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한국 야구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도깨비 섬 퀴라소

조회수 2017. 1. 2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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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야구장이지, 이건 뭐…. 형편 없는 동네 공터 수준이다. 눈 씻고 찾아봐도 잔디는 커녕 잡초뿐이다. 그나마도 듬성듬성, 어지럽기 그지 없다. 더더욱. 땅바닥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크고 작은 돌들 투성이다. 이런 데서 무슨 야구를…. 공이 도대체 어디로 튈 지 가늠이 안된다.

구장 바로 옆은 상어가 우글거리는 망망대해다. 거기서 불어오는 강한 바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척박함 따위는 아랑곳 없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하다. 열심히 땀 흘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실밥이 터진 공을 쫓고 있다. 손에 들린 것은 다 떨어진 글러브와 찌그러진 알루미늄 배트 뿐이다.

가쁜 숨소리, 바쁜 발걸음 속에 갑자기 한 명이 얼굴을 감싸며 쓰러졌다. 돌에 맞고 튀어오른 공이 그대로 입을 강타한 것이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놀란 아버지가 등에 업고 병원으로 옮겼다. 며칠 뒤 이 아이는 다시 돌아왔다. 바닥을 두리번거리더니, 그 때 빠졌던 이빨을 발견하곤 해맑게 웃는다.

잡초와 돌들이 어지러운 퀴라소의 야구장 모습.        유튜브 화면

몇 개월 뒤. 잡초밭 아이들은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펜실베이니아주 사우스 윌리암스포트에서 열리는 리틀리그 월드시리즈(LLWS)의 지역 대표로 뽑혔기 때문이다.

본선 무대에서도 그들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파죽지세, 연승 행진을 거듭했다. 결국 결승까지 단숨에 뛰어올랐다. 상대는 최강국 미국 캘리포니아 대표로 출전한 사우전드 옥스 팀. 하지만 적수는 아니었다. 초반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며 5-0으로 앞섰다. 아까 그 이빨 빠졌던 어린애가 혼자 북치고 장구쳤다. 타석에서는 2점 홈런, 마운드에서는 무실점으로 막았다. 결국 최종 스코어는 5-2. 잡초밭 아이들이 세계 최강의 자리에 우뚝 섰다.

대회를 중계방송한 ESPN은 우승을 차지한 멤버들 하나하나에 가장 좋아하는 선수를 물었다. 그러나 물어보나마나였다. 아이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똑같은 이름이 튀어나왔다. ‘앤드류 존스’였다. 

거제도만한 섬 대표팀이 세계 정상에 

2004년 리틀리그 월드시리즈는 여러모로 특별했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우승 팀의 출신 지역이었다. 사상 처음 월드 챔피언이 된 아이들은 이름도 생소한 퀴라소(Curacao)라는 곳이었다. 베네수엘라 북쪽 대서양 연안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섬나라다. 면적이 고작 440㎢에 불과하다. 제주도의 1/4 밖에 안되고, 거제도보다는 조금 큰 정도다.

인구로 따지면 더 빈약하다. 불과 15만명 정도다. 거제도(약 22만명)보다 훨씬 적다. 따지면 의왕시나 포천시와 비슷할 것이다.

이런 변방의 조그만 섬이 본선까지 올라갔다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그 지역(카리브해)에는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도미니카 공화국, 파나마 등 한다하는 야구 강국들을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우승까지 차지했으니…. 기적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2004년 리틀리그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할 당시 장면.  유튜브 화면

당시 이빨 빠진 아이가 유명한 주릭슨 프로파다. 그는 5년 뒤 텍사스 레인저스에 유격수로 입단했다. 16세에 불과했지만, 계약금을 155만 달러나 받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후 해마다 최고의 유망주로 꼽히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계속된 어깨 부상으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상태다. 다행히 2016시즌 후반부터 출장수를 늘리고 있다.

당시 퀴라소의 무서운 아이들 중에는 또 한 명의 메이저리거가 탄생한다. 2루수 조나단 스쿱이다. 프로파 보다 2살 많은 그 역시 17세 때(2008년) 볼티모어에 입단했다.

한편 2004년 대회는 프로파와 스쿱 외에도 여러 명의 빅리거를 탄생시켰다. 대만의 왕웨이린(밀워키) 파나마의 크리스티안 베탄코트(샌디에이고) 미국의 랜달 그리척(세인트루이스)과 마이클 콘포토(메츠) 등이 그들이다. 참고로 6명의 배출은 역대 리틀리그 월드시리즈 사상 가장 많은 숫자다. 

