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취재파일] 황당한 피겨 심판, 더 황당한 빙상연맹

권종오 기자 2015. 6. 1.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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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피겨대회에서 상임심판들이 황당한 실수를 저질러 징계를 받았는데도 대한빙상경기연맹이 이를 상급기관인 대한체육회에 보고도 하지 않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또 징계 내용도 형평성을 상실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지난 3월11일부터 15일까지 인천 선학국제빙상경기장에서는 제57회 전국 남녀 피겨스케이팅 종별선수권대회가 열렸습니다. 초·중·고·대학·일반 등 국내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이 총 출동하는 최대 규모의 대회인데다 새로 지은 선학국제빙상경기장 개장 기념으로 열려 더욱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여자 싱글 경기에서 황당한 사건이 연거푸 발생했습니다. 심판 경력이 10년이 넘은 A씨가 Z선수의 연기가 시작하는 순간에 심판석에 있지 않았습니다. 조금 늦게 자기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Z선수의 연기가 끝나자 다른 심판인 B씨가 A씨에게 걸어와 종이를 건넸습니다. Z선수의 연기를 평가한 일종의 채점지였습니다. A씨가 Z선수의 초반 연기를 보지 못했다고 판단해 채점에 반영하라고 '동료애'(?)를 발휘한 것입니다.

A씨의 해명은 이렇습니다. "경기가 내 예상보다 빨리 시작돼 음악이 흐르는 순간 착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자리로 걸어오면서 Z선수의 연기 내용을 봤기 때문에 채점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B심판이 내가 앞부분 연기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해 호의로 채점지를 보여준 것 같다. 물론 나는 그 채점지를 전혀 참고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내가 제 시간에 착석하지 못한 잘못은 인정한다."

피겨 심판들을 총 관리해야할 레프리 C씨는 A씨가 착석했는지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경기를 진행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 사건과는 별도로 다른 심판 D씨는 시간에 쫓겨 어떤 선수의 예술점수를 실수로 3점이나 적게 입력했습니다. 피겨 종별선수권에서 잘못을 범한 총 4명의 심판에 대해 대한빙상경기연맹은 모두 징계를 내렸습니다. A씨에게는 1개 대회 출전정지, B씨에게는 경고, 레프리 C씨에게는 주의, D씨에게는 2개 대회 출전정지를 부과했습니다. 그런데 이 징계 내용을 놓고 빙상연맹 안팎에서는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심판이 지각하거나 컴퓨터에 점수를 잘못 집어넣는 것은 물론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실수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B심판처럼 자신의 채점지를 직접 들고 걸어가 다른 심판에게 보여주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행태입니다. 그런데 비교적 가벼운 실수를 저지른 심판들은 대회 출전정지를 받았고 채점지를 남에게 보여준 심판은 상대적으로 약한 경고에 그쳤습니다. 또 심판위원장 격인 레프리 C씨는 '주의'라는 가장 가벼운 '솜방망이' 징계만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 피겨 행정을 사실상 총괄하고 있는 사공경원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은 "상임이사회에서 징계 수위가 결정됐는데 대부분의 이사들이 이 사건의 원인 제공을 한 A씨의 책임이 B씨보다 더 크다고 판단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피겨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시큰둥합니다. 한마디로 군색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징계의 형평성 못지않게 큰 문제는 대한빙상경기연맹이 상급기관인 대한체육회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징계를 받은 A와 B씨는 모두 국제심판에다 상임심판으로 피겨계에서는 잘 알려진 베테랑 심판들입니다. 이들은 일당을 받는 다른 심판들과 달리 매달 고정 급여를 받는 상임심판입니다. <상임심판제도>는 부정비리 방지와 유능한 심판 육성을 위해 지난해부터 도입됐습니다.

대한체육회는 10개 종목 78명의 상임심판들에게 매달 300만 원 정도의 월급을 지급합니다. 이 돈은 대한민국 정부의 기금, 즉 국민 세금으로 충당되기 때문에 상임심판이 징계를 받을 경우 당연히 대한체육회와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한빙상경기연맹은 징계가 확정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대한체육회에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상임심판제도> 전담 부서인 대한체육회 경기운영부는 물론 최종 관리 감독 기관인 문체부도 제가 통화하기 전까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한체육회 김성철 사무차장은 "상임심판이 징계를 받거나 어떤 문제가 있을 경우 대한체육회에 보고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문체부 담당 관계자도 "정부의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인 만큼 각 경기연맹이 대한체육회에 보고해야 하고 또 대한체육회가 문체부에 알려야 하는 사안"이라고 밝혔습니다.

실수이건 고의이건 국내의 내로라하는 심판들이 큰 규모의 대회에서 연거푸 잘못을 저질러 징계를 받은 것은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국으로서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대한빙상경기연맹은 그 후속 조치에서도 낙제점을 면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빙상인들조차 납득하기 힘들만큼 징계 수위의 형평성 논란을 일으켰고 상임심판의 징계 사실을 상급기관에 보고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은 무엇이 잘못됐는지 깊이 성찰하기 바랍니다.권종오 기자 kj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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