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복싱 신종훈 '태극마크 포기', 누구의 책임인가?

강청완 기자 입력 2015. 8. 25. 16:24 수정 2015. 8. 2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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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국가대표 이제 다시는 안 한다!"

● "이젠 피멍든 제 얼굴이 더 이상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 복싱 금메달리스트 신종훈이 24일 돌연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허겁지겁 마련된 기자회견이었다. 급하게 모인 기자들 앞에서 신종훈은 "오늘부터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복싱선수의 길을 접으려고 한다"며 "복싱국가대표 이제는 다시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이제 피멍 든 제 얼굴이 더 이상 자랑스럽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씌여 있었다. 한국 아마복싱의 최상위 랭커이자 내년 리우올림픽 기대주로 꼽혔던 신종훈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 'AG 금메달리스트' 신종훈,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사태의 발단은 지난해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종훈은 국제복싱협회(이하 AIBA)로부터 1년 6개월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AIBA와의 프로 계약 분쟁 때문이었다. AIBA는 전 세계 아마추어 복싱을 관장하는 최고 기구다. 프로에 WBC나 WBO가 있다면 아마추어에는 AIBA가 있는 식이다. (다만 AIBA는 'Only one'이라는 점이 다르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등 국제 아마추어 대회를 모두 총괄한다. AIBA는 프로복싱에 밀려 하락하는 올림픽 복싱을 살리겠다면서 지난 2012년부터 APB(AIBA Pro Boxing)를 추진해왔다. 탄탄한 선수층과 국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프로복싱을 하나 더 만들겠다는 취지였다. 전 세계 상위 랭커들과 잇따라 조인식을 가졌고 신종훈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신종훈도 지난해 5월 사인을 했다. 이게 화근이 됐다. 계약서에는 AIBA가 주관하는 APB 경기와 세계선수권대회, 올림픽, 아시안게임을 제외하고는 출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국내 아마추어 복싱 선수 대부분은 실업팀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간다. 주로 지방자치단체에 소속된 실업팀에서 전국체전을 비롯한 군소 국내대회에 출전하다가 4년에 한 번 오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메달에 도전하는 식이다. 하지만 계약서에 따르면 실업선수들의 연중 최대 이벤트인 전국체전에는 출전할 수 없다.

신종훈은 계약 이후 10월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라이트플라이급(49kg) 금메달을 따냈다. 그리고 11월 제주도에서 열린 전국체전에 출전했다. AIBA가 이를 문제삼고 나섰다. 11월 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APB 경기에 나서지 않고 전국체전에 나가 계약을 위반했다는 지적이었다. 계약서만 보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격정지 1년 6개월이면 리우올림픽에는 당연히 나갈 수 없다. 전국체전에도 못 나가면 소속팀과도 끝이다. 선수 생명에 위기가 닥쳤다.

● ' 선수생명 위기' 보도, 그 후

한국 아마복싱의 최대어인 신종훈이 선수생명을 잃게 생겼다는 최초 보도가 나오자 여론은 신종훈 쪽으로 쏠렸다. '일개 선수' 신종훈 대(對) 거대 조직 AIBA와 대한복싱협회라는 다윗과 골리앗의 구도였다. 종목에 따라 다르겠지만 특히 아마추어에서 선수 개인은 약자일 수밖에 없다. 언론도 우선 약자의 편에서 사태를 살피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강자 대 약자'라는 구도는 의외로 금세 선명성을 잃어갔다.

나오는 기사의 양이 줄어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용도 진전이 없었다. 처음 보도가 됐을 때 예상된 파장에 비해, 신종훈은 여론의 관심에서 빠르게 멀어져 갔다. 자칫 변명으로 비칠 수 있겠지만, 언론의 게으름이나 어떤 압력 때문은 분명 아니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책임을 묻기에는 사태가 굉장히 애매하고 복잡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 '다윗과 골리앗', 엇갈리는 주장