앤드류 존스를 보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다  

따져보면 그렇다. 인구 대비로만 보면 실로 대단하다. 미국에서 태어나 메이저리거가 될 확률은 50만명 중 한 명 꼴이다. ‘야구의 나라’로 불리는 도미니카 공화국도 12만 5천명 중에 한 명 꼴 밖에 안된다. 그런데 이 도깨비 같은 섬에서는 2만명에 한 명 꼴로 메이저리거가 나온다.

그렇다고 이들이 도미니카처럼 ‘야구 공화국’이냐? 아니다. 축구 인기도 야구 못지 않다. 그 잡초투성이 야구장이 겨울에는 축구장으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사우스햄튼 FC의 수비수 쿠코 마르티나가 이곳 출신이다.)

그런데 어떻게 뛰어난 야구 영재들이 계속 나타났을까.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우리의 박찬호 같은 슈퍼스타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모든 아이들이 입을 모아 합창했던 그 사람, 바로 앤드류 존스였다.

이웃 사촌이던 프로파(왼쪽)과 그레고리우스가 어릴 적 자신들이 뛰던 야구장을 찾았다.   유튜브 화면 

그는 퀴라소의 수도 블렘스타트 출신이다. 그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10년 연속 중견수 골드글러브(1998~2007년)를 차지하며 최고의 스타가 됐다. 그러자 작은 섬나라는 뜨거운 열풍에 휩싸였다. 아이들은 매일 밤 TV 앞에 모여 들었다.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다. 프로파, 스쿱, 켄리 잰슨(다저스) 안드렐톤 시몬스(애틀랜타), 디디 그레고리우스(양키스) 등이 그런 세대였다.

특이한 점은 이들의 포지션이다. 마무리인 켄리 잰슨(본래는 포수였다)을 제외하고는 내야수들이다. 그것도 확실한 수비력이 요구되는 유격수가 대부분이다. 아마 울퉁불퉁한 자갈밭에서 이빨을 바쳐가면서 얻어진 순발력 덕이라는 분석이 전혀 허튼 소리는 아닐 것 같다. 

네델란드 대표팀의 주력은 퀴라소 출신들 

네덜란드는 분명 떠오르는 야구 강국이다. 2011년 마지막으로 열렸던 야구 월드컵에서는 쿠바를 쓰러트리고 세계 정상에 섰다. 역대 WBC에서도 저력을 보였다. 2009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2번이나 침몰시켰다. 2013년에는 한국에 대만 참사를 안기며, 예선 탈락의 수모를 겪게 했다(자신들은 본선 4강까지 진출). 그리고 이번 WBC에도 한국과 같은 조에 편성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네덜란드 대표의 주력은 바로 퀴라소 출신들이다. 물론 아주 드물게 본토 출신도 있다. 삼성에서 뛰던 릭 밴덴헐크 같은 경우다. 또 미국 태생이지만 네델란드계인 밴헤켄 같은 분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작은 섬의 15만명 중에서 선발된 대표들이다. 현역 메이저리거가 6명이나 있고, 마이너리그 유망주들이 수두룩하다. 아시아 야구 홈런 신기록을 세운 블라디미르 발렌틴도 여기 출신이다. (보스턴의 잰더 보가츠는 퀴라소 옆에 있는 아루바섬 출생.) 

디디 그레고리우스(맨 왼쪽)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애들을 가르치고 있다. 5살 무렵이면 벌써 입문이다.  뉴욕타임스

아무리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다른 중남미 나라들도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퀴라소 어린이들은 성공 확률이 획기적으로 높다. 그 이유는 뭘까.

거기는 지금 ML 스카우트들이 바글바글하다. 30개 구단이 모두 사람을 보냈으니, 가뜩이나 좁은 섬이 왜 안그렇겠나. 그들이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원인이 있다. 바로 조기 교육이다. 퀴라소 아이들은 5살만 되면 글러브를 끼고 운동장으로 나간다. 심지어 3, 4살짜리들도 있다. 걸음마와 함께 야구부터 배운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걱정이 앞선다. 너무 어려서부터 오로지 야구에만 올인하는 것 아니냐고. 학교나 공부하고는 담 쌓고 지내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오해 마시라.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성공하는 진짜 이유는 높은 교육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적으로 얘기하면 ‘언어’다.

아시다시피 퀴라소는 네델란드의 자치령이다. 당연히 공식 언어는 네델란드어다. 원주민들 대다수는 파리아멘토어를 쓴다. 그런데 초등학교 5학년부터 스페인어와 영어를 필수 과목으로 배운다. (한국도 영어가 필수인데…). 덕분에 웬만한 사람들은 4~5개 국어가 거뜬하다.

야구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미국에 진출한 퀴라소 선수들은 아주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그러니까 영어와 스페인어가 주로 통용되는 메이저리그(혹은 마이너리그)에서 적응력이 뛰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박찬호나 추신수 같은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제발 영어 공부 열심히 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것도 절실하게 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리라.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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