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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기자 MLB리포트] 전설의 목소리 빈 스컬리와의 이별

조회수 2016. 10. 1. 12: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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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이후 67년간 중단없이 다저스의 목소리로 팬들과 교감했던 스컬리씨 10월 3일 마지막 중계

그가 처음 야구 중계 마이크 앞에 앉았을 당시 미국의 휘발유 1갤런 가격은 27센트였습니다. 우표는 3센트였고 최저 임금은 75센트였습니다.

현재 휘발유 가격은 2달러를 넘겼고 우표는 47센트, 최저 임금은 주마다 차이가 있지만 연방정부 기준 시급 7달러25센트입니다. (그나마 휘발유와 우표는 가격이 인하된 것이 그렇습니다.) 대부분 물가가 10배를 넘나드는 인상폭을 보인 그 안에 담긴 세월은 무려 67년. 만 22세에 처음 브룩클린 다저스 경기를 중계했던 청년은 이제 고희(70세)와 팔순(80세)을 지나 미수(88세)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스컬리씨의 중계 모습. 1950년에 다저스 중계를 시작했습니다. 


한국 시간 오는 10월 3일 다저스 팬들은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됩니다.

1950년 이후 한 시즌도 쉬지 않고 다저스 경기를 중계했던 빈 스컬리(Vin Scully)씨가 마침내 그 중후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마이크를 놓게 됩니다.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리는 마지막 그의 중계는 오는 26일 경기입니다.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시즌 마지막 홈경기가 26일 열리며, 시즌 최종전은 10월 3일 스컬리 씨가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더 이상 걸맞을 수 없는 라이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대결입니다. 스컬리씨의 마지막 중계는 LA 지역은 물론 MLB.com을 통해 미국 전역에 울려 퍼질 예정입니다.

미국 야구의 위대한 한 장이 이제 막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스컬리 씨의 중계 커리어를 묘사할 방법은 아주 아주 아주 많습니다.

만 22세에 다저스 경기의 브로드캐스터로 데뷔했고 1953년 만 25세에 브룩클린 다저스가 양키즈에 패한 시리즈를 중계하며 최연소 월드시리즈 캐스터가 됐습니다. 이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았고 아마도 불멸의 기록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중계한 노히터가 21경기였고 그 중에 세 번은 퍼펙트게임이었습니다. 1956년 단 라슨(월드시리즈), 1965년 샌디 코팩스, 그리고 1991년 데니스 마르티네스의 퍼펙트게임이 그의 목소리를 통해 전 미국에 전달됐습니다. 14번의 올스타전과 함께 행크 애런의 베이브 루스 기록을 깨는 715홈런 경기, 밤비노의 저주가 이어진 1986년 월드시리즈 빌 버크너의 알까기 실책, 1998년 LA 다저스 커크 깁슨의 가장 극적인 월드시리즈 1차전 끝내기 홈런, 그리고 2001년 배리 본즈가 박찬호를 상대로 한 시즌 최다 71호 홈런을 쳤던 순간 등이 모두 스컬리 씨가 직접 중계한 경기였습니다.

그가 중계한 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우승만 6번입니다. 그러니까 1883년 창단된 이래 다저스가 최정상에 오른 6번의 모든 시리즈가 바로 그의 목소리를 통해 팬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볼까요?

1950년 그가 처음 다저스 중계를 시작한 해는 전설적인 코니 맥 감독의 마지막 시즌이었습니다. 1950시즌 후 필라델피아 에이스의 감독을 끝으로 은퇴한 코니 맥 감독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에 태어났습니다.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 당시인 1862년에 태어났던 맥 감독의 경기를 직접 중계했던 스컬리 씨였습니다.

스컬리 씨는 또한 프리처 로우 투수와 훌리오 유리아스 투수의 경기를 각각 중계했는데 두 투수의 나이 차이는 80세입니다. 1954년 다저스에서 은퇴한 로우는 1916년생, 다저스의 최고 유망주로 꼽히는 유리아스는 1996년생입니다. 두 선수의 선발 경기를 스컬리 씨는 모두 생중계했습니다.

다저스타디움의 기자실은 그의 이름을 딴 '빈 스컬리 프레스룸'입니다. ⓒ민기자닷컴


1927년 11월29일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태어난 빈센트 에드워드 스컬리는가난한 어린 시절로 우편물과 맥주 배달, 봉제공장 잡역, 펜실베이니아 호텔의 식당 청소 등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해군에서 2년 복무 후 뉴욕의 포덤 대학에 진학한 그는 교내 방송 캐스터이자 스포츠 기자로 일하며 미래를 구체적으로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학교 라디오 방송국에서 첫 풋볼 중계를 시작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미래가 바로 방송 부스라는 것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19세 때였습니다.

학교 사중창단의 멤버였을 정도로 풍성한 목소리를 지녔고 야구팀 중견수를 보기도 했던 그는 졸업장을 받은 후 미 동부 지역의 150개 방송국에 이력서를 보냈습니다. 그중에 딱 하나 워싱턴의 CBS 라디오 지부에서 답이 왔습니다. 갑자기 빈자리가 생겨 급히 직원을 구하던 참이었습니다.

입사 후 활기차게 일하는 그를 지켜본 당시 워싱턴 CBS 라디오 스포츠 국장이던 레드 바버는 그를 뉴욕 본사로 데려가 대학 풋볼의 중계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보스턴 펜웨이파크에서 벌어진 한 풋볼 경기의 중계에서 스컬리는 상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합니다. 한겨울에 열리는 풋볼 경기였지만 스컬리는 당연히 실내의 중계 부스를 생각하고 코트와 장갑을 호텔방에 두고 운동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중계석은 운동장 맨 꼭대기의 찬바람이 쌩쌩 부는 노천에 있었습니다. 스컬리는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고 뜨거운 열정으로 그 경기를 멋지게 중계하자 바버 국장의 신임이 두터워졌고, 평생 그를 이끌어준 멘토가 됐습니다.

