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텐더의 4강 신화 '함께 할 때 우린 두려울 게 없었다'

최창환 기자 2012. 12. 26.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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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013시즌 초반 복병들의 선전이 프로농구 흥행을 주도하고 있다. '모래알군단'이라는 오명에 시달린 서울 SK는 달라진 조직력으로 단독 선두를 질주 중이고, 시즌 개막 전 악재에 시달렸던 인천 전자랜드도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프로농구 역사를 통틀어 이들만큼 농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이들이 또 있었을까. 정확히 10년 전인 2002-2003시즌, 가난한 살림의 설움을 딛고 4강 신화를 달성한 코리아텐더다.

전신인 나산, 골드뱅크를 빼놓고 코리아텐더의 역사를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성의류업체 나산그룹은 이민형과 김상식이 주축이 된 기업은행 선수단을 인수, 신생구단으로 KBL에 발을 들였다. 원년시즌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돌풍을 일으켰지만, 행복한 나날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산의 모기업이 IMF 한파가 몰아친 1998년, 부도를 낸 것이다. 극심한 경기침체에 빠진 나산 기업은 몇몇 업체를 매각하며 근근이 농구단을 운영했다. 제 아무리 강도 높은 훈련을 극복해온 운동선수들도 동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97-1998시즌 초반의 상승세가 꺾인 나산은 결국 1경기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KBL에 진 빚을 상환하지 못해 연맹 회원 자격 박탈 위기에 놓인 나산은 1999년 인터넷 벤처기업 골드뱅크 커뮤니케이션즈에 매각돼 급한 불을 껐지만, 시련은 다시 농구단을 찾아왔다. 과거 나산처럼 재정난에 시달린 골드뱅크는 2001년 새로운 통신판매회사인 코리아텐더를 국내에 도입하며 주력사업으로 전환, 구단명을 코리아텐더로 바꾸며 농구단 운영 의지를 이어갔다. 연고지를 여수로 옮기며 재창단을 선언한 코리아텐더는 2001 신인 드래프트 전체 2순위로 고려대의 특급가드 전형수를 지명,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여기까지는 코리아텐더가 2002-2003시즌에 연주한 신화의 전주곡이다. 자, 이제부터 코리아텐더의 신화를 주도한 주역들을 만나 2003년의 향기로운 추억에 빠져보자.

카드값에 시달렸던 선수들

코리아텐더의 첫 시즌은 성공적이었다. 원년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의 주역 에릭 이버츠가 트레이드를 통해 돌아왔고, 정락영과 황진원은 부지런한 수비와 센스로 가드진을 이끌었다. 신인 전형수는 활력소 역할을 도맡았다. 비록 5라운드에 당한 6연패를 극복하지 못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지만, 차기 시즌에 대한 희망만큼은 확인할 수 있던 시즌이었다. 하지만 2001-2002시즌 종료와 동시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코리아텐더는 시민구단으로 전환해 여수에 뿌리내리려 했지만, 척박한 스포츠마케팅 시장은 그들에게 또 한 번 '돈'이라는 시련을 안겼다. 벌써 이번이 몇 번째인가. 꽤 많은 연봉을 받던 진효준 감독은 그렇게 팀을 떠나야했고, 이제 막 초보 딱지를 뗀 이상윤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겨우 팀을 이끌어나갔다. 모양새만 갖췄을 뿐 실속은 전혀 없는 구단이었다. "선수들은 연봉계약이었지만, 나는 정식계약을 하고 감독대행을 맡은 게 아니었다. 월봉을 받는 신세였다. 한마디로 파리 목숨이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내 역할이자 처지였다." 이상윤 감독의 말이다.

