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그때 그 선수'](1) 1986 멕시코 월드컵 최순호

최순호 |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2014. 6. 9. 06:0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르헨전 내 공을 박창선 형이 빼앗아 슛.. 그게 한국의 '월드컵 첫 골'

한국 축구는 1954년 스위스월드컵부터 2010년 남아공월드컵까지 월드컵 무대를 8번 밟았다. 스위스월드컵 출전 선수들은 연로하거나 세상을 떠났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 때 최순호를 시작으로 남아공월드컵 때 이영표까지, 한국이 최근 7회 연속 출전한 월드컵 현장과 뒷얘기를 당시 주요 출전 선수들의 육성으로 전한다.

최순호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지난 2일 한국의 역대 월드컵 유니폼이 전시된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 1층에서 1986년 멕시코월드컵을 회고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2번째 경기인 불가리아전에 나를 뺀 김정남 감독에게 부글부글세계 무대서 뛰어보니 한국축구는 동네축구였고 우물 안 개구리

당시 한국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 이후 무려 32년 만에 월드컵에 진출했다. 국민적인 기대감도 무척 컸다. 그래서 본선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1985년 월드컵 예선이 끝난 겨울에는 멕시코 현지 적응훈련도 갔다. 그리고 독일 등 유럽으로 전지훈련까지 다녀왔다. 독일에서 훈련할 때는 차범근 선배가 합류해 함께 훈련하기도 했다. 지금 못지않게 모든 걸 흉내내면서 준비해야 할 것은 거의 다 했다.

멕시코월드컵은 1986년 5월 말에 시작됐다. 대표팀은 한 달 전부터 월드컵에 대비한 해외 훈련에 돌입했다. 멕시코월드컵이 고지에서 치러지기 때문에 대표팀은 일찌감치 미국 콜로라도로 가서 훈련을 했다. 그곳도 고지였다. 이후에는 LA로 내려와 페루 등과 평가전도 치렀다. 당시 태릉선수촌 조리사 아주머니가 동행해 한국 음식을 만들어주셨다. 비행기 이동, 먹을 것 등은 별로 불편한 게 없었다.

LA에서 평가전을 치른 대표팀은 멕시코로 들어갔다. 나는 멕시코에서 훈련하면서 배앓이를 자주 했다. 먹을 것도 잘 먹고 소화도 잘 시키는데 이상하게 훈련만 끝나면 배가 아팠다. 나는 아프다는 말을 룸메이트 조영증 선배에게만 했을 뿐, 숄리라는 이름의 레버쿠젠 닥터나 김정남 감독 등 다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훈련이 끝나면 뜨거운 물을 팩에 담아서 배 위에 올려놓고 쉬는 게 전부였다. 그때는 '컨디션이 나쁜가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고지대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생긴 병이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훈련과 경기를 뛰는 그 순간에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는 점이다.

첫 경기는 아르헨티나전이었다. 우리는 전혀 떨지 않았다. 주눅이 드는 성격을 가진 선수들도 없었다. 그냥 한번 맞붙어보자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역시 아르헨티나는 강했다. 우리는 전반 초반 2골을 내주고 0-2으로 하프타임을 맞았다. 그때 우리는 "아씨, 한번 하자"고 외치며 서로를 격려했다.

후반전은 전반보다 잘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기력이 좋아졌다. 후반 초반 다시 실점해 0-3으로 끌려갔다. 그때 (박)창선이 형이 월드컵 첫 골을 넣었다. 내가 드리블한 것을 형이 빼앗아 슛을 했는데 그게 희한하게 뚝 떨어지면서 골이 됐다. 월드컵 첫 골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창선이 형이 내 길을 가로막으면서 볼을 빼앗은 것 같다. 동료가 드리블 돌파를 하면 비켜줬어야 했는데 말이다(웃음).

선수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1-3으로 패했으면 그렇게 크게 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우승했다. 우승 팀을 상대로 2골 차로 패한 것은 못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분위기는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패하면 무조건 죄인이 된 것 같았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축구 대표선수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유병옥·허정무·김종부·김주성·조병득·김용세·최순호·조영증·노수진·조민국·변병주·이태호·김삼수·박창선·박경훈·조광래·김평석·정종수·강득수·정용환.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여기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다음 상대는 불가리아였다. 상대적으로 해볼 만한 팀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경기를 뛰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왜 빠졌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김정남 감독님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신문 등을 통해서 보니까 최순호에게 충격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나를 뺀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무척 화가 났다. 겉으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 속으로는 정말 부글부글 끓었다. 그 경기가 내가 국가대표 선수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1초도 뛰지 못한 A매치였다. 내가 아르헨티나전에 부진했기 때문에 뺀 것 같은데 솔직히 아르헨티나전에 잘한 선수가 누가 있었나.

마지막 경기는 이탈리아전이었다. 선수들은 모두 끝까지 최선을 다 하자고 다짐했다. 김정남 감독님은 경기 전날 내게 이탈리아전 선발 출전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정말 열심히 뛰었다. 나는 0-1로 뒤진 후반 동점골을 넣었다. 그러나 2골을 내리 내줬고 1-3로 뒤졌다. 종료 직전 내가 머리로 어시스트를 해줬고 그걸 (허)정무 형이 슬라이딩 슈팅으로 골을 넣었다. 경기는 2-3으로 끝났다. 내가 1골·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게 어쩌면 불가리아전을 뛰지 못하면서 오기가 생겨서 더 악착같이 뛴 결과인지 모른다.

한국은 1무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우리는 4골이나 넣고 승점도 따냈기 때문에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당시 여론도 그랬다. 다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내가 불가리아전에 출전해 불가리아를 이겼다면 최종 결과가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불가리아를 꺾은 뒤 이탈리아전에서 무승부 이상만 거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때 한국이 처음으로 조별리그를 통과하는 역사가 쓰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당시 멤버들은 참 강했다. 멤버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그해 9월 서울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멕시코월드컵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외국 강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국제대회에서 2진급 이탈리아 국가대표, 브라질 프로팀과 싸우면서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경기는 비록 졌어도 선수들은 해볼 만하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월드컵 무대는 전혀 달랐다. 1골 차라도 그걸 극복하는 게 너무너무 힘든 게 월드컵이었다.

멕시코월드컵은 세계 최고 수준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경험한 대회였다. 나도 그렇고 대표팀도 그랬다. 한국 축구는 '동네 축구'였고 '우물 안 개구리'였다. 아시아에서 통한 기술이 월드컵에서는 안 통했다. 기술적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한국 축구의 미래는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축구교실을 연 것은 1991년 차범근 선배다. 두번째로 축구교실을 연 게 바로 나다. 1986년과 1990년 월드컵을 경험한 뒤 기술적으로 발전하려면 어린 선수들에게 기술을 제대로 가르쳐줘야 했다. 그게 내가 은퇴 후 1992년 충주에 축구교실을 연 계기가 됐다

멕시코월드컵 기간 중에는 개인적으로 아내에게 미안한 게 있다. 첫아들(최원영)의 출생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월드컵 조별리그를 모두 마친 뒤 귀국하는 길에서 대표팀은 LA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때가 6월13일이었는데 그날 큰아들이 태어났다. 당시 나는 출생신고는 최원영으로 했지만 집에서는 한동안 '최로마'라고 불렀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 가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 얘기가 당시 신문 기사에 크게 나오기도 했다.

< 최순호 | 대한축구협회 부회장(1986년 멕시코월드컵 국가대표) >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