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택의 제대로축구] '학범슨' 김학범 감독, 여우 같은 그 남자의 수

홍의택 2014. 11. 24.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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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종종 김학범 감독과 전술, 전략을 논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온 건 가장 기본적이고도 원론적인 답. 가령 "전략은 무슨. 빨리 주고, 빨리 받는 것. 그거면 됐지. 그럼 축구가 다 쉬워지잖아?"라며 반문하는 식이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수 싸움을 그치지 않았고, 한 차원 높은 계산으로 상대를 괴롭히려 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특정 카드를 끝내 적중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참 '여우' 같다 싶었다. 2014 하나은행 FA컵 결승전도 마찬가지다. 불리하다 싶었던 승부를 끝내 뒤집었다.

▲ FA컵 결승전에서 택한 '강팀 상대법'은

예전 같지 않았다. 호화 군단 레알마드리드에서 파생된 '레알 성남'이라는 닉네임도 모두 옛날 이야기였다. 김 감독 개인적으로는 강원에 이어 두 번째 맡는 시민 구단. 한창때의 성남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무작정 맞불을 놓을 법했지만, 이제는 현실에 기반을 둔 생존법을 고민해야 했다. 달걀 같은 팀으로 바위 같은 상대를 냅다 들이받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결과 강팀을 상대로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컨셉을 선별적으로 활용해왔다. 하나는 선수들 개개인에게 잠재된 싸움닭 면모를 모조리 쓸어담는 방법. 카드를 각오한 채 앞선에서부터 덤벼드는 등 상대를 거칠게 다뤘다. 2012년 7월 강원을 데리고 전북 원정(2-1 패)에 나섰을 때가 그랬다. 다른 하나는 엉덩이를 뒤로 빼고 내려앉아 상대를 옥죄는 방법이었다. 지난달 FA컵 준결승전 전북전(0-0무, 승부차기 4-5승)이 해당한다. 서울전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처지는 입장, 김 감독은 전자를 택해 단판 승부를 준비했다.

▲ "수비적으로 나왔다"던 최용수 감독 vs "라인을 올렸다"던 김학범 감독

최용수 감독은 "상대가 수비적으로 나왔다"라며 패인을 설명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상반된 분석을 내놓았다. "오늘 승부처는 전반전에서부터 수비 라인을 많이 내리지 않고 올린 것에 있다. 그때 서울에 문제점이 많이 발생하는 걸 알았다"라는 그의 말에는 120분짜리 경기 한 편이 그대로 스며 있었다. 그간 서울이 AFC 챔피언스리그와 같은 토너먼트 대회에서 바짝 웅크린 상대 밀집 진영을 깨는 데 애를 먹었던 것과는 반대의 발상이었다.

전체적으로 서울이 공격하고, 성남이 수비하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성남이 최초 압박을 가하는 지점(중앙선 언저리)과 최후방 수비 라인을 설정한 지점(페널티박스로부터 최소 1~20m는 떨어진 지점)을 감안했을 때, 이는 물러났다기보다는 전력 차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밀렸다고 보는 편이 더 맞다. 그럼에도 쉽사리 뚫지 못한 성남의 전형에 대해서는 '수비적으로 나왔다'기보다는 '수비를 완벽에 가깝게 잘했다'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이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장한 이요한은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김학범 감독님이) 최용수 감독님보다는 한 수 위이시지 않나 싶다. 아무래도 자신감이 있으셨다. 전북전에는 수비적으로 얘기했는데, 서울전은 우리에게도 충분히 공격 루트가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 수비가 약점이 있고, 우리도 장점이 있기 때문에 빠른 선수 (김)동섭이나 (김)태환이 역습 상황에서 해줄 수 있었다. 라인을 올려서 하는 연습을 많이 했다. 그게 연습한 그대로 됐다. 공격적인 부분에서는 조금 미흡한 부분이 있었어도, 수비적인 조직 부분에서는 선수들이 100%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감독님만 믿고 따라갔다"

김 감독의 수가 먹힌 건 단지 포백 수비 라인, 이를 감싸는 수비형 미드필더의 헌신 덕분만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정삼각형 중원 조합의 꼭짓점에 걸출한 플레이메이커를 배치해온 그다. 2006 K리그 우승을 거머쥘 당시 김두현, 강원 시절에는 지쿠를 활용해온 김 감독은 성남에 돌아온 뒤에는 제파로프를 중용했다. 이 선수는 공격을 창조함과 동시에 수비적으로도 엄청난 공헌을 해줬다. 김동섭과 나란히 서 1차 압박을 시도한 뒤에는 아래로 내려와 수비 블록을 구축하면서 2차 압박에 들어갔다. 오스마르 슈팅에 막던 중 통증으로 데굴데굴 구르던 것이 대표적인 장면. 수비진의 부담은 한결 줄었다.

