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도전 나선 김도근, 전남의 전설이었던 만능 살림꾼①

2008. 1. 1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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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2000년 초반에 한국축구를 주름잡던 많은 스타들이 이제는 선수 유니폼을 벗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그 선수들의 전성기 시절을 함께 하며 환호했던 팬들의 입장에서는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소개할 김도근(36세, 한양대 코치) 역시 화려했던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고 작년부터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스타이다.

95년 한양대를 졸업하고 전남 드래곤즈의 창단 멤버로 입단한 김도근은 2005년 상반기까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남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했었다. 2000년 후반기와 2001년 상반기에는 걸쳐 1년 동안 일본 J리그 베르디 가와사키와 오사카 세레소에서 잠시 뛰기도 했다.

또한 98 프랑스 월드컵 출전을 비롯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국가대표 미드필더로도 맹활약을 펼쳤다. 특히 97년 8월 10일 잠실에서 열렸던 '세계최강' 브라질과의 맞대결에서 선제골을 뽑아내며 축구팬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각인된 바 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전남에서의 생활을 2005년에 마감한 그는 2005년 하반기에 수원으로 이적해 잠시 뛰었으며, 2006년에는 신생팀 경남으로 이적해 주장으로서 활약하며 베테랑의 힘을 보여줬다.

2006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김도근은 모교인 한양대에 코치로 부임하며 지도자로서의 길에 들어섰다. 얼마 전에는 AFC B급 지도자 코스를 이수하며 지도자의 길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

김도근은 K리그에서 통산 241경기에 출장해 34골-24도움을 뽑아내 '20-20 클럽'에 가입했으며, 98 프랑스 월드컵 참가를 비롯해 A매치 22회 출장에 1득점을 기록했다.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은퇴식조차 없이 유니폼을 벗은 김도근.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김도근의 축구 인생을 재조명해봤다.

- 2007년 초에 소리 소문 없이 현역에서 은퇴를 했다. 현재 근황부터 이야기해달라.

은퇴를 하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선수 생활을 더 하고 싶었는데, 지금 추세가 나이 먹은 선수들보다는 젊은 세대의 선수들로 가는 추세였다. 국내의 다른 팀으로 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고, 사실 다른 팀들도 원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괜히 데려와 봐야 짐만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중국 쪽을 알아봤다. 그런데 중국은 현지 에이전트나 감독에 대한 커미션 등 실력 외적으로 여러 가지 다른 부분들이 충족되어야만 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결국 불발됐고, 현재는 모교인 한양대에서 코치로 일하고 있다.

- 2006년에도 23게임에 출장했었다. 좀 더 뛸 수 있었던 나이인 만큼 아쉬움이 클 것 같다. 소속팀에서의 압박 같은 것도 있었나?

경남에서도 내가 고액연봉자였고, 도민구단이라 재정적으로 풍족한 상황이 아니었다. 언뜻 그런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구단 측에서 직접적으로 나가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먼저 나왔고, 외국 쪽으로 알아봤던 것이다.

사실 그 무렵에 전남에서 코치로 오라는 제의가 있었는데,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아직 지도자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선수로 더 뛰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러면서 중국에 갔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대학에서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는 것도 재미있다. 캠퍼스의 젊은 학생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웃음) 착실히 하다보면 또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전남은 나에게 있어서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 아닌가.

ⓒ스포탈코리아

Part.1 바르셀로나 올림픽, 그리고 93년 첫 대표팀 발탁 "프로 선배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몸 관리하는 것을 많이 배웠다.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는 다소 부족했는데, 선배들은 과연 달랐었다. 특히 정용환 선배님의 몸 관리는 최고였다. 술담배는 절대 안하시고, 쉬는 시간에도 어디 돌아다니지 않으시고 다음을 위한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더라. 역시 다르다는 것을 느꼈었다."

- 현역에서 은퇴를 했으니 이제 예전 이야기들을 한번 해보자. 1992년에 올림픽대표팀의 일원으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했었는데.

