 실마리를 잡았다. 경기장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이날 승부의 최대 고비였던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봤다.

* 제1구 = 트럼보가 타석에 들어섰다가 타임을 외치고 뒤로 빠졌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심판의 재촉을 받고 다시 타석에 돌아왔다. 구심이 플레이볼을 선언했다. 포수 엘리스의 사인은 몸쪽 직구. 2루주자를 흘끗 본 류현진은 이내 타자를 향해 공을 뿌렸다. 87마일(140km)짜리 직구에 트럼보의 방망이가 돌았지만 힘없는 땅볼 파울.

* 제2구 = 이번에는 포수 엘리스가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77마일(124km)짜리 체인지업이 땅에 꽂혔다. 볼카운트 1-1.

* 제3구 = TV 중계 카메라가 유격수 라미레스를 비췄다. 그가 마운드 쪽을 보며 뭐라고 한마디 한다. 입 모양으로 봐서는 "마이 배드(my bad. 내 잘못이야)"라고 하는 것 같다. 포수 사인은 또다시 바깥쪽 체인지업이다. 78마일(126km)짜리에 파울. 불카운트는 1-2로 투수가 유리해졌다.

* 제4구 = 포수 엘리스는 직구 사인을 내고 여전히 바깥쪽으로 앉았다. 그러나 류현진의 공은 가운데로 몰렸다. 스피드도 89마일(143km) 정도였다. 다행히 트럼보의 타이밍이 늦어 우익수 파울 플라이에 그치고 말았다.

류현진의 시즌 첫 승을 두고 많은 관전평이 있다. 혹자는 핀 포인트 제구력을 얘기하고, 혹자는 예리한 체인지업을 말한다. 또 경기운영능력, 위기관리능력 같은 실체가 아리송한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라다>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시간 공격이다. 타자로 하여금 숨 쉴 틈 주지 않는 '속공'이야말로 이날 경기의 압권이었다. 특히 가장 어려웠던 4회 트럼보 타석은 시간 공격의 백미였다.

돌이켜보자. 수비 실수로 인한 주자가 2명이나 나갔다. 야구에서 가장 실점 확률이 높은 상황이다. 게다가 상대 타자는 '걸리면 가는' 오른손 잡이 슬러거다. 누가 마운드에 있더라도 심장이 쫄깃해질 수 밖에 없다.

투수가 위기라고 느끼면 나타나는 현상은 잡스러운 동작의 출현이다. 괜히 마운드 흙을 고른다거나, 공을 닦는다거나, 플레이트에서 발을 한번 풀어본다거나, 땀을 닦는다거나, 견제구를 한번 던져본다거나.... 대부분의 투수들이 분위기 전환을 위해 시간을 끈다. 한창 오르는 상대방의 기세가 숨죽을 때를 기다린다.

그런데 이 99번 투수는 그런 게 없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인다. 그냥 잡으면 던진다. 상대방의 기세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가 트럼보를 상대하면서 공 4개를 던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1분 35초 밖에 되지 않았다. 그 중 투구 1개당 쓴 시간은 5초 남짓에 불과하다. 포수가 사인 내는데 2~3초, 끝나자마자 곧바로 홈으로 릴리스 한다. 그러니까 5초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인터벌 때 나오는 시간이다.

물론 이 특이한 투수는 포수의 사인을 마다하는 법도 없다. 초구도 그렇다. 엘리스의 사인은 몸쪽 직구였다. 아마 웬만한 투수 같으면 고개를 저었을 지도 모른다. 스피드도 제대로 안 나오는 데(이날 평균 87~89마일) 잘못했다가 한방 걸리면 어쩌나 겁이 날 법도 하다. 또 지나치게 코너워크 의식하다가 몸에 맞는 볼이 나올 수도 있다. 하여튼 초구 몸쪽은 피하고 싶은 코스다. 하지만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냥 던지라면 던진다.

분명히 투수가 몰려야 할 대목인데 오히려 상황은 반전이다. 타자 입장에서, 생각은 커녕 숨 고를 틈도 없다. 초구와 4구째 직구는 사실 위험한 공이었다. 특히 4구째는 실투나 다름 없었다. 약간 낮기는 했지만 89마일짜리가 가운데로 몰렸다. 그럼에도 트럼보가 제대로 된 타이밍을 잡아내지 못하고 파울 플라이에 그친 것은 '속공'의 효과였다.

마운드에서 안색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실투했을 때도, 동료가 실수했을 때도 얼굴 봐서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언제나 뚱~한 무표정 그대로다. 틈을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이런 패턴이 항상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무조건 빨리 몰아친다고 늘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자칫 흥분해서 지나치게 공격성을 띌 때는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 때로는 페이스의 완급을 조절하는 것도 필요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무대뽀' 스타일은 흥분과 냉정의 경계선을 절묘하게 지킨다. 지극히 공격적인 투구지만, 냉정을 잃고 무모하게 정면 승부로만 일관하지는 않는다. 강하게 압박하지만, 영리하게 이용할 줄도 안다.

투수의 눈빛 하나, 표정 하나는 그라운드를 지배한다. 우리편, 상대편, 심판뿐 아니라 관중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벤치나 동료 수비수들이 가장 짜증나는 순간이 마운드에서 질질 끌 때다. 시간이 길어지면 불안감도 커진다. 감독, 코치들이 입이 닳도록 얘기한다. "맞을 때 맞더라도 빠르게 승부해라." 그러나 실제 그렇게 할 수 있는 투수는 드물다. 그 중 하나가 류현진이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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