그 외 공격진의 역할도 컸다. 특히 김태환이 보여준 수비 공로는 대단했다. 이미 상대가 볼을 소유하고 있을 때, 뒤에서 달려와 덮치는 형태로라도 꼭 걸고넘어졌다. 충돌 상황에서는 볼을 바로 내주지 않고 잡아두며 심기를 건드렸다. 후반 막판으로 흘러갈수록 서울의 급해진 심리가 몇몇 장면에 묻어나기도 했다. 김동섭도, 김동희도 착실히 임했다. 김 감독이 라인을 올릴 수 있었던 건 수비적으로 준비된 선수들 덕분. 악과 절박함이 뒤섞인 적극성은 상대팀 서울에서는 느끼기 힘든 무언가를 자아냈고, 각각의 팀원이 구성한 조직은 쫀득하고도 쫄깃한 경기 운영으로 이어졌다.

▲ 성남의 발목을 잡은 몇 가지 요소

개개인의 실수가 옥에 티를 남길 수도 있었다. 그동안 골대를 비우고 나왔을 때 안정감이 떨어졌던 골키퍼 박준혁은 이번에도 흔들렸다. 에스쿠데로와의 경합에서 마지막 태클 한 방이 아니었다면 영웅 대신 죄인이 될 뻔했다. 후반 들어서도 몇 번의 킥 실수로 공격권을 넘겨주자, 김 감독이 성내는 모습이 전광판에 잡혔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이내 손뼉을 치며 괜찮다는 제스쳐를 취했고, 주장 박진포가 다가가 독려하면서 살얼음판을 걸어나갔다. 수비진의 잔실수도 많았다. 기본적인 패스미스부터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며 위기를 초래한 적도 있었다.

파울이라는 변수도 존재했다. 더 많이 뛰면서 몸으로 부딪치는 플레이가 많았던 만큼 페널티박스 주위에서 내준 프리킥이 많았다. 준결승전 전북전과도 맥이 같은 부분. 인플레이 상황에서 큰 문제를 보이지 않았던 성남은 세트피스, 혹은 세컨볼 리바운드 싸움에서 실점 빌미를 흘릴 수 있었다. 페널티박스 안에 상대 공격 숫자가 비등하게 들어와 있을 때, 재빨리 반응하기 어려운 장면도 종종 나오기 마련이다. 실제 후반 36분 김진규의 헤더에 휘청했으나, 골대가 가까스로 성남을 살렸다. 골포스트를 맞고 안으로 꺾일 수도 있었던 볼은 밖으로 튀어나왔다.

발 빠른 공격수들을 살리지 못한 점 역시 짚어봐야 한다. 김태환은 공격적으로도 완성된 모습을 보였다. 직접 중앙으로 잘라 들어오거나, 상대 최종 수비에 맞춰 횡으로 뛰다가 패스 시점부터 종으로 바꿔 뛰며 오프사이드 라인을 부쉈다. 상대 수비 2~3명을 달고 끝줄까지 다가가 코너킥을 얻어내기도 했다. 다만 후방에서 볼을 뺏어낸 직후 처음 나가는 패스가 부정확했다. 기본적으로 김태환, 김동섭, 김동희를 속도 경합에 가담케 할 상황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 승부를 연장까지 끌고 갈 수 있었던 데에는 확실히 공격력보다는 '수비력'이 크게 작용했다.

