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故 크라머 통역.. '왜 신태용도, 서정원도 크라머였나'②

홍의택 입력 2016. 9. 11. 06:03 수정 2016. 9. 1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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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홍의택 기자=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은 마지막까지도 한국 방문을 희망했다. 20여 년 전 대한민국에서 동고동락했던 이들을 그토록 그리워했다.

"한국에 다시 한 번만 가봤으면 좋겠어. 제자들 얼굴 보고 저 세상 가는 게 소원인데, 몸이 따라주질 않네"

실제 신태용 국가대표팀 코치, 서정원 수원 삼성 감독 등이 합심해 방한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크라머 감독의 몸 상태는 갈수록 악화됐다. 장시간 비행을 견딜 수 없어 결국 무산됐다.

:: 1편에 이어 계속(다시보기 클릭)

■ 경험해보지 못한 지도법, "축구가 이런 거였어?" 대한축구협회는 1991년 1월 크라머를 올림픽 대표팀 총감독 겸 기술 고문으로 삼았다. 선진 축구를 탐낸 이들은 명망 있는 지도자를 물색했고, 때마침 유럽 전역으로 뻗어 나가던 크라머 감독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미 독일을 평정한 명장이었다. 분데스리가의 상징 바이에른 뮌헨 수장에 서독 대표팀 수석코치까지 지냈다. 그뿐 아니다. 동아시아에 도전한 이력도 있었다. 1968 멕시코 올림픽서 일본에 동메달을 안겼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뒤에는 한국을 업고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으로 진격할 참이었다.

축구 선수로서 유럽식 지도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시대. 설렜다. 신기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놀라움을 넘어 충격에 가까운 감정까지도 느꼈다. "말 한마디가 명언이고, 교과서였으며, 메모한 뒤 두고두고 되새겨볼 만큼의 가치가 있었어요"라고 떠올리는 이도 있었다. 상황에 따라 저음과 고음을 넘나드는 목소리로 선수단을 장악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캐치해냈다는 것. 당시 통역을 맡은 황봉주 씨(상단 사진)가 보다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경기 전, 경기 중, 경기 후에 하시는 말씀들이 있어요. 무작정 늘어놓으시는 게 아니었어요. 많은 얘길 안 하시면서도 포인트만 딱딱 주입하셨죠. 미팅을 굉장히 많이 했었는데, 과거 경험담에서 우러나오는 철학들을 하나하나 듣다보면 '아, 축구에 이런 면도 있구나'라는 걸 느껴요. 선수들도 '그 시절이 좋았지. 정말 많이 배웠어'라며 돌아보곤 하니까요. 기존의 것과는 확실히 달랐어요"

■ 스승의 한이 맺힌 올림픽... 감독이 돼 그 무대로 신태용 국가대표팀 코치가 급작스레 올림픽 대표팀 감독직을 떠안았을 때다. 이에 황 씨가 곧장 크라머 감독을 찾았다. 올림픽 대표팀에서 만난 제자가 24년 뒤 그 팀의 감독이 됐다니.

그런데 마냥 그 순간을 만끽할 수는 없었다. 황 씨는 "크라머 감독님이 그 말을 듣으시고도 알쏭달쏭해 하셨어요. 100% 이해를 하신 건지 잘 모르겠더군요"라고 부연한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을 만큼 병세가 심했던 탓이다.

결국 '올림픽 대표팀 감독 후임' 신태용과의 재회는 사별 뒤에야 이뤄졌다. 장소도 바뀌었다. 크라머 감독댁 거실 소파가 아닌 한산한 묘지로. 신태용 감독은 결전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떠나기 전 짬을 내 그 묘를 찾았다. 차오르는 존경심에 넙죽 엎드려 큰절까지 올렸던 각별한 사이. 크라머 감독에게 "한국에서는 이렇게 합니다"라며 감사함을 표하던 신태용 감독도 허탈한 마음으로 털어놨다.

"바르셀로나 멤버였던 내가 20년도 더 지나 감독으로 올림픽을 다 나가네. 그때 우리 은사가 이루지 못한 꿈을 항상 품고 있었는데, 이제 내가 그 무대에 서게 됐어.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영광스러웠겠냐. 하늘에서 보고 계실 선생님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려야지"

■ 한 프로팀 감독이 돼서도 그리워했던 이름, 크라머 서정원 감독은 지금도 크라머 감독의 가르침을 되뇐다. 모바일 메신저 배경 화면에 크라머 감독과의 투샷을 설정해놨을 만큼, 서재 책꽂이에 크라머 감독의 사진을 나열해뒀을 만큼 애착이 크다. 수원 감독으로 내정된 뒤 했던 일 중 하나도 곧장 독일로 날아간 것이었다. 공식 발표 전, 조언을 구하기 위함.

