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인의 야구는 구라다] 박찬호의 시구, 김광현의 투구

조회수 2015. 11. 9. 09:2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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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트발이 끝내줬다. 짙은 싱글에 핑크 넥타이. 글러브를 받아들고 성큼성큼 마운드에 올랐다. 맞다. 그라면 당연히 투수판에서 던져야 한다. 주저 없이 자켓을 벗었다. 미리 생각하고 준비한 퍼포먼스는 아닌듯 했다. 글러브를 낀 채 약간 우왕좌왕. 그러나 주저함은 없었다. 벗겨진 웃옷은 대강 마운드 뒤편에 널부러졌다.안정된 투구폼으로 포수를 향해 발사. 전광판에 101㎞가 찍혔다. 박수~, 웃음~. 자켓은 안중에도 없다. 다음 스테이지로 뚜벅뚜벅 이동해 위촉패를 받아 든다.진행 요원이 마운드 뒤에 버려진(?) 물건을 전해준다. <…구라다>는 이 대목을 유심히 봤다. 터나 안터나. 그는 안 턴다. 그냥 걸친다. 꽤 비싸 보이던데…. 물광을 낸듯 반짝이는 구두도 그랬다. 축족인 오른발 앞쪽 코에는 분명히 흙이 짙게 묻었으리라. 아무리 닦아도 흠집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전혀 마음 쓰지 않는 눈치다. 일체의 잡동작 없이 세리머니를 깔끔하게 마쳤다.

사카모토의 말이 암시하는 것

아쉬울 것도 없었다. 말도 필요 없었다. 완패였다. 5-0. 어쩌면 실제는 그 이상이다. 더 무너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현격한 차이였다. '이거다' 싶은 승부처조자 없었다. 완벽하게 지워졌다. 뭐가 문제였냐고? 묻는 것조차 어리석다. 패인을 찾는 게 별 의미가 있겠나 싶다. 하지만…그러나…그럼에도…. 해야 할 말이 있다. 따져야 할 얘기가 있다. 도대체 왜? 싸워보지도 못했냐는 것이다.

실제 이날 승부가 언제 갈렸냐고 묻는다면 <…구라다>는 '1회'라고 답을 적고 싶다. 물론 극단론일 지 모른다. 그러나 서로가 첫 아웃 카운트 3개를 교환하면서 이미 뚜렷한 기울기는 생겼다. 특히 3번 김현수가 맥 없이 (삼진을) 당하는 순간 1차적인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1회 말 4번 나카무라에게 중전 안타를 통타당할 때 또 한번 균형은 무너졌다.

기울기가 생기면 물이 흐르는 게 이치다. 2회 2실점이 그랬다. 혹자는 운을 탓한다. 하필이면 왜 베이스를 맞고 튀냐고. 또는 구장 적응력을 꼽는다. 우익수가 좋은 다이빙만 잘 했으면 괜찮았을 것이라고.그러나 본질은 그게 아니다. 나카타와 마쓰다가 홈을 밟기 이전부터 우리는 이미 포인트를 잃고 있었다.2점째 희생플라이와 솔로홈런을 쳤던 사카모토가 경기 후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무척 긴장했다. 그러나 선발 오타니가 굉장히 잘 던져주면서 모두들 편해졌다." 압도적이었다. 힘으로 제압당했다. 노림수 따위가 들어갈 틈도 없었다. 당연히 게임은 그에게 지배됐다.

에이스가 주는 메시지

사실 김광현의 초반 구위는 나쁘지 않았다. 1회 아키야마와 야마다를 삼진으로 돌려세울 때만 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4번 나카무라에게 중전안타를 맞은 뒤부터 이상해졌다.이때부터 강민호-김광현 배터리의 볼배합은 부쩍 조심스러워졌다. 빠른 공보다는 변화구 선택이 훨씬 늘어났다. 존에 넣기 보다는 유인구로 풀어가려는 인상이었다. 결국 이게 문제였다. 일본 타자들은 슬라이더에 넘어오지 않았다. 괜히 카운트만 불리해졌다. 그러다 보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기술적으로 풀어보자. 경기 후 밝힌 고쿠보 감독의 말이다. "(김광현이) 슬라이더가 좋은 투수여서 낮은 코스에 무리하지 않으면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타자들과 공유했다." 이 말은 그런 뜻이다. '낮게 오면서 떨어지는 유인구만 참아내면 볼카운트가 좋아진다. 그러면 타자들에게 유리해진다.'물론 이해는 간다. 일찍 무너지기 싫다. 그의 빠른 볼도 들쭉날쭉한 면이 있었다. 오타니와 비교되면서 안정감이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볼카운트 2-1 같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유인구로 배트를 끌어내면서 풀어갈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게 더 고급진 볼배합이라고 볼 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경기, 그 대목은 아니다. 그는 대표 팀의 에이스다. 더구나 상징적인 라이벌간 대결이다. 무엇보다 개막전이다. 그런 상황에서 초반부터 유인구를 많이 섞는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자기가 끌고 가지 못하고, 타자에 끌려가는 구도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건 게임 전체에 주는 메시지가 다르다. 우리는 이번 가을, KBO리그에서도 경험했다. 에이스 한 명이 시리즈 전체를 어떻게 지배하는가를.사카모토의 멘트가 다시 떠오른다. '무척 긴장하다가 오타니의 호투를 보면서 편해졌다'는 얘기 말이다. 그걸 반대로 적용해 보자. 우리 팀 야수들은 어땠겠는가. 계속 카운트가 밀리면서, 수세에 몰리는 에이스를 보면서 말이다.

싸우러 갔으면 싸워야 한다

상대 선발과 비교해 힘의 차이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피해가는 건 답이 아니다. 그래도 붙어야 한다. 직구가 조금 날리더라도, 힘이 약간 부치더라도, 자꾸 가운데로 몰리더라도. 그래도 맞서야 한다. 그걸 해달라고, 가장 중요한 게임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그게 에이스의 숙명이다. 그게 김광현이, 강민호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이다. 2009년 WBC 때 봉중근 열사가 만천하에 시전했던 그 기개를 벌써 잊었는가.61번을 달고 파란만장한 현역을 보냈던 '전설'은 이날도 참 인상적이었다. 그는 후배들에게 그걸 가르치고 싶었을 지 모른다. 설사 멋진 수트가 구겨질지라도, 물광 구두에 흙이 묻을지라도. '시구하러 갔으면 시구를 해야 한다'고. 그래 맞다. 싸우러 갔으면, 싸워야 한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외부필자의 칼럼은 Daum스포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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