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률의 S담쓰談]행운이라고? 그것은 천운(天運)이었다

조회수 2015. 11. 1. 09:1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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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날 2015년 프로야구도 막을 내렸다. '뚝심의 곰 군단' 두산이 2010년대 최강팀의 마침표를 찍으려던 삼성을 제치고 올해 마지막 경기의 승자로 남았다.

두산은 잠실에서 열린 '2015 타이어뱅크 KBO 리그' 한국시리즈(KS) 5차전에서 13-2 대승으로 14년 만의 우승을 장식했다. 2001년 이후 4번이나 준우승의 고배를 마신 끝에 들어올린 통산 네 번째 KS 우승컵이다.

< '울지마, 재원' 두산 선수들이 10월31일 삼성과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승리한 뒤 부둥켜 안고 기뻐하는 모습. 주장 오재원(가운데)이 김태형 감독을 얼싸안고 울먹이자 홍성흔이 위로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잠실=두산 베어스) >

우승을 확정한 선수들은 서로 부둥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쁨과 감동을 누렸다. 2만 명 가까운 팬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14년을 기다렸던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그들 중에는 선수들처럼 눈물을 콸콸 쏟아내거나 겨우 참아내면서 눈에서 물기를 찍어내는 이들도 있었다.

시상식을 마친 선수들은 흥이 올라 차례로 김태형 감독은 물론 구단 수뇌부들을 집어던졌다. 박용만 그룹 회장을 비롯해 박정원 구단주, 김승영 구단 사장과 김태룡 단장 등이 우악스러운 선수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헹가래 세례를 받았다. 우승팀만이 누릴 수 있는 지구 중력과의 싸움 특권이었다.

▲두산, 삼성 3인방 이탈의 반사 이익?

사실 두산의 우승에는 실력 외에도 운이 적잖게 작용했다는 의견도 상당하다. 무엇보다 KS 상대인 삼성의 전력이 예상 외의 변수로 약해진 데 따른 반사 이익을 봤다는 것이다.

삼성은 최근 4년 연속 통합 우승을 이룬 명실상부한 2010년대 최강팀. 올해도 투타에서 정상급 선수들을 보유한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팀 타율 1위(3할2리), 평균자책점(ERA) 3위(4.69). 사상 첫 선발 투수 5명 10승과 10명 타자가 100안타 이상의 든든한 전력을 뽐냈다.

정규리그 유일한 승률 6할대(6할1푼1리)로 두산과 승차는 무려 9경기나 됐다. 올 시즌 두산에도 11승5패로 앞서 있었다. 사상 첫 5년 연속 KS 및 통합 우승이 유력해 보였다.

< '이들이 있었다면?' 도박 스캔들로 두산과 한국시리즈 명단에서 빠진 삼성 윤성환(왼쪽부터)-안지만-임창용.(자료사진) >

하지만 삼성은 KS를 앞두고 결정적인 암초를 만났다. 주축 투수 3인방의 '도박 스캔들'이다. 17승 투수 윤성환과 홀드왕(37개) 안지만, 구원왕(33세이브) 임창용이 해외 원정 도박, 그것도 최대 10억 원대 도박판을 벌였다는 첩보가 입수돼 경찰 수사 대상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아직 수사 전 단계에 본인들이 결백을 주장했지만 삼성은 결단을 내렸다. 지난달 20일 결전을 불과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들을 KS 명단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 상황에서 삼성이 이들의 대안을 마련하기는 불가능했다. 확실한 1선발과 그에 버금가는 필승 계투 요원, KBO 리그 최고의 마무리를 일주일 새에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삼성은 마운드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은 채 두산과 KS에 나서야 했다.

▲삼성, 마운드보다 타선에 치명타?

맹수들의 격돌.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피부를 뚫고 할퀴어 살점을 뜯어내고 뼈를 부수는 혈전. 멀쩡한 사지로 나서도 승부를 알 수 없는 판에 다리 한 쪽이 잘린 사자는 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고비마다 삼성은 마운드 열세로 물 오른 두산 타선을 배겨내지 못했다. 정수빈과 허경민, 신들린 테이블 세터진은 매번 알찬 가을밥상을 차렸고, 김현수와 양의지, 박건우 등이 이를 맛나게 먹어댔다. 삼성 마운드의 한 쪽 팔은 과부하가 걸렸고, 급하게 갖다 붙인 팔은 헐거워 두산 타선을 당해내지 못했다.

정규리그 에이스급 활약을 펼친 알프레도 피가로는 5차전에 방문, 친정팀을 응원한 릭 밴덴헐크급은 아니었다. 피가로를 보충해줄 윤성환은 없었다. 차우찬 혼자 안지만과 임창용의 공백을 막기에는 몸이 부족했고, 이를 대신해줄 심창민은 경험이 부족했다.

< '그래도 멋진 패자' 류중일 감독 등 삼성 코칭스태프(오른쪽 위)와 선수들이 10월31일 두산과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졌지만 상대 우승 시상식 때 도열해 축하해주는 모습.(잠실=삼성 라이온즈) >

삼성 마운드 3인방의 공백은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 심리적으로 더 치명적이었다. 삼성 선수단 전체가 부담감과 초조함에 경직됐다. 그동안 단단했던 무리들의 힘으로 여유롭게 정글과 초원에서 우승을 사냥하던 사자 군단이 아니었다.

