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2013년의 우에하라, 그리고 2016년의 오승환

조회수 2016. 8. 30. 12: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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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시즌이 끝났다. 빨간 양말은 누더기가 됐다. 70승도 못 넘겼다(69승 93패). 1965년 이후 최악의 승률이었다. 당연히 AL 동부 지구 바닥 청소는 그들 몫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감독이었다. 보비 발렌타인은 부임 초기부터 선수들과 부딪혔다. 걸핏하면 말싸움이었다. 케빈 유킬리스를 비롯해 베테랑들과 줄줄이 얼굴을 붉혔다. 항명 사태까지 일어났다. 처음에는 감독 편이던 구단 프런트도 결국 두 손을 들었다. 1년 만에 해임되고 말았다.

레드삭스는 이 기회다 싶었다. 선수단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었다. 고연봉, 저효율 선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드리안 곤잘레스, 칼 크로퍼드, 조시 베켓 등을 LA 다저스로 떠넘겼다.

매머드급에 가려진 채 B급 선수 한 명의 이동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듯한 표정의 자그마한 동양인 투수였다. 유독 백넘버 19번에 집착하는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한때 일본 최고였던, 그러나 나이 들어 미국에 와서는 별 볼일 없던 우에하라 고지였다(당시 38세).

볼티모어와 텍사스에서의 4년간은 그저 그랬다. 선발로는 탈락했고, 불펜으로 발령받고는 체면치레 정도였다. 그러나 부상이 잦았고, 들쭉날쭉 편차가 심했다. 결국 2012년을 마치고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했다. 나이 많은 약골의 선택은 하필이면 가장 추운 보스턴이었다(425만 달러).

처음부터 그를 마무리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조엘 핼라한, 앤드류 베일리가 연달아 부상으로 시즌 아웃 됐다. 더 이상 선택지는 없었다. 6월 말, 존 패럴 감독은 우에하라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포심의 스피드는 겨우 88~90마일에 불과했다. 빅리그에서 90마일도 못 던지는 클로저는 세르지오 로모(SF)와 우에하라 두 명뿐이다. 그는 여기에 현란한 스플리터를 앞세워 특급 클로저로 변신했다. 그 해 성적은 4승 1패 21세이브(13홀드), ERA 1.09였다.

오티스가 우에하라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작은 동양인 투수가 잘 던지는 게 신통했을 것이다. 

파이널 보스에게 일어난 데자뷰 

작년 겨울. 마카오의 작은 정킷방 하나가 실검 순위를 점령했다. 그러자 돌부처를 수호신으로 섬기던 한신 타이거스에서는 이례적인 발표가 이뤄졌다. 재계약 협상을 접겠다는 것이었다. 이유야 뻔했다. 그들이 도박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여긴 것은 폭력단과의 연계성이다. 한신은 그 부분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결국 대체 선수를 찾겠다고 했다. 일본의 다른 구단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반응은 훨씬 격렬했다. 아직 돌아가겠다는 말조차 없었는데, 징계부터 나왔다. 복귀하면 시즌 절반을 출장 정지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그가 갈 곳은 미국 밖에 없었다. 물론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일본 2년째 성적이 하락세라는 점도 걸렸다. 1+1 계약에 동의했다(최대 1100만 달러). 1년 써보고, 아니면 내년에는 버리겠다는 내용이었다.

마무리는커녕 셋업맨 조차 불확실했다. 초창기 출근시간은 5회, 6회였다. 그나마 이기는 경기도 아니었다. 대충 선발이 못 버티겠다 싶으면 나가야 했다. 그러더니 7회, 8회…. 점차 뒤로 가면서 배역에 무게가 실렸다. 이른바 필승조로 캐스팅 됐다.

