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도전 나선 김도근, 전남의 전설이었던 만능 살림꾼②

2008. 1. 1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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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4 웨스트햄 입단 불발...J리그에 도전 "웨스트햄 사건 때문에 슬럼프가 왔었다. 한번 나갔다오니까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것이다.(웃음) 한국에서 뛰기 싫고, 외국에서 뛰고 싶었다. 사실 슬럼프라는 것도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 것이었다. 의욕이 생기지 않으니 그것이 훈련과 경기에 나타났고, 예전 같은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 선수 생활 내내 어느 위치에서도 제 몫을 하는 멀티 플레이어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차라리 한 포지션에서 자리 굳히면 특화되어서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그 점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수비수로 갔을 때부터 생각했던 것이다. 그 무렵부터 원래 포지션이 아닌 다른 포지션에서 뛰기 시작했는데, 좋게 말하면 멀티 플레이어지만 쉽게 말해 땜빵용이라는 이미지도 있었다. 당시 기사에도 그런 식으로 나오기도 했고...

생각해보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프로까지 거치면서 안해 본 포지션은 골키퍼밖에 없는 것 같다.(웃음) 사실 한 자리만 꾸준히 보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여러 자리를 오가다보면 포지션 이해라든지 완숙도 등에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이 괜찮다면 다 소화할 수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팀에서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기를 원하고, 나는 그런대로 잘 소화한 편이라 좋은 의미의 멀티 플레이어로 인정받은 케이스다. 그 점에서는 만족한다.

- 프랑스 월드컵 이후에 최용수 선수와 함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가 소득 없이 돌아온 것이 큰 화제가 됐었다.

그 때의 일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 왜 그렇게 됐는지... 에이전트 말로는 웨스트햄에서 나와 용수 형을 원한다고 했었고, 잉글랜드에 와서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된다고 해서 갔었다. 처음 진행됐던 것도 잉글랜드 쪽 에이전트에게서 연락이 와서 이뤄졌던 것이었다. 그래서 잉글랜드로 갔는데, 막상 도착하니까 웨스트햄에서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

간혹 공식 발표가 나기 전에 매스컴에 보도가 됐을 때 그렇게 부인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영입 계획이 없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웃음)

결국 거기까지 간 터라 테스트를 받기로 하고, 1주일 정도 같이 훈련을 했다. 시즌 중이라 1군 선수들은 경기를 뛰러 가고 나머지 잔류군과 같이 훈련을 하다가 아무 소식 없이 슬그머니 들어왔다. 갈 때는 영국 공항에서도 카메라도 많이 오고 난리였었는데..(웃음)

- 그런 과정을 겪은 뒤에 2000년에 갑자기 일본 베르디 가와사키로 이적했다. 어떤 이유가 있었나?

웨스트햄 사건 때문에 슬럼프가 왔었다. 한번 나갔다오니까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것이다.(웃음) 한국에서 뛰기 싫고, 외국에서 뛰고 싶었다. 사실 슬럼프라는 것도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 것이었다. 의욕이 생기지 않으니 그것이 훈련과 경기에 나타났고, 예전 같은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대로 가면 나만 손해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2000년 대한화재컵에서 2게임에 4골을 터트리는 등 컨디션을 찾기 시작했다. 결승에서 부천에게 패하면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총 5골을 터트리며 득점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이)원식이에게 득점왕을 빼앗겼다.(웃음)

그렇게 몸 상태를 회복하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마침 그 게임을 봤던 베르디에서 입단 제의가 왔다. 사실 베르디 말고 세레소 오사카와 이야기가 진행 중이었고, 거기로 가기로 되었던 것인데, 사정상 바로 가기가 힘들어서 베르디에 6개월 있다가 가는 형태가 되었던 것 같다.

그 때 베르디에는 재일교포인 이국수 감독님이 계셨고, (김)현석이 형이 먼저 와 있었기 때문에 적응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개인적으로 일본축구는 대표팀 선수들이 모였을 때는 괜찮지만, 프로의 경우에는 우리보다 약하다고 생각한다. 실력은 우리가 위라고 생각했고, 얼마나 일본 무대에 적응하느냐의 문제였다. 스타일도 다르고 선수들과의 호흡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주전으로서 활약했다.

