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4시간 40분..그러나 남은 것은 안익훈의 5초 뿐이다

조회수 2016. 10. 25. 09:4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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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가 끝났다. 하지만 승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11회 초. 드디어 원정 팀이 기회를 잡았다. 김성욱의 볼넷에 이어 박민우가 중전 안타를 쳤다. 1사 1, 2루.

홈 팀의 마무리 임정우는 다음 타자 이종욱에게 기가 막힌 스플리터를 던졌다. 헛스윙. 삼진으로 간신히 두번째 아웃 카운트를 만들어냈다. 한숨도 잠깐. 3번 나성범을 맞아야 했다. 아무리 타격감이 최악이라고 해도 상황이 상황 아닌가. 부담스럽기 그지 없다.

초구였다. 129㎞짜리 체인지업이었다.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 살짝 걸치며 들어왔다. 꽤 힘든 코스였지만 나성범이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언뜻 중심이 약간 빠지는 듯한 타격폼이었다. 그러나 배트와 공은 정확한 타이밍에서 만났다. 타구의 출발 속도는 엄청났다. 맞자마자 심상치 않은 기세로 우중간을 향해 날았다.

‘드디어 터졌구나.’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담장을 넘어가느냐, 못 넘어가느냐. 그것만 남았다. 확인을 위해 수 만 개의 시선이 타구를 쫓았다.

그 순간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백넘버 15번의 줄무늬 외야수가 달리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온 중견수였다. ‘딱’ 하는 순간부터 줄기차게 따라붙었다. 무려 5.4~5.5초간이나 전력 질주가 이어졌다. 직선 거리로 따져도 40미터는 족히 돼 보였다. 그리고는 담장 바로 앞에서, 점프하면서, 그것도 역동작(오른손 글러브)으로 공을 건졌다. 잠실 구장이 어마어마한 함성과 탄식으로 뒤덮였다.

1루를 돌아 2루까지 뛰던 나성범은 헬멧을 집어던졌다. 왜 아니겠나. 2타점을 강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승부를, 아니 시리즈 자체를 끝낼 수 있는 결정타였다. 그동안 부진을 한꺼번에 만회할 회심의 일타였다. 그런데 물거품이 됐다. 가뜩이나 안 풀리는데, 화낼만 하다. 헬멧 아니라 뭐라도 못 집어던지겠나.

투수 임정우의 반응은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딱’ 하는 순간 그의 시선을 보시라. 포수를 응시한 채 아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보지 못했다. 아마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온갖 불길한 상상을 머릿속에 그렸을 것이다.

결국 공이 중견수 글러브에 들어간 걸 확인한 순간 그대로 마운드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호수비에 보내는 그 흔한 박수, 찬사, 엄지조차 표현할 여유가 없었다.

1차전 악몽이 되살아났으리라. 2점을 지키지 못하고 역전패의 빌미를 제공한 자책이 또다시 엄습했으리라. 

임정우가 아웃되는 걸 확인한 순간. 머리를 감싸쥐고 마운드에서 주저앉는다.  Sky Sports 중계화면

 중견수 교체, 우주의 기운이 함께 한 양상문 

아마 그 순간 양상문 감독에게는 우주의 기운이 함께 한 것 같다. 무슨 촉이었을까.

11회가 시작되자 갑자기 수비 위치를 조정했다. 2번 자리에서 괜찮은 공격력을 보이던 이천웅을 뺐다. 문선재를 좌익수로 옮겼다. 그리고 비워진 중견수 자리는 20살짜리 풋내기에게 맡겼다.

“그 때 뭔가 경기의 흐름에 중요한 타구가 나올 것 같았다. 익훈이가 3이닝 정도 막아주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경기 후 양 감독이 밝힌 얘기다.

수비 강화의 대상이 내야였다면 일반적이다. 등락 편차가 심한 ‘오지배’를 포함한 내야를 바꾼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시국에 한가롭게 외야 수비 따위에 신경을 쓰다니….