그 전에는 대표팀에 뽑힌 적이 없었고, 그 때 올림픽대표팀이 처음이었다. 그 때가 한양대 1학년이었는데, 최종엔트리에는 뽑혔지만 막상 본선에서 경기를 뛰지는 못했다. 당시 서정원, 노정윤, 신태용 등 좋은 형들이 많았다. 팀에서 제일 막내가 (이)운재였고, 나와 (곽)경근이가 그 다음이었다. 그래서 잔심부름 다하고, 물 들고 다니고 짐 들고 다니고 그랬다.(웃음)

3무로 탈락했는데, 모로코-파라과이-스웨덴과 한 조였다. 그 때 멤버들이 좋았기 때문에 조 예선 통과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세계축구에 대해 너무 몰랐던 것 같다. 벌써 16년인데, 지금이야 상대에 대해 비디오로 전력분석도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것이 없었다. 상대팀 전력에 대해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대회에 임했었다.

첫 경기 모로코와 1-1로 비겼고, 파라과이와 0-0, 스웨덴과 1-1로 비기면서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스웨덴과 1-1로 비겼던 것도 아쉽지만, 파라과이전이 가장 아까웠다. 당시 찬스가 굉장히 많았는데, 골을 넣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프로 선수들이 대부분인 지금과는 달리 당시 대부분이 대학생이었고, 경험부족이 컸다. 경기운영능력이나 실전경험 면에서 아무래도 프로 선수들이 아니다보니 한계가 있었다.

- 94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잠깐 대표팀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안다. 이 때가 첫 대표팀 발탁이었는데.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던 것이 93년경이었다. 김호 감독님 시절인데, 캐나다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뽑혀서 나갔었다. 이 때도 사실은 센터백으로 뽑혔던 것이다. 물론 훈련 과정에서 왼쪽 측면도 보는 등 여러 포지션을 다 봤다. 그 때 정용환 선배님과 같은 방을 썼는데, 정말 까마득한 대선배님이셔서 긴장했던 기억도 난다. 워낙 나이 차이가 나서 "삼촌"이라는 호칭으로 불렀었다.(웃음)

당시 대표팀에서 가장 어렸는데, 솔직히 부담도 됐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다 했었다.(웃음) (고)정운이 형이 조언도 많이 해주고 나한테 신경을 써주셨던 것 같다.

무엇보다 프로 선배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몸 관리하는 것을 많이 배웠다.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는 다소 부족했는데, 선배들은 과연 달랐었다. 특히 정용환 선배님의 몸 관리는 최고였다. 술담배는 절대 안하시고, 쉬는 시간에도 어디 돌아다니지 않으시고 다음을 위한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더라. 역시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전남의 창단멤버로 K리그에 입성한 김도근 ⓒ베스트일레븐

Part.2 전남 창단멤버로 K리그에 등장 "96년에 허정무 감독님이 전남에 오면서 왼쪽 측면 미드필더로 포지션 변경을 했다. 그러면서 10골을 넣었는데, 당시 미드필더 중에서 이렇게 득점을 올린 선수는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특히 아디다스컵에서는 중반기까지 득점 1위를 달리기도 했었다. 그 무렵 우리 팀의 전방에는 (김)봉길이 형과 (노)상래 형이 환상적인 호흡을 맞추고 있었고, 그 덕분에 나 역시 좀 더 쉽게 공격을 펼칠 수 있었다."

- 1995년에는 전남의 창단 멤버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전남 외에 다른 팀으로 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 같은데.

당시 한양대가 전지훈련을 가서 대우(현 부산)와 연습게임도 하고 그랬는데, 그 무렵 대우가 꼴찌였다. 그래서 드래프트에서 우선 순위였고, 나 역시 대우가 명문이고 하니까 갈 마음이 있었다. 대우에서도 나를 좋게 봤기 때문에 당연히 대우로 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그 해에 전남과 전북이 창단을 했다. 그러면서 우선 지명권을 3장씩 갖게 되었다.

당시 나는 4학년 때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1년 동안 뛰지도 못했는데, 전남에서 0순위로 데려갔다. 전체 1번이었다. 그 때 나는 전남으로, 그 다음으로 (김)도훈이 형이 전북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 처음 광양으로 가서 팀에 합류했을 때의 느낌은 어땠나? 아무래도 창단 팀이다 보니 힘든 점도 있었을 것 같다.