베르디의 경우 원래 명문이었고, 대표도 많이 배출하고, 우승도 많이 했던 팀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명성이 많이 쇠퇴한 상태였는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선수들의 실력은 다소 떨어졌지만, 베르디라는 자부심은 굉장히 강했다는 점이다. 다만 자부심이 강해 조금 건들거린다고 해야 할까. 약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실력에 비해 그런 면이 보여서 아쉬움이 있었다.

- 그리고 6개월 만에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했는데.

2000년 후반기에 베르디로 가서 6개월을 뛰고, 당초에 가려고 했던 세레소 오사카로 갔다. 당시 세레소에는 (윤)정환이와 (노)정윤이 형이 있었다. 거기서 2001년 전반기를 소화했는데, 아쉽게도 성적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감독이 외국인 선수를 교체해달라고 요청을 했었다고 하더라. 그나마 우리라도 있었으니까 그 정도였는데, 감독 입장에서는 다르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일본은 성적이 나쁘면 감독이 아니라 외국인 선수를 먼저 교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그렇게 되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남 드래곤즈 시절 부천과의 경기에서 ⓒ베스트일레븐

Part.5 전남으로의 컴백 "몇몇 구단에서 제의가 왔었고, 돈도 더 많이 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나는 당시 전남 감독이셨던 이회택 감독님과도 인연이 있었고, 전남 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 지역 분들과 정도 많이 들었고...결국 몇 천 만원 손해 보더라도 전남으로 가자고 생각했었다."

- 결국 1년여 만에 한국으로 컴백하게 됐다. 친정팀인 전남으로 갔는데.

완전 이적으로 갔었던 터라 아무 팀이든 입단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당시 부산 사령탑이셨던 김호곤 감독님을 비롯해 몇몇 구단에서 제의가 왔었고, 돈도 더 많이 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나는 당시 전남 감독이셨던 이회택 감독님과도 인연이 있었고, 전남 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 지역 분들과 정도 많이 들었고...결국 몇 천 만원 손해 보더라도 전남으로 가자고 생각했었다.

- 2002월드컵을 앞두고도 대표팀에서 훈련했지만, 결국 탈락했다. 아쉬움이 있을 것 같은데.

그 때는 나이도 있고 경험도 쌓이면서 노련한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골드컵을 통해 히딩크 감독과 문제가 생겼던 것 같다. 2002년 1월이었던 것 같은데, 당시에 경기에 내보내지를 않기에 면담 요청을 했었다. 그랬더니 굉장히 좋아하더라. 한국 선수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줄 알았는데, 면담 요청을 하니 고맙다는 말까지 했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게임을 뛰고 싶은데 왜 기용을 안해주느냐?"는 요지의 이야기였다. 그랬더니 히딩크 감독도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더라. 그래서 내 면담 요청이 효과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웃음)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다음 소집명단에서 나를 제외시켜버렸고, 이후에는 뽑히지 못했다. 히딩크 감독 스타일이 유럽 정서가 아니라 선수들이 자신의 말에 복종하는 것을 원하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다가 코엘류 감독 시절에 잠시 대표팀에 뽑혔고, 이후로는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 2003년까지 전남에서 많은 경기를 뛰며 여전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2004년에 갑작스럽게 출장 수가 5경기로 줄어들었는데.

시즌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전북전에서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 1년여에 걸쳐 재활을 해서 2005년에 다시 복귀했다. 사실 적지 않은 나이에 1년여간의 공백인지라 걱정을 많이 했을 거라고 이야기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만둔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누구보다 오래 축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사실 지금도 한양대 애들과 함께 뛰면서 충분히 할 만 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웃음)

그런데 재활에 성공한 뒤 2005년에 초반에 몇 경기 뛰었는데 은퇴하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다른 팀에서라도 뛰겠다는 생각이었기에 수원으로 이적하게 됐다.

- 결국 2005년 시즌 중반에 전남에서 수원으로 이적했다. 전남의 프랜차이즈 스타였기에 충격이 컸을 것 같은데.

