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k.column] 영국 축구경기장 간략史

입력 2015. 11. 12. 16:05 수정 2015. 11. 12.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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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플러스> 독점 콘텐츠

[포포투+] 영국을 '축구종가'라고 부른다. 현대 축구의 발상지라서 그렇다. 19세기 영국인들은 럭비에서 "손을 빼자"라고 하며 지금의 축구를 낳았다.

축구를 가장 먼저 즐겼으니 '축구 경기장'에 관한 역사도 그들이 써갔다. 지금은 당연하게 보이는 스타디움이 막 생겨나기 시작했던 시절은 도대체 어땠을까?

월드 No.1 풋볼매거진 <포포투>가 특별한 전문가를 초빙했다. 영국 축구 경기장 설계의 역사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로 평가되는 사이몬 잉글리스(Simon Inglis)다. <포포투>와 함께 축구 경기장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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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축구 경기장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멋진 경기장이 소개되는가 하면 하나의 관광 명소로 자리 잡기도 한다. 주말 저녁 축구 중계 채널을 틀어보자. 화면은 화려한 경기장의 모습으로 꽉 찰 것이다. 항공촬영으로 축구장의 전경을 보여주고 관중석과 라커룸도 보여준다. 각종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경기장을 3차원으로 재현해내기도 한다.

축구장이 미치는 영향이 전보다 더 커졌다. 화려한 전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1990년대 전까지, 정확히 말해 힐즈브러 참사(1989년)가 있기 전까지 축구장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사건·사고가 일어나거나 훌리건이 말썽을 피웠을 때가 전부였다. 기껏해야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안필드 콥 스탠드 사랑이 전부였다.

더 과거로 가보자.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눈부신 경기장(아레나)들이 있었다. 1863년 잉글랜드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가 창설됐다. 그러나 정작 축구 경기장(football stadium)은 없었다.

축구 경기가 펼쳐지는 공간에 선을 그리고, 선수와 심판 들을 위한 천막을 세우는 정도였다. 시설을 갖췄다고 해봐야 선수용 벤치와 작은 목재 판을 두는 정도였다. 미국인은 이를 '관중석(bleachers)'이라고 부른다. 그게 전부였다. 초창기 클럽들은 그라운드를 독점 사용하지 않았다. 빌려 쓴다는 개념도 없었다. 동네 선술집(pub)이 클럽하우스 역할을 했다.

# 임대 시대

축구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며 임시 경기장에 한계가 드러났다. 관중을 수용할 만한 적당한 공간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오래된 크리켓 경기장과 육상 경기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872년부터 1892년까지 FA 결승전은 모두 '오벌(the Oval; 잉글랜드 남부 서리의 크리켓 경기장)'에서 개최했다. 한 경기만 예외였다. 1873년 원더러스와 옥스퍼드 대학교의 결승전은 런던의 '릴리 브리지(西런던의 크리켓 겸 육상 경기장)'에서 열렸다.

그 경기장의 바로 옆에 1877년 새로운 육상 경기장이 생겼다. 오늘날 첼시 홈경기장인 '스탬포드 브리지'다. 1905년 첼시가 전용(專用)하기 시작한 뒤로도 육상 트랙은 193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트랙의 곡면 흔적은 1990년대까지 남아있었다.

1886년 블랙번 로버스와 웨스트 브로미치의 FA컵 결승전이 득점 없이 무승부로 끝났다. 재경기를 치를 적당한 경기장이 필요했다. 크리켓 경기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협회는 결승전 장소로 더비에 있는 '레이스코스 그라운드'를 선택했다. 명칭에서 헷갈릴 수 있는데, 이 경기장은 크리켓 용도였다. 결승전 재경기 결과는 블랙번의 2-0 승리였다.

더비 카운티는 그곳을 1895년까지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새 경기장을 찾아 떠났는데, 재미있게도 야구장이었다. 미국 여행을 갔다가 야구에 푹 빠진 한 주조 공장주가 세운 경기장이었다.

1892년 FA컵 결승전 이후 잉글랜드축구협회는 '오벌'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관중 수는 2천 명에서 2만5천 명 수준으로 증가했다. 1893년 협회는 맨체스터 소재 육상 경기장인 '팰로우필드(Fallowfield)'를 찾아내 1893년 결승전을 개최했다.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약 45,000명이 몰렸다. 그러나 현장 관리가 엉망이었다. 막무가내로 들어온 사람들 탓에 정작 티켓 구매자는 자기 자리에 앉지 못했다.

# 드디어 이룬 내 집 마련의 꿈

축구가 프로의 시대로 향하며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크리켓이나 육상처럼 인기 스포츠로서 모습을 갖춰나갔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축구 맞춤형 경기장이 필요했다. 1890~1914년 사이에 축구 경기장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대표적인 이유 세 가지를 살펴보자.

우선 클럽들이 유한법인 형태를 갖춰 주식을 발행했다. 덕분에 홈구장 건설을 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산업화다. 대량 생산되는 강철이나 콘크리트 등을 쉽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마침내 대규모 경기장 시설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개찰구의 등장이다. 아무리 경기장이 커도 입구를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아수라장이 되기 쉽다. 1895년 살포드(Salford - 맨체스터 지역) 소재 '엘리슨'이란 회사가 이 문제를 해결했다. 개찰구 개념을 발명했다. 초기 명칭인 '서두름 방지대(Rush Preventive)'가 목적을 잘 설명한다.