힘든 점이 많았다. 일단 광양에 내려갔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웃음) 높은 건물도 없었고, 문화공간도 전혀 없었다. 젊은 시절이라 생활하려고 하니 답답한 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축구만 할 수 있는 환경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프로에 처음 입단해서 한번 해보자는 각오가 강했기 때문에 오히려 나에게는 좋은 환경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 데뷔연도에 대한 기억은 어떠한가? 당시 10경기 출장에 공격 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했는데.

앞서 말했지만 대학 4학년 때 발목 부상을 당했었는데, 그 후유증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재활 프로그램이 체계적이지 않았다. 특히 대학 시절에는 수술한 뒤에 기브스하고 집에서 쉬는 것밖에 없었다. 재활을 해야 하는데 방법을 몰랐다. 프로에 들어가서도 구단에서의 몸 관리는 당시에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부상 후유증이 왔다.

개막전 후반에 들어가서 뛰었는데, 막상 뛰니까 뛸 수 있겠더라. 그 때 좋은 플레이를 보여줬고, 주위에서도 "역시 김도근~"이라는 소리가 나왔었다. 그런데 그 후로 아파서 못 뛰겠더라. 몸 밸런스가 맞지 않으니까 계속 발목이 아프면서 절뚝거리게 됐다.

결국 정병탁 감독님에게 재활을 해야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이반스포츠의 이영중 사장님의 추천으로 대구에 있는 스포츠센터에 가서 재활훈련을 했다. 수영하고, 여러 재활훈련을 하다보니 몸이 좋아졌다. 그러면서 다음 시즌에는 제대로된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

- 방금 말했듯이 2년차 시절이었던 96년에는 10골을 터트리며 공격적인 미드필더로 이름을 떨쳤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수비수, 그것도 센터백으로 많이 뛰었다. 대학 초기까지만 해도 공격수였는데, 수비수 중에 부상자가 생기면서 그 위치를 보다가 계속 뛰게 됐다. 92 올림픽대표팀에도 수비수로 뽑혔던 것이다.(웃음) 당시에는 지금처럼 센터백 2명이 서는 것이 아니라 센터백이 1명이고, 뒤에 (홍)명보 형처럼 프리맨을 하나 두는 스타일이었다.

95년까지 그렇게 하다가 96년에 허정무 감독님이 전남에 오시면서 왼쪽 측면 미드필더로 포지션 변경을 했다. 그러면서 10골을 넣었는데, 당시 미드필더 중에서 이렇게 득점을 올린 선수는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특히 아디다스컵에서는 중반기까지 득점 1위를 달리기도 했었다. 그 무렵 우리 팀의 전방에는 (김)봉길이 형과 (노)상래 형이 환상적인 호흡을 맞추고 있었고, 그 덕분에 나 역시 좀 더 쉽게 공격을 펼칠 수 있었다.

98 프랑스월드컵을 앞둔 한국 대표팀. 가운데줄 정중앙에 김도근의 모습이 보인다. ⓒ베스트일레븐

Part.3 대표팀 재발탁, 그리고 98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을 앞두고 분위기가 조금 살벌했다. 그래도 선수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월드컵까지 와서 감독님이 안 계신다고 경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생이 형이 머리게 피가 질질 흐르면서도 닥터에게 빨리 붕대로 감아달라고 외치는 장면을 보고 선수들 모두가 더 응집했던 것 같다. 우리 편이 머리가 터져서 피를 흘리면서도 뛰려고 하는데, 멀쩡한 내가 이러면 되겠냐는 그런 마음들이었다."

- K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97년에 다시 대표팀에 복귀했다.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 무렵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 93년에 잠시 대표팀에 뽑혔었지만 그 때는 경기를 뛰지 못했고, 이후 몇 년 동안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월드컵 예선부터 뽑히기 시작했다. A매치 데뷔전도 97년 대전에서 열렸던 월드컵 1차예선 홍콩전이었다. 월드컵 예선이 진행되는 과정에 차범근 감독님이 합류하라고 해서 광양에서 곧바로 대전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후반에 교체투입되었다.