나도 팀을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2002년에 3년 재계약을 했으니 2005년에 끝나는 것이었는데, 이후에 2년 정도 전남에서 더 뛰다가 은퇴할 계획이었다. 창단멤버로서 끝까지 뛴 다음에 은퇴하고, 그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는 것이 명예로운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팀의 생각은 달랐고, 마침 수원의 차범근 감독님이 원하셔서 이적하게 됐다.

인터뷰 중인 김도근 ⓒ스포탈코리아

Part.6 전남의 프랜차이즈 스타, 수원과 경남을 떠돌다. "전남은 그렇게 좋은 선수들이 많은 팀은 아니지만, 뭉치는 힘이 좋았다. 그런데 수원은 스타들이 많고, 환경에 좋아서 그런지 그런 면이 조금 약했다. 각자의 개성이 너무 강하다보니까 팀이 잘 돌아갈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기를 �x친다. 실력을 갖춘 선수들이니까...그런데 팀이 어려울 때는 팀웍으로 가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수원이 약했던 것 같다."

- 수원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전남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은데.

그 당시 수원의 사정은 최악이었다. 아마도 수원 창단 이래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어려운 타이밍에 새로 합류하다보니 팀도 성적이 좋지 않았고, 나 역시 힘들었다. 축구를 하다보면 어떻게 해도 안되는 그런 시점이 있는데, 수원으로서는 그 때가 바로 그 시점이었다. 선수들도 패배의식에 휩싸여 있었다. 팀이 어려울수록 뭉치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수원은 스타들이 많아서 그런지 그런 면에서 약했다.

그런 점에서는 전남과 비교되는데, 전남은 그렇게 좋은 선수들이 많은 팀은 아니지만, 뭉치는 힘이 좋았다. 그런데 수원은 스타들이 많고, 환경에 좋아서 그런지 그런 면이 조금 약했다. 각자의 개성이 너무 강하다보니까 팀이 잘 돌아갈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기를 �x친다. 실력을 갖춘 선수들이니까...그런데 팀이 어려울 때는 팀웍으로 가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수원이 약했던 것 같다.

- 아마도 수원 입장에서도 그런 측면에서 김도근 선수의 리더십을 기대했던 것 같은데.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팀에 합류한 선수가 적응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겠나. 전남은 내가 오래 있었으니까 후배들을 이끌면서 나아갈 수 있지만, 수원은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선수가 나이 많다고 뭐라 한다는 것이 애매했다.

- 그렇게 수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2006년에는 경남으로 팀을 옮겼다.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어려운 팀에서의 생활이었는데.

경남이 창단하면서 박항서 감독님께서 팀을 이끌어갈 수 있는 경험 많은 선수를 원하셨다. 그래서 창단 첫 해에 내가 주장을 하면서 경험 많은 선배로서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했다. 내 나름대로는 그런 측면에서 만족한다.

대학을 갓 졸업한 선수들, 실업에서 온 선수들...프로 경험이 없는 선수들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감독님이 원하셨고, 나 역시 그런 역할을 수행했다.

- 경남에서는 그야말로 전 포지션을 다 소화했다. 공격형 미드필더와 수비형 미드필더, 측면요원, 수비수까지...전성기 시절과 비교한다면 포지션 변화가 더 부담스러워졌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점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경기를 보는 눈은 좋아졌기 때문이다. 예전에 (김)주성이 형도 공격하다가 내려와서 수비를 봤지 않은가. 체력적으로도 문제가 없었고, 수비에서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오히려 복잡한 미드필드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보다 뒤에서 전체적인 것을 잡아주는 편이 더 여유 있고 재미있었다. 나이가 드니까 여기가 좋다, 저기는 싫다는 생각은 없어졌다. 다만 수비 위치가 더 편하다는 생각은 했다.

새로운 출발점에 선 김도근 ⓒ스포탈코리아

Part.7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접고, 지도자로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다.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데 그걸 못 따라오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게 되는데, 왜 아이들은 이게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현역에서 갓 은퇴한 선수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많이 힘들어한다고 하던데, 비슷하다. 아직 어리니까 그렇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다. 그것을 잘 다스리기 위해 지도자 교육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 이제 마무리를 해보자. 자신의 축구인생을 돌이켜볼 때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면.