이상윤 감독은 사태 파악이 빨랐다. 선수단과 자신, 그리고 사무국까지 살아남기 위해선 인수기업이 나타나는 것 외에 방도가 없었다. 대기업에 코리아텐더를 어필하기 위해 필요한 건 단 하나. 바로 성적이었다. "선수들에게 매일 같이 얘기했다. '우리는 반드시 플레이오프를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농구를 못하게 되는 신세다'라고." 선수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구단 재정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후 무려 6개월 동안 급여를 못 받았으니 말 다했다. 연봉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게 무색했다. 엄연히 프로선수인데 단 1원의 수입 없이 운동하며 시즌을 준비했다. 김용식과 김기만, 변청운과 정락영은 카드값을 메우기 위해 각각 맞보증까지 서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지금에서야 에피소드라고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참으로 서럽고 서러운 일화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버스가 아닌 승합차를 타고 체육관, 웨이트 트레이닝장으로 이동해야 했고, 고기로 든든히 체력을 보충해야 할 선수들은 스팸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나마 여수에서 훈련을 할 땐 홈구장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숙소가 있는 수도권에선 운동을 할 전용체육관을 구하는 것조차 일이었다. 이상윤 감독대행이 대학팀에 연습경기를 부탁해야 겨우 체육관을 쓸 수 있었다. 월세 아파트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도 다행이라 여기며 버티고 또 버텼다.

정신력으로 2002-2003시즌을 준비하던 선수단에 패닉을 안겨준 일대사건이 일어났다. 2002년 10월 25일, 팀의 유일한 억대연봉선수인 전형수가 울산 모비스로 트레이드 된 것. 김정인을 반대급부로 데려왔다고 하지만, 사실상 현금 2억 5,000만원을 받기 위한 '선수 팔기'였다. 시즌 개막을 불과 하루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개막에 앞서 경희대와의 마지막 연습경기를 치르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던 도중 트레이드를 통보받은 전형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염없이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양 구단의 사무국끼리만 합의를 본 것이다. 나나 선수들 모두 일방적으로 통보 받았다. '지금 당장 (전)형수를 모비스로 보내'라고 하더라. 울면서 짐을 챙기던 형수가 나를 보며 한 마디 했다. '감독님, 저 가기 싫어요'라고. 우리 팀에 남으면 뻔히 고생할 걸 알면서도 말이다. 형제처럼 지내며 플레이오프에 반드시 오르자고 각오를 다진 동료들과 헤어지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이상윤 감독의 말이다. 기억이 떠오른 듯 김기만의 눈가도 어느새 촉촉해졌다. 그때 심정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었는지 그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전형수가 남긴 선물

코리아텐더는 전형수를 내주며 받은 2억 5,000만원으로 숨통이 트였다. 선수단에 밀린 급여를 적게나마 쥐어줄 수 있었다. 따뜻한 밥, 기타 구단 운영에 필요한 자금 모두 전형수가 남긴 선물로 해결했다. 무엇보다 큰 선물은 팀에 결속력을 안겨준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형수가 있을 경우 오히려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형수가 구단 사정 때문에 떠나면서 선수들은 똘똘 뭉칠 수 있었다. 부자구단의 지원을 받지 않더라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오기가 생겼다." 변청운의 말이다.

변청운의 말대로 기적이 일어났다. 해외전지훈련은 꿈조차 꾸지 못한 코리아텐더의 선전은 프로농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인천 SK 빅스와의 시즌 첫 경기에서 승리하며 시즌을 시작한 코리아텐더는 시즌 내내 5할 승률을 유지했다. 강팀을 연달아 격파한 2라운드 막판에는 무려 보름 동안 1위를 지키기도 했다. "재정상태가 안 좋아 상대를 분석하며 시즌을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훈련을 할 수 있다는 현실에 감사했을 뿐이다. 그랬기 때문에 시즌 초반 선두에 이름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선전이었다." 이상윤 감독의 말이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이상윤 감독대행은 확고한 신념을 갖고 팀을 꾸렸다. 스타플레이어가 없는 만큼 상대보다 한 발 더 뛰는 농구로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팀이 1번하고 마는 커트-인 또는 로테이션을 단 한 차례 공격에서 몇 번이고 시도했다. 상대가 먼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말이다. 수비 성향이 강한 선수들이 많아 조직력도 좋았다. 공격은 이버츠와 안드레 페리가 도맡으니 걱정할 일 없었다.