신종훈과 대한복싱협회의 엇갈리는 핵심 주장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중요한 관건은 계약 여부다. 지난 4월 한 차례 정식 계약이 무산되고 나서 5월 전지훈련지인 독일에서 다시 계약이 체결됐다. 신종훈은 이를 언제든 철회 가능한 임시 계약인줄 알았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협회와 AIBA 측은 정식 계약임을 충분히 본인이 숙지했다고 주장한다. 예전부터 진행되어 왔던 사안이기에 전지훈련 이전에도 국내에서 충분한 설명과 의사전달을 했다는 설명이다. (협회는 이후 한글로 된 계약서 번역본을 신종훈 측에 전달했다)

서로의 주장이 엇갈리고 이를 입증할 별다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단 다시 한 번 선수의 입장에서 상황을 들여다보는 게 나아 보인다. 외국 전지훈련 도중에 장문의 영문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설명도 충분하지 않았을 당시 상황은 크게 선수에게 유리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를 백번 감안하더라도, 신종훈이 계약에 최종 사인을 했다는 사실 자체는 남는다. 몰랐거나, 번복이 가능한 줄 알았다고 해서 책임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신종훈은 이후에도 계약을 계속 유지했고, 그로부터 5달이 지난 뒤에는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신종훈이 양보할 수 없는 이유…"먹고 사는 문제"

계약을 체결한 지난해 5월과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10월. 그리고 전국체전에 나간 11월, 이 대여섯 달의 공백에 대해서는 잠시 후 이야기하기로 하고 신종훈이 AIBA와의 계약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자. 신종훈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리우 올림픽에 대한 열망으로 어느 때보다 혹독하게 훈련했지만 최소한의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처우와 보수에 관한 문제다.

신종훈의 소속팀인 인천시청에 확인한 결과, 신종훈은 1년에 8천만 원 정도의 연봉을 받는다. 여기에 우수 선수 지원금과 각종 수당을 더 하면 1억 원까지 받을 수 있다. 종목을 불문하고 국내 아마추어 운동선수 가운데서는 최고 수준이다. 국가대표 명단에 오랫동안 이름을 올렸고 세계무대에서도 최상위급 랭커로 통하니 나름 타당한 대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APB 대회에 참가하면 대전료를 모두 합해도 1년에 8백만 원 정도를 받는다. 1억 원 대(對) 8백만 원은 비교하기조차 어렵다.

앞서도 말했지만 전국체전은 지자체 실업팀의 존재 이유나 마찬가지다. 전국체전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는 한참 됐지만 그래도 수많은 지자체들이 여전히 여기 목을 맨다. 전국체전에 뛸 수 없는 선수를 받아줄 실업팀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인천시청은 올해 신종훈과 재계약을 맺었지만 시합에 나가지 못하게 될 경우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문제가 불거지자 신종훈은 대한복싱협회 쪽에 소속팀을 대체할 만한 스폰서를 구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협회는 난색을 표했다. 선수 한 명을 위해 협회가 스폰서를 구해준 전례가 없거니와 발 벗고 뛴다 해도 나설 스폰서가 없다는 거였다. 실제로 그랬다. 그렇게 신종훈은 미아가 됐다.

● 신종훈은 과연 희생양인가?

이렇게 보자면 신종훈은 '선택조차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은 측면이 크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다시 신종훈의 '지난해 대여섯 달'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계약서에 최종 사인을 한 5월과 아시안게임에 나선 10월, 그리고 전국체전에 출전한 11월 사이의 일이다.

대한복싱협회 관계자는 그 사이 신종훈이 침묵한 이유가 '아시안게임'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신종훈은 인천아시안게임 이전까지 메이저 국제대회 우승 경험이 없었다. 다른 모든 엘리트 운동선수들의 고민인 '병역'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기대주에서 정상급 선수로 올라서기 위한 '우승' 경력도 필요했다. 이 모든 걸 한 방에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마침 안방에서 열리는 '인천아시안게임'이었다는 얘기다.

아시안게임은 AIBA의 영향력 아래 있는 대회다. 경기 운영은 조직위가 하지만 AIBA에서 경기위원과 심판진을 파견한다. AIBA의 역점사업인 APB에 소속된 선수라면, 어느 정도 후광을 업을 수 있다는 게 지도자들도 인정하는 복싱계의 공공연한 사실이다.