개찰구라는 신개념 장치 덕분에 클럽은 경기장 입장객 전원을 계수할 뿐 아니라 입장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입구에서 입장 관리자가 서서 일일이 돈을 받고 사람을 들여보내는 방식이었다. 모인 돈을 관리자가 경기 후 클럽에 전달해야 하니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했다.

새 장치가 완벽하진 않았지만 클럽의 현금 수입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클럽은 돈을 벌게 되었고, 이제 제대로 된 축구 홈구장을 세울 수 있었다. 이런 물결에서 유명한 경기장들이 우후죽순 등장한다.

가장 유명한 곳은 구디슨 파크(에버턴)였다. 1890년대 초반까지 구디슨 파크는 가장 '현대적 경기장'으로 통했다. 빌라 파크(애스턴 빌라)도 이 시기에 건립되었다. 당시 빌라 파크에는 사이클 트랙이 설치되어있었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3대 경기장인 아이브록스 파크(레인저스), 햄든 파크(국가대표팀), 셀틱 파크(셀틱)이 건립되었다.

# 의도한 현대성 vs 미(美)로 진화한 조잡성

구디슨 파크를 설립한 인물이 바로 스코틀랜드의 건축설계자 아치발드 리치(Archibad Leitch)다. 1913년 아스널의 전 홈구장 하이버리 스타디움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축구경기장 전문 건축가로서 '영국 축구경기장의 아버지'로 불린다.

장기 마스터플랜에 따라 건립된 영국 최초의 축구 경기장이 문을 열었다. 허허벌판에 세워진 이 경기장은 향후 관중석 증가를 대비한 개념까지 설계에 적용되었다. 설계자는 물론 리치였다. 1910년 개장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경기장 '올드 트래퍼드(Old Trafford)'다.

모든 클럽이 호사를 누리진 못했다. 기존 경기장에 관중석 스탠드를 억지로 증설하거나 관중석 위를 덮는 지붕을 갖다 붙이는 식으로 모양새를 갖춰갔다. 그 덕분에 독특한 개성을 갖추게 된 '좋은 예'도 생겼다. 크레이븐 코티지(풀럼), 몰리뉴(울버햄프턴) 그리고 세인트 제임스 파크(뉴캐슬)가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경기장은 기본 조건만 갖춘 상태였다. 관중 수입만 생각하느라 지붕 없는 테라스(terrace - 입석)를 크게 늘렸다. 비용 절감을 위해 값싼 자재가 사용되었다. 관중 편의 시설도 최소 수준에 머물렀다. 그런 게 없어도 경기장이 가득 찼으니 클럽이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1930년대가 되어 아스널의 하이버리가 그런 관행을 타파했다. 리치의 천재성이 빛나는 '아르데코(Art Dceo - 파리에서 유행한 미술 양식)' 형식의 관중 스탠드가 들어섰다. 1960년대가 되기까지 하이버리의 설계는 독보적이었다.

196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다시 선두로 나섰다. 1만 명을 수용하는 '유나이티드 로드' 스탠드를 설치했다. 경마장에서 착안해 영국 축구 최초로 '박스석'이 설치되었다. 나머지 스탠드 3개 면에도 동일한 설계를 적용함으로써 스탠드 4개 면을 모두 연결하겠다는 계획도 처음부터 세워졌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대식 축구 경기장의 탄생이다.

# 현대화 vs 전통

이게 끝이 아니었다. 맨유의 신개념 스탠드 '유나이티드 로드'는 캔틸레버 지붕(차양처럼 기둥이 없는 지붕)이 설치되었다. 기둥이 없는 지붕 설계는 기적처럼 여겨졌다. 영국 건축설계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캔틸레버 방식은 이미 40~50년 전부터 일반화된 설계였다. 캔틸레버 설계가 적용된 최초의 영국 축구 경기장은 1958년 스컨소프였다.

영국 축구계는 경기장 시설 투자에 인색했던 관행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했다. 1946년 볼턴(사망자 33명), 1971년 아이브록스(사망자 66명), 1985년 브래드퍼드(사망자 56명) 그리고 1989년 힐즈브러(사망자 96명)라는 경기장 인명사고가 벌어졌다. 축구 관중 부상자 목록이 있을 정도였다. 리버풀의 콥 스탠드에서는 매 경기 부상자 발생이 40~60명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힐즈브러 참사를 계기로 영국 정부는 축구계 전반에 관해 새로운 정책을 세울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저스티스 테일러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위원회의 조사 목적은 영국 축구 클럽들의 21세기 준비를 돕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20세기로 끌어올리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영국 축구 관련 시설이 20세기라고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낙후되었다는 뜻이다.

'테일러 보고서'는 축구 경기장에서 테라스(입석)를 없애고 전 좌석제(all-seated)를 권고했다. 찬반양론이 벌어졌다. 그러나 영국 축구 경기장만큼 안전도에서 뒤떨어져 있는 축구 강국은 드물었다.

이쯤에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라운드(ground)'와 '스타디움(stadium)'의 차이점이 뭐냐고 말이다. 필자는 나름대로 기준을 정해놓았다. '스타디움'은 시설 전체가 통합적 설계를 바탕으로 지어진 건축물을 뜻한다. '그라운드'는 진화한다는 개념이다.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개발되어가는 경기장이다. 설계 계획은 물론 없다.

웸블리는 '스타디움'의 전형이다. 반면에 안필드를 비롯한 영국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곳은 '그라운드(축구 경기장)'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린다. 그라운드와 스타디움 중 당신은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가?

에디트=홍재민, 글=Simon Inglis, 번역=정재은, 사진=Gettyimages/멀티비츠, 포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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