물론 시즌 중에도 위기는 몇 번이고 찾아왔다. 선수층이 얇아 체력에서 한계를 맛본 코리아텐더는 시즌 중반부터 중위권으로 추락했다. 실점도 시즌 초반에 비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여전히 급여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다보니 사무국 직원도 하나 둘 떠나갔다. 공격과 수비를 넘나들던 살림꾼 김기만은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아웃됐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또 돈이 선수를 괴롭혔다. 김기만의 수술을 진행한 일본병원은 인터폴에게 김기만에 대한 수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자신을 프로선수라고 밝힌 이가 몇 달째 병원비를 못 내고 있으니 말이다.

기적을 노래하다

언론은 어려운 여건 속에도 희망을 놓지 않은 코리아텐더를 두고 '헝그리 정신'이란 표현을 썼다. 그들의 정신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이는 선수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표현이 됐다. 변청운은 "비시즌 동안 열심히 준비하며 기량을 쌓은 게 '헝그리 정신'이란 표현에 묻히는 게 안타까웠다"라고 당시 선수단의 반응을 전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오기로 버텼다. 결국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28승 26패 정규리그 4위. 1997시즌 이후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달성한 플레이오프 진출이었다.

돌풍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6강에서 만난 '부자구단' 서울 삼성을 상대로도 코리아텐더의 선전은 계속됐다. 베스트5의 연봉을 모두 더해도 4억 3,100만원으로 '연봉킹'을 고수한 서장훈의 몸값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코리아텐더는 경기력으로 당당히 가치를 인정받았다. 홈에서 열린 1차전. 3점차로 뒤져 패색이 짙던 코리아텐더는 경기종료 52초 전 림을 가른 황진원의 3점슛을 앞세워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결국 코리아텐더는 이후 페리와 황진원의 연속득점으로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분위기가 완전히 살아났다. 4강에 오를 거란 직감이 들었다"란 이상윤 감독의 말처럼, 시리즈의 주인공은 코리아텐더였다. 적지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차전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코리아텐더는 폭발적인 3점슛으로 삼성을 잠재웠다. 3쿼터가 종료됐을 때 격차는 이미 30점차였다. 성공시킨 3점슛만 무려 14개에 달했다. "벤치에서 목발을 짚고 경기를 봤다. '이게 뭐지? 우리가 이래도 되나?'란 생각이 들었다. 삼성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경기였다." 김기만의 말이다.

그렇게 코리아텐더는 6강을 넘어 4강이라는 기적을 노래했다. 남들에겐 흔한 업적일 수 있지만, 시즌 개막 전 엄청난 위기에 처했던 코리아텐더로선 말로 설명할 수 없이 값진 결과였다. 비록 정규리그 우승팀 대구 동양과의 4강 플레이오프를 3전 전패로 마무리했지만, 그들은 박수 받기에 충분했다. 코리아텐더라는 이름으로 여수실내체육관에서 치른 마지막 경기인 4강 플레이오프 3차전에는 연고지 이전 후 최다인 4,250명이 몰렸다. 이들은 경기 종료 후 시즌 내내 뜨거운 감동을 안겨준 코리아텐더를 향해 기립박수를 보내줬다.

마법날개를 달다

목표 이상의 성과를 달성했다. 금방이라도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 안정적인 환경 속에 운동을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구단 매각 작업은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어려운 시기에 놓인 팀을 훌륭히 이끈 이상윤 감독의 가슴도 타들어갔다. 정식계약을 맺지 못한 상태라면, 대기업이 새 주인이 될 경우 비주류 출신(성균관대)인 자신의 거취가 불분명해질 게 뻔했다. 그래서 새로운 기업이 나타나도 자신까지 끌고 갈 수 있게 사무국을 찾아가 정식계약을 부탁했다. "1년만이라도 좋으니 새 기업이 나에 대해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시간을 달라"라고 말이다. 1번, 2번, 3번을 찾아가도 똑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그건 새로운 기업에서 해결할 일이다."

