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백종인의 야구는 구라다] 꼼수, 갑질, 한일전..7시를 기다리며

조회수 2015. 11. 19. 09:19 수정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늘 그랬다. 조용한 한일전은 없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언젠가는 한낱 야구 선수의 '30년…' 운운하는 한 마디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진 적도 있었다. 나중에 번역이 잘못 됐느니, 어쩌니 했지만 당시는 흡사 전쟁이라도 치를 분위기였다.

맞다. 이건 그냥 게임이 아니다. 국가대항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이고, 치열한 매치업이다.

기발한 댓글 하나가 가슴에 와닿는다. "한일전은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된다." 맞다. 오늘 저녁 7시, 모든 걸 건다. 설욕, 복수, 대첩. 팬들은 그런 단어를 원한다.

사인 훔치기라니

미디어도 마찬가지다. 흡사 종군기자 같은 분위기다. 평범한 기사와 뉴스가 아니다. 그 속에 칼과 창과 도끼가 날아다닌다. 원색적이고, 신랄한 비판과 비난이 쏟아진다. 알려진 것은 거의 대부분 우리 쪽의 공세다.

그런데 반대 색깔의 묘한 보도가 있었다. 선발 등판할 오타니 쇼헤이와 관련된 기사였다. 그가 상대방의 '사인 훔치기'에도 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출처는 일본 <스포츠닛폰>이었다. 한국에서는 <스포츠조선>과 <osen>이 번역해 기사화했다.

대강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도쿄돔은 벤치와 투포수의 거리가 아주 가깝다. 그래서 한국이 오타니의 투구에 대해 사인 훔치기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 배터리는 여기까지 대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오타니 본인이 기자의 질문에 대답한 부분도 있다. "한국만 사인을 훔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것이 야구다."

언뜻 치밀함과 관대함이 동시에 상상되는 모습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심각한 '무례(無禮)'를 포함한 내용이다.

아무리 야구라는 경기에서 사인 훔치기가 낯선 일이 아니라 해도, 드러내놓고 떳떳한 건 아니다. 더구나 자칭 세계규모라고 꾸며진 국가대항전이다. 그런 무대에서 상대 팀이 그럴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그런 얘기를 기자들에게 공공연하게 떠들고, 미디어는 그걸 거리낌 없이 유통시킨다는 게 참 어이없는 일이다.

보도한 매체는 일본 스포츠 신문 중에도 정상을 다투는 유력지다. 그런 곳이 직설적으로 '사인 훔치기'에 대해 다룬다는 것은 일반적인 표현법을 한참 지나쳤다. 또 거기에 대응해 멘트를 남긴 선수의 수준에도 의심이 간다. 아마도 그들 역시 여러가지 점에서 과민해진 것 같다.

꼼수는 정수로 받는다

대회 기간 내내 부정적인 키워드 투성이였다. (막무가내) 오심, (혼란스러운) 일정, (수준 이하) 대회 운영…. 그 중에서도 주최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꼼수'와 '갑질'이 우리 팬들의 울화를 폭파시켰다. "난생 처음 새벽 4시에 이동했다"는 고참 선수의 넋두리에 미간이 찌푸려진다. "일반석 자리가 비좁아 악몽 같은 비행시간이었다"는 대표팀 막내가 짠하기 그지 없다. 부스스한 얼굴에, 퀭한 눈으로, 일전을 준비해야 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다. 오늘 저녁 7시가 되면 모든 상황은 달라진다. 그 어떤 키워드도 남지 않는다. 오로지 전광판에 기록될 2개의 숫자(스코어) 뿐이다. 무슨 단어도 그걸 넘지 못한다. 그건 스포츠가 가진 숙명이다. 냉정하고, 침착해야 한다. 꼼수에 대한 분노? 갑질에 대한 울화? 승부에 방해되는 건 모두 버려야 한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플레이만이 필요할 뿐이다.

바둑이 스포츠의 카테고리로 분류된 지는 꽤 오래 전이다. 거기도 치열한 승패가 존재한다. '목숨을 걸고 둔다'는 표현도 한다. 그럼에도 큰 대국을 앞둔 고수들이 자주 하는 멋진 말이 있다. "좋은 기보를 남기기 위해 노력하겠다." 우리 대표팀도 그랬으면 한다. 오늘 밤 도쿄돔에서 팬들의 기억에 두고두고 새겨질 좋은 승부를 남겼으면 좋겠다.

드라마로 제작된 걸작 <미생>의 제6국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원 인터내셔널의 사람 좋은 박 대리와 거래처의 갈등이 불거졌다. 상대편 사장과 임원들의 꼼수가 등장하고, 심약한 박 대리가 난처해진다.

그 때 박 대리를 돕던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 장그래는 나직이, 그러나 아주 단호한 말투로 이렇게 읊조린다.

"꼼수는, 정수(正手)로 받습니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외부필자의 칼럼은 Daum스포츠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