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축구 천재, 최고 지략가 우뚝

김태현 기자 2016. 12. 28. 04: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병수 영남대 감독, 2016 대학축구연맹 최우수감독상 영예

2014년 12월 리처드 베이트(70) 국제축구연맹(FIFA) 강사는 경기도 파주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P급 라이선스(축구 지도자 자격증 최고 등급) 강습을 했다. 베이트 강사는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구냐. 내 평생 저런 축구 천재는 본 적이 없다”며 한 교육생을 극찬했다. 잉글랜드축구협회 고문으로 40년이 넘는 지도자 경력을 가진 베이트 강사가 지목한 사람은 김병수(46·사진) 영남대 감독이었다. 베이트 강사는 김 감독의 신출귀몰하고 다양한 전술을 담은 코칭 기법과 논문 주제 등에 감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감독은 올해 영남대의 4관왕(추계대학연맹전·1, 2학년 추계대회·U리그 권역 12전·전국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지난 23일엔 ‘2016 한국대학축구연맹 시상식’에서 최우수감독상 영예를 안았다.

그는 서울 미동초등학교 시절 축구신동으로 소문났다. 떡잎을 알아본 한홍기 전 포항제철 감독은 큰 선수로 키워 보겠다고 방학 기간 포철축구단 숙소로 데려가 특별과외를 시킬 정도였다. 그는 박창선, 최순호 같은 쟁쟁한 스타들과 함께 훈련했다.

하지만 일찍 꽃피운 재능은 오히려 화근이 됐다. 서울 경신고 시절부터 혹사를 당했고 결국 탈이 났다. 경신고 2학년 때 처음 부상을 당했다. 체계적인 재활을 받지 못한 채 진통제를 맞고 출전했다. 고려대에 진학한 뒤엔 양쪽 발목 인대가 늘어나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부상에도 재능은 뛰어나 김 감독은 1992 바르셀로나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됐다. 디트마르 크라머 당시 올림픽 대표팀 감독은 그의 재능에 반해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상 때문에 그는 올림픽 결선을 뛰지도, 독일로 가지도 못했다. 가난한 홀어머니는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 그는 다친 곳을 수술해 주겠다는 코스모 석유 욧카이치 FC의 제안을 받아들여 93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선수 시절 무려 7번이나 수술대에 오른 그는 불과 27세였던 97년 오이타 트리니타(일본)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국내 최고 미드필더가 되겠다는 꿈은 그렇게 무산됐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 감독은 98년 고려대 축구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비운의 천재였던 김 감독은 그러나 자신의 못다핀 재능을 선수 지도에 쏟아부으며 ‘최고 지략가’로 우뚝 섰다. 당시 고대 선수였던 김태륭 해설위원은 27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훈련이 끝나면 다음 날 훈련을 기다렸다. 감독님이 훈련 때 하라는 대로 하면 경기 때 다 되는 게 너무 신기했다”고 말했다. 족집게 과외하듯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경기를 운영해 선수들이 맘편하게 그라운드에 나섰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2008년 영남대 사령탑에 올랐다. 당시 영남대는 해체설이 나돌 정도로 부실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축구를 해야 한다”며 선수들을 독려했고, 체계적으로 조련했다. 여기서 김 감독은 자신의 특장으로 불린 ‘팔색조 전술’을 꽃피웠다. 기존의 약한 전력을 메우기 위해 대회에 나설 때마다 새로운 전술, 맞춤형 전술을 고안했다. 남들 다하는 지옥훈련 없이도 변화무쌍한 전술로 선수들의 흥을 돋웠다. 그는 또 밸런스와 빠른 패스워크를 중요하게 여긴다. 볼을 가지고 있는 선수보다 가지고 있지 않은 선수의 움직임이 좋아야 경기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출나게 뛰어난 인재 없이 영남대는 대학무대를 평정했다. 2010년 춘계대학연맹전 우승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대학 팀이 따낼 수 있는 타이틀을 모두 따냈다. 지난 5월 11일 FA컵 32강전에서 영남대를 1대 0으로 간신히 누른 성남 FC 선수들은 “정말 힘든 경기였다. K리그에서도 못 보던 전술이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영남대에서 김 감독의 지도를 받은 신진호(28·상주)와 이명주(26·알 아인)도 “최고의 지도자인 김 감독님에게 축구를 배울 수 있어 행복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제 김 감독에게 대학 리그는 너무 좁아 보인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몇몇 프로팀에서 그를 영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번번이 막판에 무산됐다. 일부 축구인들은 그의 성품이 우직해 소위 말하는 ‘정치’를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언제쯤이며 K리그에서 김 감독을 볼 수 있을까.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뉴스 미란다 원칙] 취재원과 독자에게는 국민일보에 자유로이 접근할 권리와 반론·정정·추후 보도를 청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고충처리인(gochung@kmib.co.kr)/전화:02-781-9711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