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백수가 된 저스틴 터너, 재야의 은둔 고수를 만나다

조회수 2016. 12. 30. 16:5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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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이맘 때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소속 팀 뉴욕 메츠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하루 아침에 그는 백수가 됐다. 눈 앞이 까마득했다. 29세 생일을 막 지난 때였다. 이미 저물기 시작한 나이다. 희망이라는 단어조차 가물가물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본격적으로는) 3년을 버텼다. 하지만 딱히 보여준 건 없다. 수비도, 공격도, 그저 그랬다. 포장은 그럴듯 하다.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불렸다. 2루수, 3루수, 유격수, 때로는 외야수까지…. 닥치는대로, 시키는대로 땜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게 끝이었다. 구단들의 생각은 비슷하다. 같은 값이면 이제 파릇한 젊은 선수를 키우고 싶어한다. 30을 바라보는 후보에게 손 내밀 곳이 어디 있겠나. 한 두 군데서 오퍼가 왔지만 신통치 않았다. 간신히 일자리를 구한 게 LA 다저스였다. 초청 선수 신분으로 스프링캠프에 참가했다. 그야말로 ‘근근이’ 메이저리거의 신분이 유지됐다.

그런 그가 얼마전 계약서 한 장을 새로 썼다. 4년간 6,400만 달러짜리 엄청난 딜이었다. 불과 3년 사이에 인생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오갈 데조차 없던 저니맨이었다. 흔해 빠진 오른손 타자에 불과했다. 도대체 그 해(2013년) 겨울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나.

 집 근처 허름한 연습장을 찾다

 처음 프로 지명은 볼티모어에서 받았다. 그리고 뉴욕(메츠)으로 트레이드 됐다. 그러나 그의 고향은 캘리포니아다. LA 인근 롱비치에서 자랐다. 대학도 그쪽에서 다녔다. 나름대로 야구 명문인 CSU 플러튼 출신이다.(NC가 미국 전지훈련 중 이 팀과 연습경기에서 1승 1패했다.)

백수 시절 그가 살던 곳도 LA 근처다. 정확하게는 노스 할리우드였다. 그곳에서 마음을 추스렸다. 그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배트와 글러브를 잡았다. 몸 풀 장소를 물색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습장 하나를 찾았다. 차로 10분 거리의 챗스워드(Chatsworth)라는 도시였다.

작은 공장이나 사무실 같은 것들이 모여 있는 한적한 동네다. 그 중에 평범한 단층 건물이다. ‘The Ball Yard(볼 야드)’라는 이름이었다. 혹은 붙여서 ‘The Ballyard’라고 쓰고 당구장(Billiard)과 비슷한 발음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외견상 썩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언뜻 무슨 창고 같다. 제대로 된 간판도 안 보인다. 지나가다 봐서는 도저히 뭐 하는 곳인 지 분간도 어려울 정도다. 

구글 맵과 The Ballyard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있는 내부 사진들.

내부라고 딱히 소름 끼치게 나은 환경은 아니다. 바닥은 인조 잔디, 사방이 네트 투성이다. 조명도 좀 칙칙하다. 별다른 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허름한 실내 골프연습장 분위기다. 도대체 뭐 하는 곳일까? 정체가 의심스럽다.

이용 상담을 해 보면 수강료에 대한 안내가 나온다. 기본 30분에 60달러, 1시간은 100달러다. 웃기는 건 단서 조항이다. ‘미안하지만, 패키지나 할인 프로그램은 없습니다.’ 정찰제라는 얘기다.

이곳은 인근 학생들에게 야구와 소프트볼을 가르치는, 이를테면 보습학원 같은 곳이다. (미국도 대학에 가려면 방과후 활동이 중요하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진짜는 따로 있다. Professional Rates(프로 가격)로 분류했다. 여기는 구체적으로 얼마라는 금액이 적혀있지 않다. 자세한 것은 전화로 상담하라는 뜻이다. 마치 일식집 메뉴 같다. 다른 건 다 가격이 붙어 있는데, 킹 크랩은 늘 ‘싯가’로 적혀 있다. 그때 그때 다르다는 얘기다. 그리고 전화 번호 옆에 이름 하나가 적혀 있다. LATTA(래타)라는 특이한 성이다. 