-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당시 대표팀 사령탑이었던 차범근 감독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자신의 어떤 부분이 어필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가장 컸던 것은 97년 브라질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넣은 선제골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차 감독님이 팀을 맡은 상황에서 세계최강 브라질을 상대로 선제골을 넣은 선수에 대해서 어떻게 좋은 인상을 갖지 않겠는가.(웃음) 아마 그 때의 임팩트가 감독님께 굉장히 오래 남아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당시 내 몸 상태는 정말 최고였다. 미드필드에서 펄펄 날아다닐 때였고, 어느 포지션도 다 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니 감독님 입장에서는 뭘 해도 예쁘고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웃음)

- 98 프랑스 월드컵은 어떻게 보면 김도근 선수에게 있어 가장 빛났던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3경기 모두 출장했는데, 특히 멕시코와의 첫 경기를 위해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을 기억하는가?

그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경기장 분위기에 눌려서 사람이 멍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았다. 경기를 해보니 멕시코와 11:11로 맞붙어서 우리가 질 이유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가 힘으로 밀어붙이는 팀은 상당히 껄끄러워하지만, 기술로 축구를 하는 팀들과는 어떻게든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특히 멕시코는 체구도 작고 해서 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 상황에서 (하)석주 형이 프리킥으로 선제골까지 기록하니 '무조건 1승이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석주 형이 골을 넣자마자 퇴장을 당하면서 결국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두고두고 아쉬운 경기였다.

- 하석주 선수의 퇴장 이후 미드필드의 넓은 지역을 커버하면서 체력적인 부담도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뛰었다.(웃음) 당시 플레이메이커를 1명 넣는 시스템이었는데, 네덜란드와의 2차전에서도 고생했다. 네덜란드는 다비즈와 용크가 나란히 나왔는데, 나 혼자 그 2명을 상대하려고 하니까 정말 힘들었다. 수준 높은 선수들을 상대로 중앙에서 여기저기로 왔다갔다하면서 경기를 하려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 네덜란드와의 2차전은 정말 기억하기 싫은 순간이었을 것 같다. 정말 5골차의 실력차이가 있었는가?

솔직히 실력차이가 워낙 컸다. 처음에는 한번 해볼만 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제법 비슷하게 가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경기력에서 밀리기 시작하고, 1골을 내주면서 그 이후부터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김)병지 형도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말 역부족을 절감했다.

최근에 지도자 교육을 받아보면서 새삼 느끼는 것인데,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선수들은 유소년 시절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기본기가 몸에 배어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가 못했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이기는 축구만 강요받았다. 그러다보니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지금 지도자강습회를 받으면서 왜 우리가 그런 차이가 났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경기장에 입장했을 때부터 기가 눌린 것도 있었다. 당시 마르세이유에서 경기를 가졌는데, 경기장 안은 물론이고, 밖에도 온통 오렌지 물결이었다. 차를 타고 경기장으로 가는 길에 줄곧 오렌지 물결을 봤는데, 경기장에 들어가니까 거기도 온통 오렌지였다.(웃음) 당시 우리 선수들도 프로 경험이 많이 있었지만, 월드컵 무대는 또 다른 곳이었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선수라고 해도 웬만한 선수라면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홍)명보 형 같은 사람은 대단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역시 월드컵을 4번이나 나간 선수는 다른 것 같다.(웃음)

- 벨기에전을 앞두고는 결국 차범근 감독이 하차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벨기에와 비기면서 승점 1점을 따기도 했다.

사실 그런 부분 때문에 벨기에전을 앞두고 분위기가 조금 살벌했다. 그래도 선수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월드컵까지 와서 감독님이 안 계신다고 경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그런 일이 우리에게 자극이 되어서 더 죽을 힘을 다해 뛴 것도 있었다. 우리끼리라도 뭔가 한번 해보자라는 그런 것 말이다. 경기 중에 (이)임생이 형 머리에서 피가 나고, (김)태영이 형도 근육 경련이 일어나면서도 투혼을 발휘하면서 뛰었다. 일명 악으로 뛰었다고 해야 할까.(웃음)

임생이 형이 머리게 피가 질질 흐르면서도 닥터에게 빨리 붕대로 감아달라고 외치는 장면을 보고 선수들 모두가 더 응집했던 것 같다. 우리 편이 머리가 터져서 피를 흘리면서도 뛰려고 하는데, 멀쩡한 내가 이러면 되겠냐는 그런 마음들이었다.

이런 부분 때문인지 벨기에전은 우리가 더 많은 기회를 잡았고,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였다. 1-1로 비긴 것이 아쉬울 뿐이다.

-> 2편에 계속...

인터뷰=이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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