이미 두 팀으로부터 다년계약을 제시받은 차였던 이상윤 감독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낸 자식들과 헤어지는 건 싫었지만, 뚜렷한 대안이 서지 않았다. 결국 이상윤 감독대행은 3년 계약을 제시한 서울 SK로 떠났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극복했기에 좋은 환경에서도 함께 하고 싶었지만, 선수들도 감독의 선택을 존중해줬다. "어느 감독이었어도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팀을 떠나는 게 당연했다." 김기만이 운을 뗐다. 변청운 역시 "선수들 모두 감독님이 SK에서도 성공하시길 바랐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선수단의 운명만 남았다. 2003년 7월, "인수가 안 되는 최악의 경우가 발생하면 공개 드래프트를 통해 선수들이 갈 길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란 구단의 입장발표가 있을 정도로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어렵게 2003-2004시즌에 참가하게 된 2003년 11월,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국내 최대의 통신사 KTF가 부산으로 연고지를 이전한 코리아텐더를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것. 정식 명칭은 '부산 KTF 매직윙스'. 그야말로 코리아텐더의 신화를 이끈 영웅들 어깨에 마법의 날개가 달리는 순간이었다.

시즌 준비가 미흡했기에 2003-2004시즌까지 좋은 성적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KTF는 이후 세 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그간의 설움을 보상받았다. 2006-2007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결정전 진출까지 달성했고, KT 소닉붐으로 명칭을 변경한 이후에는 정규리그 최다승 기록을 새로 쓰며 우승트로피까지 들어올렸다. 하루아침에 농구를 포기할 뻔한 위기까지 몰렸던 코리아텐더의 영웅들. 그들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다.

제2의 코리아텐더 사태 막아야

KBL은 1997-1998시즌부터 줄곧 10개 구단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종종 자금난에 시달린 구단도 있었지만, 이들 모두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며 KBL이 현재까지도 10개 구단의 참가 속에 시즌을 치르는데 힘을 보탰다. 특히 재정상태가 최악의 상황까지 직면했던 코리아텐더의 선전이 없었다면, 현재 프로농구가 어떤 모양새로 치러질 지는 속단할 수 없을 것이다.

10개 구단 모두 비교적 탄탄한 자금력을 갖고 있는 모기업을 두고 있다. 그만큼 예전의 코리아텐더처럼 최악으로 치닫는 구단이 또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한다. 현실에 안주해선 안 된다. 제2의 코리아텐더는 없다?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질문이다. 10개 구단의 모기업이 안정적이라는 겉모습에 안심할 순 없다. 신세계가 과연 여자농구단 하나 끌고 가는 게 버거운 기업이어서 하루아침에 '신세계, 농구단 운영 접는다'란 보도자료를 배포한 걸까. 더군다나 2012년 농구계는 유독 많은 농구단이 해체설에 시달리며 홍역을 치렀다. 이규섭, 천대현 등 수많은 프로선수를 배출한 대경중은 이미 해체를 결정했고, 성균관대도 해체 직전의 위기까지 내몰렸다. 현재는 급한 불만 끈 상태일 뿐이다.

공교롭게도 변청운은 선수 시절에 이어 또 한 번 아픔을 겪었다. 대경중이 해체되기 전 마지막으로 선수들을 지도한 코치가 바로 변청운이다. 변청운은 "아마추어 농구 저변 확대를 쉬쉬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라며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변청운은 아마추어 농구부의 해체가 KBL, 더 나아가 한국농구의 경쟁력을 저해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거라 말한다. "아마추어 선수들이 프로에서 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프로선수가 되는 길이 너무나 좁고, 그로 인해 유망주들이 설 무대조차 사라지고 있다. KBL 차원에서 유망주들이 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줘야 한다. 그게 KBL의 흥행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이다." 김기만 역시 힘을 보탰다. "농구는 스포츠뉴스에서 단신 처리된 지 오래다. 류현진이 미국을 가느냐 못 가느냐라는 루머만으로도 크게 다뤄지는 야구와 너무도 비교되는 현실이다. 농구는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진지 오래다. 주말 경기시간을 앞당긴 것도 결국 배구의 눈치를 보다 단행한 일 아닌가."

