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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인의 야구는 구라다] '씬 스틸러' 정근우의 참 바쁜 하루

조회수 2015. 11. 17. 09: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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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쿠바는 쿠바다. 계속된 탈출과 개방화 탓에 좋은 자원이 휑하니 빠져 나갔다. 국제 무대 성적도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결코 낮춰 볼 상대가 아니다. 더구나 8강전부터는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경기 방식 아닌가. 그럼에도 우리 대표팀은 선전했다. 설욕의 기회를 얻었다. 다시 태극기를 들고 일본 야구의 심장으로 들어가게 됐다.

의외의 스코어 차이였다. 이기든 지든 막판까지 접전일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2회를 빅이닝으로 만들며 꽤 넉넉한 점수 차이로 토너먼트에서 생존했다. 중간에 잠시 긴장감이 돌기는 했지만, 적절한 불펜 운용과 호수비들이 나오며 고비를 넘겼다.

어제(16일) 쿠바전 승리는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됐다. 선발 불펜으로 이어지는 마운드 운용이 원활했고, 하위 타선이 기대 이상으로 선전했다. 그 중에서도 <…구라다>가 주목한 건 캡틴의 활약이다. 동분서주, 1인 3역도 마다않는다. 게임의 중요한 길목마다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씬 스틸러의 멀티 태스킹이 빛나는 하루였다.

2타점짜리 적시타 치기

하위 타순이 2점을 뽑아줬다. 그리고 계속된 무사 1, 2루. 상대가 흔들릴 때 끝을 봐야 한다. 승부 세계의 진리다. 9번 김재호에게 희생번트를 시켰다. 벤치의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가뿐하게 초구에 작전을 성공시켜 1사 2, 3루. 기회가 넓어졌다. 쿠바는 벌써 두번째 투수다. 긴박하고, 중요한 목에서 그는 냉정하고, 단호했다. 초구에 138㎞ 짜리 직구가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타고 들어왔다. 승부사는 이미 그걸 노리고 있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듯 완벽한 타이밍으로 밀어냈다. 깨끗한 우익수 쪽 적시타. 주자 2명은 편안하게 홈을 밟았다. 4-0. 사실상 이날 승부의 결과를 예감케 하는 결정적 한방이었다.

이 경기서 그의 공격에서의 활약은 이 대목이 유일했다. 나머지 타석에서는 세번 모두 땅볼. 그러나 탓할 일 없다. 워낙 비중 있는 한방이었다. 주연(MVP)급은 아니지만, 그 못지 않은 비중을 가진 연기력 뛰어난 주조연급의 무게감이다.

유격수 자리까지 대리 뛰기

5점을 선제한 우리 대표팀은 이후 굳히기 모드로 전환됐다. 현장 전문 용어로 공구리(콘크리트) 치기. 선발 장원준의 예리한 몸쪽 직구와 슬라이더, 바깥쪽 체인지업이 화려한 컴비네이션을 빛냈다. 쿠바 타자들은 속수무책. 3회까지 질식 상태였다. 간신히 숨통을 튼 게 4회 1사후 3번 구리엘(3루수)의 좌월 2루타였다.

처음으로 득점권을 허용하자 긴장감이 돌았다. 4, 5번으로 이어지는 상대 타순도 걱정거리다. 예상대로 4번 데스파이의 눈빛이 만만치 않다. 슬라이더에 헛스윙 하며 볼카운트 1-2. 4구째 양의지의 선택은 바깥쪽 체인지업(131㎞)이었다. 존에서 낮게 변하는 공으로 헛스윙을 유도하겠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데스파이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오다가 떨어지는 공을 끝까지 따라붙었다. 장원준의 오른쪽을 통과한 타구는 중견수 쪽으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아뿔사, 첫 실점이구나.'

하지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우리의 씬 스틸러가 어느 틈에 카메라의 단독 샷을 받고 있었다. 2루 베이스도 훨씬 넘어서 거의 유격수 영역까지 달려와 가볍게 캐치해냈다. 중전 적시타가 돼야 할 타구는 2루수 땅볼로 한참 다운 그레이드 됐다. (다음 타자는 중견수 플라이로) 우리 대표팀이 4회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중계 방송하던 SBS TV 이종열 해설위원은 "정근우가 2루 주자를 견제하기 위해 베이스 가까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맞는 설명이다. 하지만 조금 부족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 타구를, 그 위치까지 커버하는 건 불가능하다.

보충 설명은 이렇다. 정근우의 위치에서는 포수의 사인이 보인다. 그러니까 그는 다음 공이 바깥쪽 체인지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타석에 있는 타자의 스윙 매커니즘을 결합시키면서 대략의 타구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즉 그는 타구가 1ㆍ2루간으로 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잘해봐야 투수 방향 정도. 여기에 스타트 타이밍까지 LTE급이었다. 스윙에 걸리는 순간 감각적으로 공의 방향을 잡았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타구를 쉽게 처리한 이유다.

2루심과 썸타기

캡틴은 전날 밤 큰 상처를 입었다. 어처구니 없는 대만 2루심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그 판정 탓에 우리 대표팀은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쓰라린 경험은 그를 변화시켰다. 새로 만난 파트너와 정겨운 도란거림이 몇차례 화면에 잡혔다. 그는 잘 안다. 깎듯한 인사? 서양 사람들은 그런 거 잘 모른다. 그들과는 가벼운 대화, 스몰 토킹(small talking)이 맞는다. 틈만 나면 말을 건다. 공수 교대 때도, 투수 교체 때도. 심심하고 적적할 때 곁에서 말벗이 되며 친분을 쌓는다.

물론 그의 썸타기는 '외교적인 효과' 만이 아니다. 사진에 캡처된 순간은 6회말 5-2에서 차우찬으로 교체되는 시점이다. 한국은 추가점을 내지 못하고, 쿠바에게 추격 당하며 자칫 위험한 흐름으로 넘어갈 지도 모를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캡틴의 유유자적함은 그라운드의 분위기를 한결 톤-다운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아마도 대표팀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몇몇 야수들에게도 일상의 안정감을 찾아줬을 것이다.

2루수는 본래 할 일이 많은 자리다. 1루수 백업/커버, 유격수와 사인 플레이, 외야 중계 플레이 등등. 포수를 제외하면 가장 멀티 태스킹이 요구되는 곳이다.

게다가 주장에 1번 타자다. 개막전에서는 2번이었지만, 이용규가 시원치 않자 타순이 올라갔다. 그만큼 김인식 감독이 모든 면에서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 기대에 그만의 방식으로 탁월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외부필자의 칼럼은 Daum스포츠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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