하지만 양 감독의 신통력은 적중했다. 맞다. 그곳은 잠실이었다. 드넓은 외야 그라운드를 떠올려 보시라. 수비수들의 역량이 어느 곳보다 변별되는 구장이다.

막상 실전에 대입해도 그렇다. 2사 후 나성범의 타석이 되자 트윈스 벤치에서는 사인이 나온다. 중견수 위치를 조정한 것이다. 약간 앞으로 전진시켰다. 그리고 조금 좌익수 쪽으로 치우치게 이동시켰다. 이건 당연한 조치였다. 2루에 주자가 있으니, 짧은 안타 때는 홈 승부에 조금이라도 거리를 줄이려는 포석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성범의 타구는 위치 이동과 정반대로 향했다. 때문에 5m 이상은 더 달려야 했다. 그래서 그 ‘캐치’가 더 대단하다고 평가받아야 한다.

안익훈은 보통 보다 앞쪽에서 출발해 타구를 쫓았다. 반면 임정우는 공을 쳐다보지도 못한다.  SBS 중계화면 

‘더 캐치(The Catch)’는 모든 요소를 갖췄다.

① 탁월한 반사 신경이었다. 덕분에 타구음과 동시에 최적화된 첫 발 스타트를 만들어냈다.

② 정확한 낙구 지점을 예측했다. 타구의 출발 속도와 각도만으로 목표 지점을 파악해야 가능한 일이다. 타고난 감각에 상당한 훈련량이 보태졌을 것이다.

③ 끝까지 유지된 집중력이 돋보였다. 약 40m 이상의 장거리를 추적했다. 끝 부분에는 장애물(펜스)도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려운 백핸드 캐치를 흔들림 없이 완성시켰다.

④ 여기에 디저트까지 추가됐다. 미학적인 마무리다. 극적으로 포구에 성공했다. 그리고 펜스를 타고 ‘빙그르르’ 도는 퍼포먼스까지 선보였다. 기술 점수에 이어, 예술 점수까지 만점이었다.

끝까지 본 팬이 패자가 되는 가을 야구는 안된다

최고의 수비가 나왔다. 어느 리그에 내놔도 손색 없는 수준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화려한 무늬로 포장됐다. 그것도 가을 야구라는 최고의 축제 기간에 연출됐다.

그럼에도 이 승부는 형편 없는 낙제점을 받아야 한다. 갑갑함과 짜증, 실망투성이의 경기력 탓이다. 양쪽 합해 무려 25개의 4사구가 남발됐다. 안타, 실책을 포함해 38명의 주자가 나갔다. 이 중 살아서 돌아온 것은 3명 뿐이었다. 무수한 기회는 무능한 결정력을 확인하는 시간일 뿐이었다.

급기야 끝내기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기록상은 안타였다. 그러나 역시 깔끔한 맛은 없었다. 홈 팀 선수들의 물 뿌리기가 민망해 보일 지경이었다.

수준 이하의 갑갑한 경기력은 댓글러들의 창의력을 폭발시켰다. ‘역대급 덤앤더머 경기’ ‘암 검사나 받으러 가야겠다’ ‘(이 경기) 안 본 눈 삽니다’ ‘끝까지 본 내가 진정한 패자’ 등등.

어제(24일) 3차전의 MVP는 양석환이 선정됐다. 끝내기 안타의 주인공이니 당연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마저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차라리 안익훈이 받았으면 공감이라도 됐을 것이다. (나중에 양석환도, 양 감독도 ‘진짜 MVP는 안익훈’이라고 얘기했다.)

러닝 타임 4시간 40분짜리였다. 긴 시간 동안 양 팀 선수들, 벤치 모두가 무진 애를 썼다. 그렇지만 그걸로 팬들을 설득할 수 없다.

수십억원의 대우를 받는 프로가 뛰는 경기다. 더구나 10월의 경기는 이러면 안된다. 오늘 4차전부터는 진짜 MVP가 탄생해야 한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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