"선생님, 현재 상황이 이렇습니다. 수원이란 팀의 감독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닐 거야. 긴장되는 날도 있고, 그 책임이 막중하게 느껴질 날도 있을 테지.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감독 권위야. 감독이 100% 쥐고 있어야 선수들이 믿고 따라온다고. 확실한 주관을 갖고, 주위에 구애되지 않으며, 누가 브레이크를 걸든 이겨 나가야 한다"

크라머 감독은 그런 서정원 감독을 유독 아꼈다. '쎄오(Seo)' 대신 한국식 발음 '서'를 익혔다. 정확히 구사하지는 못했어도, '쎄오'와 '서'의 그 중간 발음으로 부르곤 했다.

지도자 길을 걷게 된 신태용, 서정원 두 제자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축구 전문 책자를 발행하는 지인을 통해 관련 자료를 대거 공수해 전달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게르트 뮐러, 프란츠 베켄바우어, 파울 브라이트너, 제프 마이어 등과 함께 찍은 흑백 사진을 손수 골라 건넸다.

"나는 이제 얼마 못 버텨. 내가 죽으면 다 무용지물이니까 이 사진들 갖고 가. 바이에른 뮌헨 등에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이걸 들고 가 말하면 된다네"

■ 축구가 아닌 인생의 스승... 이제는 별이 돼 가슴 한 구석에 단순 감독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푸근한 인상을 빌려 '할아버지'라 불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인생을 바꾼 '은인'으로 불렀다. 황 씨는 크라머 감독을 '철없던 20대 초반에 인생관을 확립해준 인물'로 정의했다.

"아직도 가슴에 간직하는 한마디가 있어요. '축구장에 들어가면 잔디를 씹어먹어라'. 그만큼 강하고 당당하게 경기하란 의미였죠. 사실 당시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했는데, 25년쯤 지나니까 서서히 느껴요. 그때 그 가르침이 축구뿐 아니라, 인생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요. '진정한 교본이었구나' 싶죠"

신태용, 서정원, 노정윤, 곽경근, 이임생, 김인완, 정재권, 김도훈, 강철, 최문식, 김병수, 박건하, 한정국, 김도근, 김기남, 김봉수, 조진호, 나승화, 김귀화, 조정현, 임근재, 정우영, 이기범, 이문석, 신범철, 김용범, 황규룡, 권태규, 백승대, 안진규, 정광석, 이태홍, 유영록 등.

"국내 프로팀과 붙어도 쉽게 안 졌습니다. 해외 전지훈련 중 분데스리가 몇몇 팀과 싸워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어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정말 강했거든요. 크라머 감독님은 동기를 부여해 제자들 능력을 120~130%까지 끌어냈죠. 그래서 선수들도 아쉬운 소리를 많이 했어요. '크라머 감독님과 대회 나갔으면 사고 한 번 칠 수 있었을 텐데'라면서요"

통역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직접 목격했던 황 씨가 그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 함께했던 선수들과 관련해 "한국은 무한한 잠재력을 갖춘 나라다"라고 평가했던 크라머 감독. 팀을 마지막까지 이끌지 못한 데 굉장히 마음 아파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자존심과도 얽힌 문제로 자주 표현은 안 했으나, "세계 대회에서도 한 번 해볼 만한 경쟁력이 있었는데"라며 곱씹던 그다.

크라머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과 함께한 시간은 만 1년이 조금 넘는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 진출에는 성공했으나, 내부 갈등으로 1992년 2월 지휘봉을 내려놨다. 결코 오래지 않았던 나날. 그 짧은 순간에도 크라머 감독은 강렬한 빛이었다. 이제는 쉰 줄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가슴 한 구석에 깊이도 들어찼다.

+ 다가오는 17일은 故 크라머 감독의 1주기. 25년 전 푸른 눈의 지도자에게서 축구를, 인생을 배운 이들이 또 한 번 그 이름을 꺼낼 터다.

사진=황봉주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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