타선에 더 큰 악영향을 미쳤다. 훌쭉해진 마운드를 벌충하려 타자들은 압박감에 제 기량을 보이지 못했다. 때려서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지난 2년 동안 KS에서 3할대 맹타를 휘둘렀던 4번 타자 최형우는 21타수 2안타 타율 1할도 못 미쳤고, 타점과 득점은 단 1개도 없었다. 한 시즌 외국인 최다 홈런(48개)의 주인공 야마이코 나바로는 1차전 3점 홈런 이후 이렇다 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주장 박석민은 4차전 승부처 병살타로 고개를 숙였다. 이승엽과 '리틀 이승엽' 구자욱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기회를 잡은 건 혼신의 두산이었다

이런 외적 변수는 두산에게는 분명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 운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쌔게 잡아챈 것도 분명 실력이다. 2년 전에는 그 행운을 놓쳐버렸던 두산이기에 이번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그 운을 결과로 만들어낸 것은 두산이 기울인 혼신의 노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두산의 우승은 행운이 아닌 천운(天運)이었다.

사실 두산이 잡은 기회는 다른 팀에게 넘어갈 뻔도 했다. 넥센과 NC다. 그러나 곰들은 초인 집단, 거대 공룡과 사투를 이겨내고 사자와 한판승부를 벌일 도전권을 획득해냈다.

< '와 이겼다' 김현수(가운데) 등 두산 선수들이 넥센과 준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기적 같은 역전승을 이룬 뒤 기뻐하는 모습.(자료사진=두산) >

만약 넥센이 준플레이오프(PO) 4차전을 이겼다면 두산의 우승은 장담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1승2패로 몰렸던 넥센은 두산과 준PO 4차전에서 6회까지 9-2로 앞서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릴 기회를 잡았다. 이를 잡았다면 흐름은 넥센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두산이 5차전을 잡았다 해도 내상과 피로에 다음 시리즈가 어려웠을 터였다.

하지만 두산은 거짓말처럼 4차전을 뒤집어버렸다. 역대 포스트시즌 최다 점수 차 역전승. 이것은 운이 아닌 실력이었다. 이전 기록도 두산이 2001년 10월 25일 KS 4차전에서 삼성에 일궈낸 6점 차 역전승이었다.

이 기세를 몰아 두산은 NC와 PO도 업셋으로 만들었다. 1승2패 뒤진 상황에서 4, 5차전을 내리 따냈다. 5차전 역시 역전승으로 장식하며 뒤집기의 달인임을 입증했다. 이에 질린 넥센과 NC가 KS 진출권을 내준 형국이었다.

▲하늘도 감응한 부상 투혼과 단결

사실 삼성도 상처가 깊었지만 두산도 이에 못지 않게 만신창이였다. 체력은 고갈될 대로 고갈돼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투타와 공수주에 걸쳐 주요 선수들이 부상을 입었다.

< 경기 중 타구와 투구에 맞아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두산 포수 양의지(왼쪽부터 시계 방향), 외야수 정수빈, 투수 이현승의 모습.(자료사진=두산) >

삼성은 그나마 외국인 선수 3명이 온전했지만 두산은 사실상 1명으로 KS를 치렀다. 4선발과 요긴한 롱릴리프로 쓰일 요량이었던 앤써니 스와잭은 어깨가 아파 넥센과 준PO 1경기로 가을야구를 접었고, 외국인 타자 데이빈슨 로메로는 쭉정이였다. 방망이는 무뎠고, 수비 움직임은 굼떴다.

여기에 안방마님 양의지의 뼈는 금이 갔고, 재간둥이 정수빈의 살은 찢어졌다. 양의지는 타구에 맞아 오른 엄지 발가락 미세골절상을, 정수빈은 투구에 맞아 왼 검지 첫 마디 열상을 입었다. 양의지는 진통제를 먹었고, 정수빈은 바늘로 6번 피부를 뚫고 꿰맸다.

하지만 두산은 마음까지 다치진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부상 투혼이 선수단 전체를 치유하고 피로를 잊게 해준 강장제가 됐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진 저들이 뛰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쏘냐, 더 날뛰었다. 아픔을 잊고 뛴 양의지는 준PO 5차전 MVP가 됐고, 정수빈은 KS MVP가 됐다.

만약 삼성이 온전히 투수 3인방을 보유했다면 두산의 우승은 장담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삼성이 5연패를 달성할 수 있었겠느냐에 대해서도 장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2013년 삼성은 더 강력한 마무리 오승환(한신)을 보유했음에도 천신만고 끝에 두산을 넘었던 아찔했던 기억이 있다.

< '우리는 하나' 두산 선수단이 삼성을 꺾고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 뒤 시상식에서 김태형 감독(앞 중간)에 대해 김현수(앞 오른쪽)와 양의지가 샴페인 세례를 퍼붓는 모습.(잠실=두산 베어스) >

유독 이번 가을야구에서는 감독들이 하늘을 많이 언급했다. 김태형 두산 감독은 물론 김경문 NC 감독이 "결정은 감독이 내리고 결과는 하늘이 정해준다"고 했고, 류중일 삼성 감독도 5차전에 앞서 "결과는 하늘만이 안다"고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나. 두산의 뼈를 깎는 지극 정성과 살을 에는 노력이 하늘을 움직였다. 행운이라고? 그것은 천운이었다.

글=CBS노컷뉴스 체육팀장 임종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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