▲ 전상욱의 출전 실패에도 의연했던 모습

연장 후반에 돌입하기 직전, 김 감독은 김기현 트레이너를 불러 승부차기 준비를 지시한다. 골키퍼 장갑으로 갈아낀 전상욱은 스트레칭을 한 뒤 서포터즈석 바로 앞에서 동료가 차주는 볼을 받았다. 하지만 서울이 골키퍼 유상훈을 내보내는 동안 성남 벤치는 지나치게 더뎠다. 투입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면 조금 더 일찍, 더 빠르게 준비했을 터. 트레이닝복 바지를 벗고 멍하니 벤치 옆에 서 있던 전상욱의 뒷모습을 보면 '작전 실패'라고 단정 짓기에 딱 들어맞지 않는 구석도 있다. 어쩌면 김 감독 스스로 두 선수를 놓고 저울질한 건 아닐까 싶다.

애가 탄 코칭스탭은 소리를 질렀고, 손짓 발짓 다 써가며 볼을 걷어내란 표시를 했다. 곽해성의 로빙 패스를 받은 황의조가 등을 진 상태로 볼을 내보낼 만도 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발을 한 번 구른 것 말고는 의외로 담담했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전상욱을 위로한 뒤 박준혁에게 다가가 팔을 툭 한 번 친 게 전부였다. 김 감독은 "(골키퍼를) 바꾸려는 건 선수들에게 심적인 부담을 주기 위함이었는데, 그게 안 됐어도 잘 됐을 것 같다"라며 "박준혁이 몸이 더 빠르기에 도리어 잘 됐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 김학범-전상욱-박준혁, 세 남자가 완성한 우승

박준혁은 "(교체를) 예고 받은 건 맞고, (전)상욱이 형이 몸을 풀고 있는 것도 봤다. 나를 바꿀 거로 생각했다"라고 했지만 결국 승부차기 수문장으로 서게 됐다. 180cm 초반의 신장. 팔, 다리 역시 골키퍼치고는 길지 않아 골대 앞에서 줄 수 있는 위압감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풋살 대표팀을 지냈을 만큼 순발력과 반응 속도라는 무기가 있었다. 박준혁은 첫 번째 키커 오스마르부터 좌절케 했고, 비책을 전해준 전상욱은 두 손을 맞잡으며 감격했다(상단 마지막 사진 노란색 실선 표기). 세 번째 몰리나까지 막아 세운 박준혁은 전수받은 방법을 밝혔다.

"상욱이 형이 분석한 내용을 고스란히 알려줬다. (서울 선수들의 PK 킥 장면을) 몇 번씩 돌려서 보는데, 일단 오스마르 같은 경우에는 짧게 서면 내가 서 있는 왼쪽으로 차고, 멀리 서 있으면 오른쪽으로 찬다고 그랬다. 그런 세세한 부분을 알려줬다".

성남은 네 명의 키커가 모두 깔끔하게 성공하며 왕좌에 올랐다. 묘수로써 서울을 묶어낸 김 감독은 '믿음'이란 말로 포장했다. 승리 요인을 세세히 설명할 수는 없는 자리라 선수들과의 믿음을 비결로 꼽았다. 하지만 지난 1일 전남 광양에서 원정 경기를 치른 뒤 다음 날 서울 월드컵경기장을 찾아 서울과 전북의 현장에서 살폈을 만큼 치밀하게 준비했다. 당시 수비적으로 임한 전북이 라인을 내리지 않고 허리 싸움을 거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도 있다. 이어 김 감독은 이번 우승의 의미, 앞으로 남은 강등권 싸움에 대한 다짐도 새겼다.

"지도자가 경기를 들어가면 불안할 때가 있고, 편할 때가 있다. 선수 교체 타이밍도 마땅치 않고 그게 잘 안 맞아떨어진 것도 있지만, 골을 먹고 주저앉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이렇게 어려운 계기에 치고 나간다는 것. 지도자로서 승부 기질을 보여준 우승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민구단으로서 처음 출발하는 한 해에 결실을 맺었다는 건 성남 시민 구단이 얼마나 많이 발전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거듭날 것 같다.

"우리가 (정규리그 하위권에) 내려와 있을 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선수들이 (최근) 경기를 못 이겼지만, 내용은 굉장히 좋았다. 이번엔 내가 어떻게 서울을 잡는지 보여주겠다고 했다. 선수들도 나를 믿고, 나 역시 선수들을 믿고. 이게 좋은 현상이 아닌가 한다. 선수들을 믿기에 걱정을 안 한다".

글, 사진=홍의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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