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영의 마니아썰]'골프 수험생'에게 보내는 편지

김세영 기자 입력 2015. 11. 18. 12:24 수정 2015. 11. 18.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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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드전은 보통 퀄리파잉스쿨로 불린다. 줄여서 흔히 'Q스쿨'이라고 한다. 선수들은 '지옥의 레이스'로 표현한다. "두 번 이상 가기 싫다"는 그 무대가 올해도 다시 열리고 있다. 사진편집=유광준 기자

학창 시절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시험의 중압감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엔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는 어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긴 겨울 방학이 기다리고 있고, 한 동안 시험에서 해방된다는 이유로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친 날의 기쁨은 더욱 기뻤다. 고3 시절 대입 학력고사를 마친 후 터벅터벅 걸어 나올 때 내리던 하얀 눈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남녀프로골프 투어가 올 시즌 투어 일정을 모두 마쳤다. 여자 골프에서는 전인지가 최고의 '골프 퀸'으로 등극했고, 박성현과 이정민 등도 스타로 떠올랐다. 남자 골프에서는 '루키' 이수민이 주목을 받은 가운데 장타자 김대현과 김태훈이 모처럼 우승하며 '거포의 귀환'을 알렸다.

양(陽)이 있으면 음(陰)이 있게 마련이다. 스타들이 시즌을 마친 뒤 이벤트 대회에 출전하거나 각종 행사에 다니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과 달리 '생존의 테스트'를 거쳐야 하는 선수들도 있다. 성적 부진으로 투어 카드를 잃어 시드전(퀄리파잉 토너먼트)을 치러야 하는 하위 랭커들이다.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는 모두 시즌 상금순위 60위 이내 선수에게 이듬해 시드권을 유지해 준다. KLPGA 투어는 지난해까지는 상금 상위 50명에게 이듬해 시드를 줬으나 올해부터 대회 당 필드 사이즈(출전 선수)가 늘어나면서 60위까지 확대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시드전으로 내몰린다고 보면 된다.

시드전은 일종의 '골프 수능'이다. 선수들은 '지옥의 레이스'라 부른다. 한 번 시드전을 경험한 이들은 "다시는 가기 싫은 곳"이라며 혀를 내두른다. 막판 ADT캡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오지현은 "우승도 기쁘지만 시드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 더욱 기쁘다"고 했다.

선수들이 이토록 시드전을 싫어하는 이유는 한 번 낙방하면 2부 투어에서 1년을 버텨야 한다는 중압감이 크기 때문이다. 스폰서가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큰 것은 물론 아예 선수 생명이 끝나는 경우도 있다. 강욱순은 과거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퀄리파잉스쿨에 도전했다 마지막 홀에서 30cm 거리의 퍼트를 놓쳐 낙방한 이후 한동안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또한 예선전을 면제 받은 경우가 아니라면 여자의 경우에는 108홀, 남자의 경우에는 최대 144홀의 장기전을 벌이는 것도 선수들을 옥죄는 요인이다.

여기에 매년 정규 투어가 끝난 후 열리는 까닭에 날씨마저 춥다. 여자는 전통적으로 전남 무안, 남자는 전북 군산 골프장에서 시드전을 개최한다. 모두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바람이 거세다. 지난해 남자 시드전 최종전 때는 눈까지 내렸다. 엄연한 시험장이기에 갤러리 출입도 금지된다. 무거운 침묵만 흐르는 가운데 간간히 클럽 헤드에 부딪히는 볼 소리만 있을 뿐이다. 버디를 잡아도 기뻐할 수 없어 표정만으로는 버디를 잡았는지 보기를 했는지 알 수 없다.

KLPGA 시드전의 경우 올해 예선에는 약 340명이 참가했고, 본선에서는 144명이 경합을 벌인다. KPGA 투어의 경우에는 올해부터 레이스가 더욱 힘들어졌다. 2단계이던 시드전이 '스테이지1-스테이지2-파이널' 3단계로 늘었다. 스테이지1에만 약 500명이 참가했다. 총 96명이 4라운드로 치르는 파이널 대회에서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40위 안에는 입상해야 이듬해 대회 출전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

▲ 지난해 열린 KPGA 시드전 직후 참가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KPGA 제공

올해 시드전을 앞두고 극적으로 반전에 성공한 선수들도 있어 주목을 받았다. 여자 골퍼 중에서는 최혜정, 남자 골퍼 중에서는 홍순상이 그랬다.

최혜정은 그동안 시드전에서 다섯 차례나 낙방한 끝에 여섯 번 만에 정규 투어에 합류한 선수였다. 올해가 루키 신분이었지만 그는 스물네 살이다. 대부분의 루키가 열아홉 또는 스무 살인 요즘 추세를 감안하면 '늦깎이 루키'다. 더구나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지난 9월 YTN 볼빅 여자오픈까지 치렀을 때 상금 랭킹 85위에 머물렀다.

최혜정은 그러나 10월 OK저축은행 박세리 인비테이셔널부터 '반전 드라마'를 썼다. 이 대회에서 5위에 오르며 상금 68위에 올랐고, 그 다음 KB금융 스타 챔피언십 17위, 서울경제 문영퀸즈파크 레이디스 클래식 26위로 상금 순위 59위에 올라섰다. 더구나 서울경제 대회 때는 원래 출전 자격이 없었지만 앞 순위 선수가 불참하면서 출전의 행운을 잡았다. 일단 내년 시드를 확보한 최혜정은 최종전이었던 조선일보 포스코 챔피언십에서 생애 첫 우승컵까지 차지했다.

'미남 골퍼' 홍순상도 데상트코리아 먼싱웨어 매치플레이가 끝났을 때 상금 순위 61위에 머물렀다. 11개 대회에 출전해 공동 10위가 시즌 최고 성적이었다. 오랜 스폰서도 재계약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는 우여곡절 끝에 열린 카이도골프 LIS 투어 챔피언십에서 첫날부터 상위권으로 치고 나선 끝에 공동 5위로 대회를 마쳤고, 그 덕분에 상금 순위를 공동 49위까지 끌어올렸다.

여자골프 시드전 최종 본선은 현재 전남 무안에서 나흘간 일정으로 열리고 있다. 남자골프 파이널 대회는 다음 주 군산에서 치러진다. 17일 스테이지2에서 떨어진 남자 골퍼 A는 "괜찮다"고 했다. 그 담담한 목소리가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시험이란 어려서나 나이 들어서나 싫은 건 매한가지다. 형식만 다를 뿐 '제로섬 게임'에 던져진 삶에선 숙명이다. 밝음 뒤편의 어둠은 더욱 진하고, 화려함 뒤에 가려진 상실감은 더욱 크다. 비록 이번엔 낙방하더라도 악착 같이 버티길 바란다. 당신도 제2의 최혜정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김세영 마니아리포트 국장 freegolf@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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