축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98 프랑스 월드컵, 그리고 97년 브라질 초청경기에서의 골이다. 당시 브라질은 최강의 멤버였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담이 없는 경기였다. 다만 홈에서 많은 관중들 앞에서 하는 경기라 망신은 당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선전을 펼쳤다. 개인적으로 브라질을 상대로 골까지 기록한 잊지 못할 경기이다.

반면 기억하기 싫은 순간이 있다면 95년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나서지 못했을 때, 그리고 2004년에 아킬레스건이 끊어져서 1년여간 재활을 할 때였던 것 같다.

- 현역 시절에 가장 까다로웠던 팀이나 선수가 있었나?

모두 다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매스컴에서는 전남과 전북을 호남권 라이벌로 몰아가곤 했다. 그 당시에 우리가 전북보다 훨씬 좋았었기 때문에 라이벌로 몰아가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웃음) 그런데 하도 주위에서 그러다보니 이상하게 전북과 경기만 하면 말렸던 것 같다.(웃음)

- 특별히 호흡이 잘 맞았던 선수를 꼽는다면.

한창 좋을 때는 (김)태영이 형과 호흡이 잘 맞았다. 태영이 형이 왼쪽 윙백을 보고, 내가 왼쪽 측면 미드필더를 봤었는데, 서로 잘 맞았다. 눈빛만으로도 내가 어디로 뛸지 알았고, 내가 저 공간으로 움직이겠다고 생각하면 그 쪽으로 볼이 왔다. 전남에서도, 대표팀에서도 항상 같이 생활했기 때문에 호흡 면에서 최고였다. 또 (노)상래 형과도 호흡이 잘 맞았던 것 같다.

- 최근에 젊은 선수들이 많이 등장했다. 혹시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선수가 있는가?

FC 서울의 젊은 선수들 중에 좋은 재목이 많더라. 특히 이청용이나 기성용, 고명진 같은 선수들은 내가 이름을 외울 정도이니까 가능성이 큰 선수들이다. 작년에 열린 U-20 월드컵을 봤었는데, 거기 나왔던 선수들 중에도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 내 생각에도 그렇고, 주위에서도 이야기하는데 그 연령대에서 그 정도 하는 선수들이 당분간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이런 것은 있다. 서울이 젊고 유망한 선수들로 구성되었지만, 작년에 결국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물론 부상 선수가 많았던 탓도 있지만, 너무 젊은 선수들 위주로만 구성되었던 탓도 있다고 본다. 젊은 선수들은 패기도 좋고, 활동량도 많고, 기세를 타면 무섭다. 그렇지만 노련미가 떨어지기 때문에 페이스 조절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베테랑들과 적절히 섞여야만 팀 전체가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다. 서울이 을용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역할을 하는 선수가 몇 명 더 있어야 한다.

나와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를 꼽는다면 이청용을 꼽고 싶다. 물론 아직 나를 따라오지는 못하지만 말이다.(웃음) 이청용은 활동량도 풍부하고, 부지런하며, 감각도 좋다. 공간 활용 능력도 있고, 스피드도 갖췄다. 잘하니까 나와 비슷한 것 아니겠는가.(웃음)

솔직히 말하면 그 나이 때의 나보다 훨씬 낫다. 이제 20세가 됐는데, 벌써 프로 경험이 꽤 되지 않나. 대단하다. 그 나이에 그 정도 축구에 눈이 트였다면 정말 대단한 거다. 앞으로 좋은 선수가 될 것이다.

-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전성기 시절부터 잘생긴 얼굴로 인해 여성팬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웃음)

뭐 광양에서도 그렇고, 전남하면 '김도근'이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웃음) 그러나 당시 팬들은 지금처럼 열광적이고 그러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열혈팬들도 생겼는데, 특히 2002년 무렵은 최절정이었던 것 같다.

그 전에는 스타를 보고 싶어도 어떻게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창피해서 숙소에 찾아오지도 못했고...그런데 2002년을 계기로 팬들이 선물 보따리 하나씩 들고 훈련장이나 숙소를 찾곤 했다. (김)남일이의 경우에는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웃음) 훈련장 앞에 진을 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부분들이 개인적으로는 보기 좋았다. 남일이 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팬들이 모여들면서 자극을 많이 받았다. 보는 눈이 많아지니까 더 열심히 하려고 했고, 동기유발이 됐었다. 긍정적인 변화였다.