메이저리거를 가르치는 동네 야구 코치 

놀라운 것은 터너가 메츠에서 쫓겨나던 시즌의 타율이다. 무려 2할 8푼이었다. 교체 멤버로, 더구나 내야수로서 결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중량감이었다. 3년간 홈런의 숫자가 고작 8개에 불과했다. OPS는 .690~.710 사이에 머물렀다.

자신도 이런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레그킥이었다. 한국이나 일본 타자들처럼 왼쪽 다리를 높이 들고 치는 방식 말이다. 하지만 늘 갈등에 시달렸다. 다리를 들면 멀리칠 수 있지만, 정확성이 떨어진다. 특히 빠른 볼에 반응하기 곤란하다. 스스로 확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락가락이 심했다. 다리를 높이 들었다, 낮게 들었다. 또는 레그킥을 쓰다, 말다를 반복했다. 

터너의 레그킥 장면. 미국 타자 중에는 이례적으로 높이 드는 편이다. 더그 래타 SNS 캡처.

 그걸 보고 있던 연습장 주인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점을 얘기했다.

그는 덕 래타(Doug Latta)라는 이름이었다. 자신이 예전에 고등학교에서 야구부 코치를 했다고 소개했다.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아무리 방출됐다지만 엄연히 현역이나 다름없는 메이저리그 선수다. 그런데 동네 연습장 주인이 그 스윙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일은 그 다음이다. 메이저리거는 잠자코 그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참, 배알도 없다. 형저메를 영어로 설명할 수만 있다면 동양의 큰 가르침을 줄 수 있으련만….

어쨌든 래타 원장은 진단을 내렸다. 무척 복잡하고, 이론적이고, 골치 아픈 얘기들이다. 그걸 간추려서 쉽게 요약하면 이렇다.

“레그킥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다리 높이는 더 들어도 좋다. 다만 지금보다 내딛는 거리를 줄여야 한다. 그래야 머리의 흔들림을 억제할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한 가지. 히팅 포인트를 조금 더 앞으로 잡아야 한다. 그러면 스윙에 파워를 실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른쪽 팔꿈치의 움직임을 수정해야 한다.”

래타가 다저스 구장을 찾아 터너와 함께 한 사진. 더그 래타 SNS 캡처. 

하루 종일 야구만 생각하는 환자들(?) 

백수 메이저리거의 (스윙) 리빌딩 작업이 어찌 하루 이틀에 이뤄졌겠는가. 그는 2월 캠프가 시작되기 전까지 거의 4개월 가까이 매일 연습장으로 출근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닭장(cageㆍ흔히 타격연습하는 그물망을 그렇게 부른다) 안에서 살았다.

그리고 2014년 애리조나 캠프가 시작될 무렵. 드디어 감이 왔다. 거리가 몰라보게 늘어났다. 빠른 볼에 대한 적응력도 개선됐다. 새로운 스윙으로 재무장에 성공한 것이다.

사실 터너를 래타에게 소개해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메츠 시절 동료였던 말론 버드다. 그는 도핑에 걸려 출장 금지 처분을 받았던 2012년 래타를 통해 스윙을 교정했다. 그리고 이듬해 성공적인 복귀 시즌을 치렀던 것이다.

터너와 버드, 그들을 가르친 선생 래타의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일주일 내내, 그리고 하루 종일, 다른 얘기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야구에 대한, 그것도 타격과 스윙에 대한 것만 열심히 떠들고 토론한다. 그래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딱딱하거나 지루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저스틴 터너)

터너는 얼마 전 자신들과 비슷한 중증 환자(?) 또 한 명을 발견했다. 한창 피가 끓을 나이(24세)인데, 오로지 관심은 야구 밖에 없는 녀석이었다. 당연히 래타에게 소개시키고, 자신들의 멤버로 가입시켰다. 그의 이름은 작 피더슨(다저스)이다.

저스틴 터너는 3년 전 겨울을 이렇게 회상한다. “처음으로 겪은 극심한 혼란기였다. 말할 것도 없이 내 인생 최악의 시기였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열정을 잃지 않도록 늘 지켜보고 있었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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