물론 신종훈은 어디까지나 실력으로 금메달을 쟁취했다. 자키로프와의 라이트플라이급 결승전에서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뒀다. 판정시비도 없었다. 후광 운운하는 것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계약 이후 5달이 지났고, 그것도 이후 계약서 한글본을 전달받은 상황을 감안할 때 선수도 이 같은 배경을 인지했을 것이라는 의혹은 충분히 제기할 만하다. 운동에만 전념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해명은 조금 부족하다.

신종훈의 대처에도 아쉬운 면이 있다. 파문이 확산된 이후 신종훈은 "힘 있는 분들이 도와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약자의 신분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겠지만 현명한 대처는 아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과 몇 달 전인 지난해 초 이용대가 도핑테스트 불응으로 인한 (연맹의 행정오류였다) 자격정지 논란을 빚었을 때,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무상 변호에 나서는 등 각계에서 '이용대 구하기'에 나섰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계약서에 사인한 뒤 6개월이 지나서야 "강요로 사인을 해 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건 법적으로 승산이 없었다.

어찌됐든 사태를 함께 풀어나가야 할 복싱협회와의 만남에서는 몰래 녹취를 시도하는 해프닝을 벌이다 서로 신뢰를 잃었다. 선수 어머니가 피켓을 들고 청와대 앞까지 찾아갔지만 번지수가 좋지 않았다. 여론과는 별개로 상식적인 해법을 찾았어야 했다.

그 실마리 가운데 하나가 지난달 있었던 AIBA의 '조건부 징계 해제' 제안이었다. AIBA는 지난달 22일 대한복싱협회를 통해 신종훈에 대한 1년 6개월 자격정지 징계를 해제하고 손해배상금 5만 달러를 5천 달러(약 570만 원)으로 경감하겠다고 제안했다. 다만 전국체전을 비롯해 국내 대회에 출전하면 안 된다는 조건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신종훈은 물러서지 않았다. 앞서 '먹고 사는 문제'를 고려하면 변한 게 없었으니 물론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매체와의 통화에서 "나의 입장을 따로 밝히는 자리를 준비하겠다"고 밝힌 게 다였다. 한 달이 지나서 마련된 그 자리가 국가대표 은퇴 기자회견이 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입장을 고수한 AIBA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선수 개인에 대한 거대 기구의 횡포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상대는 멀리 스위스에 본부를 둔 복싱 세계 최고기구다. 찾아가서 매달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더 현명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극단적으로는, 일단 제안을 받아들이고 리우올림픽에 출전하고 보는 방법도 있었다.

차라리 신종훈이 '억울한 일개 선수'의 입장을 일찌감치 버리고 상식적으로 접근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연봉 1억과 8백만 원'의 차이는 누가 봐도 명백하다. 실업팀 위주로 돌아가는 국내 아마복싱 특유의 구조도 있다. 이런 상식에 기대 호소하는 게 아니라 '복싱협회가 나를 버렸다'는 약자 프레임만 붙들고 있다가 금세 빛이 바랬다. 무엇보다 1억 연봉을 받는 아마추어 복싱 선수는 한국에 흔치 않다. 본인이 피해자라고 하더라도 다윗의 해법을 찾았어야 했다.

● 신종훈 사태, 상처만 남았다

어쨌든 한국 아마추어 복싱은 아까운 선수를 하나 잃었다. 선수 개인의 가슴에는 태극기를 들고 포효하던 그때의 얼굴보다 더 큰 피멍이 들었다. 복싱계 일각에서는 신종훈이 곧 프로로 전향할 거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사태가 이렇게 되기까지에 누구 하나만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결국 선수를 감싸야 할 복싱협회도 처음부터 끝까지 평행선을 달렸다.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정치력과 협상력의 부재 속에, 선수 보호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게 됐다.

한국 아마복싱이 침체일로에 들어선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선수들이 주목받는 것은 4년에 두 번,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딱 그 두 번이다. 악재는 없는 팬들마저 돌아서게 만든다. 거의 1년을 가까이 끌어온 신종훈 사태는 다시없을, 또 있어서는 안 될 악재가 됐다. 가뜩이나 좁고 어려운 한국 아마 복싱에 상처만이 남았다.

강청완 기자 blu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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