2012-2013시즌, 적지 않은 구단이 농구단 예산을 예년에 비해 적게 편성했다. 그 중에는 지난 시즌 상당히 뛰어난 성적을 거둔 구단도 포함되어 있다. 좋은 성적을 올린 구단조차 농구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린다면, 그리고 이런 쳇바퀴가 계속된다면, 과연 '제2의 코리아텐더' 사태는 없을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농구인이 있을까. 곁에 있는 건 너무나 익숙하기에 떠나기 전에는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떠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는 법이다. 이제부터라도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게 한국 농구를 지키는 첫 번째 발걸음이다.

Side Story

이버츠-페리, 환상 혹은 환장의 콤비

에릭 이버츠와 안드레 페리. 코리아텐더가 4강 신화를 쓰는데 엄청난 역할을 한 외국선수들이다. 이버츠는 평균 24.9득점으로 팀 공격을 주도했고, 페리는 궂은일을 도맡았다. 이상윤 감독은 "외국선수 복이 따랐던 시즌"이라 이들을 회상했다. 2001-2002시즌을 코리아텐더에서 마친 이버츠는 사실 재계약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팀의 재정 상태를 훤히 알고 있기 때문에 자칫 연봉을 못 받을까 노심초사했던 것. 하지만 코리아텐더는 급여가 6개월씩 밀린 국내선수들과 달리 외국선수들에게만큼은 제 날짜에 꼬박꼬박 급여를 안겨줬다. 이버츠와 페리는 자신들에겐 어떻게 해서든 급여를 지급한 코리아텐더를 위해 이 악물고 뛰었다. 제 아무리 한 발 더 뛰는 농구로 무장한 코리아텐더라지만, 이들과 같이 뛰어난 기량을 갖춘 외국선수가 없었다면 4강 신화는 불가능했을 터.

코트에서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한 것과 달리 이버츠와 페리는 코트 밖에서 만나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으르렁'대기 바빴다. 점잖은 이버츠는 페리의 자유분방함을 싫어했다. 페리도 그런 이버츠가 눈에 거슬리긴 마찬가지. 한마디로 물과 기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코트에서만큼은 단 한 번의 마찰도 없었다. 플레이 스타일 역시 달랐기에 부딪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버츠는 장점인 공격에 충실했고, 페리는 리바운드에서 재능을 뽐냈다. 코트에선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환상의 콤비였던 것.

"이버츠는 점잖은 신사였던 반면, 페리는 지나치게 까부는 스타일이었다. 요새 표현으로 '돌+아이'라고 할까? 우리는 구단 사정이 열악해 매 경기마다 비행기가 아닌 버스로 이동했다. 그런데 페리는 이동할 때마다 의자가 아닌 버스 복도에 침낭을 깔고 자곤 했다. 이동하다 깜짝 놀란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김기만의 말이다. 이상윤 감독에 의하면, 이버츠와 페리는 코트 안팎에서 단 한 번도 하이-파이브를 나눈 적이 없다고. 이버츠와 페리는 환상의 콤비였을까, 환장의 콤비였을까.

Side Story

코리아텐더 영웅들의 근황은?정락영

SK에서 은퇴, 전력분석원을 거쳐 현재 개인사업 중이다. 변청운KCC와 동부를 거쳐 2010년 은퇴, 최근까지 코치로 대경중을 이끌었다. 김기만SK에서 은퇴, 2군 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김용식중국 심양성 남자 청소년 대표 코치를 맡고 있다. 장창곤2003년 은퇴, 미국 유학시절 포틀랜드의 객원코치를 맡았다. 현재는 상무 코치다. 최민규KT에서 은퇴, 유소년 농구교실을 운영하다 최근 KBL에 입사했다. 황진원삼성에서 여전히 경쟁력 있는 슈팅가드로 뛰고 있다. 김정인성남중 코치를 맡고 있다. 김진호동부에서 은퇴, 개인사업 중이다. 진경석LG를 거쳐 동부의 식스맨으로 활약 중이다. 박상욱은퇴 후 농구교실을 운영했다. 현재는 성남시 농구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손인보의정부에서 농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 사진 문복주 기자, KBL PHOTOS

저작권자 ⓒ 점프볼.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2-12-24 최창환 기자( doublec@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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