1950년 바버가 브루클린 다저스의 라디오와 TV 중계를 맡으면서 스컬리도 대선배를 따라가 MLB의 다저스 스포츠캐스터 데뷔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53년 바버가 월드시리즈 중계 해설료 때문에 스폰서와 분쟁 끝에 스스로 물러나자 스컬리는 그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Fall Classic'의 중계를 맡게 됩니다. 바버는 다음 해 뉴욕 양키즈의 캐스터로 떠났고 스컬리가 다저스의 메인 캐스터가 됐습니다. 그렇게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며 차근차근 전설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만 22세이던 1950년에 브루클린 다저스의 라디오와 TV 중계를 시작한 그는 1958년 다저스가 연고를 LA로 옮길 때도 팀과 함께 미국 대륙의 동쪽 끝 뉴욕에서 서쪽 끝 LA으로 이주했고 계속해서 '다저스의 목소리'로 활약했습니다. LA로 옮긴 후 지역의 유명 캐스터를 투입하라는 압력도 있었지만 당시 월터 오말리 구단주는 오직 스컬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스컬리씨는 미국 프로스포츠 사상 최장기간 한 팀의 스포츠캐스터로 일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야구 명예의 전당과 라디오 명예의 전당 등에도 이미 오래 전에 입성했습니다. 캘리포니아 올해의 스포츠 캐스터를 28번이나 수상한 것을 비롯해 받은 상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또한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캐스터이자 그리고 역대 최고 스포츠캐스터 50명 중에서도 랭킹 1위는 그의 차지였습니다.

미국의 고전적인 스포츠 캐스터들은 요즘 야구 중계와 확실하게 차별화되는 점이 있습니다. 특히 스컬리처럼 오래 중계를 한 분들은 혼자서 경기를 진행합니다. 그러니까 캐스터와 해설자의 역할을 혼자서 동시에 해내는 것입니다. 물론 한 경기를 혼자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둘 혹은 때론 셋이 나눠서 하기도 하지만 스컬리씨는 은퇴를 앞둔 올 시즌까지도 자신이 맡은 이닝을 완전히 홀로 소화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4년 다저스타디움 중계석에서 팬들에게 연설을 하는 스컬리씨. @LAD SNS


그의 중계는 일단 이야기 거리가 너무도 풍성합니다.

선수들의 각종 기록은 기본이고 그 선수의 백그라운드라든지 과거사, 야구 역사, 심지어는 가족사와 사돈에 팔촌 이야기까지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론 너무 경기 외적인 내용이 많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부분 편안하고 즐겁게 들을 수 있는 야구와 사람 이야기가 끝없이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유머가 넘친다는 것도 스컬리의 강점입니다.

스컬리씨는 “선수들이 필드로 뛰어나가고 관중이 열광적인 성원을 보내기 시작하면 내 가슴 속의 무엇인가도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또 시작이라는 점에 가슴이 벅차온다.”라고 말합니다.

이번 주 내내 다저스타디움은 스컬리 축제가 이어집니다. 수 만개의 버블헤드 인형이 팬들에게 선물로 주어지고 24일에는 ‘빈 스컬리 감사의 날’ 행사도 진행됩니다.

최근 언론과 공동 전화 인터뷰에서 스컬리씨는 “67년이나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 신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다. 난 그저 그 오랜 세월을 도도히 내려온 흐름을 이어가는 그릇에 불과하다. 그저 내가 너무 오래 했기 때문에 모두들 칭송하고 있다고 여길 뿐 정말 내가 잘 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솔직히 (이 모든 행사 등이)좀 쑥스럽고 약간은 불편한 게 사실이다. 나는 전면에 나서서 끝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다저스-자이언츠 게임이 돼야지 빈 스컬리의 마지막 경기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저 내 마지막 임무를 마칠 뿐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대학 풋볼과 프로 풋볼 NFL, 프로 골프 등 다른 스포츠 캐스터로도 명성을 날렸던 스컬리 씨가 지금도 TV보다는 라디오를 선호한다는 것도 눈길을 끄는 부분입니다.

그는 “코팩스의 퍼펙트게임이 단적인 예다. 1965년 컵스를 상대로 퍼펙트를 달성한 그 경기는 TV 중계가 없었다. 라디오로 중계를 하면서 나는 그가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가락 동작, 유니폼 허벅지에 손을 문지르는 순간, 크게 숨을 들이키는 것 등까지 모두 세세히 묘사했다. 모든 것을 작은 부분까지 완전히 묘사하면서 드라마를 더욱 극적으로 전달했다. 2년 전 커쇼의 노히터도 중계했지만 그건 TV였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커쇼가 또 해냈습니다.’ 정도였다.”라며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다저스타디움을 매일 드나들던 시절, 대형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듯 한 스테레오 사운드 같은 목소리로 이 분이 기자실 식당에 들어섰다는 것을 대번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늘 친절하고 열정이 넘치던 그도 이제 그 찬란한 방송 커리어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가 아끼던 박찬호를 시작으로 최희섭, 서재응, 류현진 등 한국 선수와의 인연도 이어갔던 스컬리 씨는 국내 팬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분입니다. 특파원 시절 그와 함께 야구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 돌이켜보면 가슴 벅찬 기억이 돠고 있습니다.  

다음달 3일 라이벌 자이언츠와의 원정 경기 중계일은 빈 스컬리가 다저스 중계를 맡은 지 2만4274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 기사는 minkiza.com, ESPN.com, MLB.com, Wikipedia, USAToday.com, CBSSports.com, FOXSports.com 등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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