급기야 트레버 로젠탈이 만세를 불렀다. 6월 말이었다. 매시니 감독의 선택은 필연적이었다. 양 손을 동그랗게 모았다. 불과 2개월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마무리 교체는 꽤 성공적이었다. 늘 불안하던 뒷문이 한결 편안해졌다. 가끔은 너무 일찍 인터폰을 들어서 문제이긴 하지만…. 뭐, 이해한다. 지금같이 급한 때는 조금씩 당겨 쓸 수도 있는 거지. 아무튼 10월에 하는 야구를 TV로 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백넘버 19번만 고집하는 우에하라의 인생 경기

 그는 19번만 고집한다. 팀을 옮겨도 늘 똑같은 번호다.

19살 때를 잊지 않으려는 뜻이다. (데려가는 대학이 없어서) 1년간 재수하며 낮에는 학원, 밤에는 공사판을 전전하던 시절이었다. 그 중에 도로 포장공사 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는 훗날의 고백이다.

그 19번 투수가 가장 빛나던 순간은 2013년이었다. 슬슬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9월 들어 37타자 연속 범타 처리로 구단 기록을 갈아치웠다. 9월 20일에는 8회 1사후에 나와 1.2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첫 20세이브와 팀의 AL 동부 우승 경기였다.

포스트시즌이 시작되면서 그는 더욱 찬란해졌다. 디비전 시리즈에서 끝내기 홈런(3차전)을 맞고 비틀했지만, 이내 제 정신을 차렸다. 특히 디트로이트와 ALCS는 그의 인생 경기였다. 시리즈 5게임에 등판해 6이닝 9K 무실점. 세이브 3개를 따내며 MVP가 됐다.

AL 우승이 결정된 순간 환호하는 모습. 시리즈 MVP까지 올랐다. 당시 중계 화면

마지막 승리 순간 그라운드는 난리가 났다. 샴페인이 터지고, 진한 포옹과 하이 파이브가 작렬했다. Fox TV가 장내 인터뷰에서 “지금 기분을 말해달라”고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토할 것 같아요.” 펜웨이 파크가 떠나갈 듯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월드시리즈에서도 완벽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4, 5차전 세이브. 그리고 6차전 6-1에서 우승 확정 투수로 등판했다. 팀의 리더 데이빗 오티스가 그를 어린아이처럼 어깨에 둘러멨다. (상대팀은 공교롭게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다.) 

강력한 가을 DNA와 ‘꿈’

파이널 보스에게도 그렇다. 가을은 특별한 계절이다. 인상적인 기억이 수두룩하다.

삼성 시절에는 팀을 5번이나 정상에 올려놨다. 그 중 2번은 자신이 한국시리즈 MVP에 뽑혔다.

일본에서도 그랬다. 한신 첫 해였다(2014년). 리그 우승이 걸린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숙적 요미우리와 일전을 벌였다. 정규시즌 2위팀 한신이 핸디캡으로 1패를 안고 시작한 경기였다. 여기서 끝판왕은 시리즈 6게임에 내리 등판했다. 모두 적지인 도쿄돔이었다. 그리고 역사에 남을 승리를 거뒀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도가 생긴 뒤 처음 나온 리버스 스윕이었다. (일본시리즈에서는 이대호의 팀 소프트뱅크에 패배.)

NL 와일드카드 경쟁이 치열하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 혼전의 중심에는 카디널스도 포함됐다. 그러나 기대가 크다. 워낙 강력한 가을 DNA를 가진 팀 아닌가.

일본의 한 방송사는 2013년 포스트시즌 동안 우에하라를 밀착, 동행 취재했다. 그들의 카메라는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이 결정된 뒤, 숙소로 돌아와서 완전히 탈진한 그는 얼굴을 클로즈업 했다. 한동안 ‘멍’ 하던 우에하라가 나지막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유메(夢ㆍ꿈)”였다. 꿈을 이뤘다는 뜻이리라.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에서도 고전(Classic)에 참여한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그리고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꿈이다.

우에하라의 2013년처럼, 오승환의 2016년 가을도 찬란하게 빛났으면 좋겠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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