2002년 전에도 98년 무렵에 (이)동국이나 (고)종수, (안)정환이 등이 인기를 끌면서 열광적이었던 시절이 있긴 했다. 당시에도 그 녀석들의 인기가 워낙 좋아서 나는 조금 묻혔었다. 뭐, 그래도 꾸준히 인기는 있었던 것 같다.(웃음)

- 이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후회는 없는가?

물론 좀 더 선수로 뛰고 싶은 욕심은 있었다. 몸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렇지만 이렇게 된 이상 지도자로서 노력해야하지 않겠나. 어차피 지도자를 할 것이라면 지금 빨리 길을 나서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 한양대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데 그걸 못 따라오는 경우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게 되는데, 왜 아이들은 이게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현역에서 갓 은퇴한 선수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많이 힘들어한다고 하던데, 비슷하다. 아직 어리니까 그렇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다. 그것을 잘 다스리기 위해 지도자 교육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선수들의 의식도 바뀔 필요가 있다. 대학 선수들은 아마추어라 그런지 정신적인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한 마디로 프로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축구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한 의식이 없다. 이런 부분을 주입시켜도 하루 지나면 헤헤거리면서 다닌다. 참 답답하다. 제대로 된 프로 선수가 되려면 독기를 갖고 임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조금 부족하다.

같은 나이라도 이미 프로에 진출해 있는 어린 선수들을 보면 이런 프로의식을 갖췄는데 아쉽다. 그 선수들은 하지 말라고 해도 몸 관리를 알아서 할 아이들이다. 그런 면이 프로와 아마추어 선수들의 차이다.

대학 선수 정도 되면 성인이니까 이야기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데, 아직도 쫓아다니면서 관리를 해야 하니까 참 안타깝다.

- 지난 해 말에 AFC 지도자 2급 코스를 이수했다. 어떤 점을 배웠고, 어떤 점이 힘든가?

이론적으로 참 많이 배웠다. 현장이야 계속 해왔던 것이지만, 이론 공부는 많이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됐다. 이론적으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고, 오늘 훈련의 목적과 방법은 어떤 것인가하는 부분부터 영양학과 심리학, 의무적인 부분까지 배우면서 매우 유익했다.

문제는 여기서 배웠던 것을 팀에 가서도 계속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배운 것을 팀에 돌아가면 바쁘다고 덮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웃음) 준비된 지도자가 되려면 계속 노력해야 할 것 같다.

- 예전 선수 시절에 함께 했던 동료들을 이제 지도자로서 다시 만나는 시기이다. 느낌이 색다를 것 같은데.

재미있다. 예전에 대표팀에서 같이 뛰던 동료들, 리그에서 맞붙었던 선수들을 이렇게 만나니까 반갑다. (최)용수 형과는 저번 2급 지도자 코스에서 만났는데 옛날 웨스트햄 이야기도 하고, "형이 대표팀 감독하면 내가 수석코치 할께"라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웃음)

-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은가?

이렇게 말하면 옛날 지도자 분들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옛날 우리 지도자들과는 다른 형태의 지도자가 되고 싶다. 권위의식 없이 서로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지도자, 앉아서 리모콘 작동하듯이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뛰면서 현장에서 부딪치는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다.

-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가 있다면.

일단 AFC 1급 지도자 자격증을 빨리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은 1급까지 있어야 벤치에 앉을 수 있다. 지도자가 벤치에 앉아있는 것과 뒤에서 지켜보는 것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빨리 1급 코스를 이수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지도자들이 많이 밀려 있어서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하더라. 빨리 따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대표팀 감독을 해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것을 논할 단계는 아니다. 계속 열심히 하다보면 프로에서도 지도자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가깝게는 고교 감독이나 대학 감독을 해볼 기회도 있을 것이다. 아직 먼 미래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여기서 열심히 하다보면 기회가 생길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준비가 되어 있다면 기회는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열심히 하고 있다.

- 긴 인터뷰 감사하다. 선수 시절 못지않게 지도자로서도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인터뷰=이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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