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F 칼럼] 추성훈 또는 아키야마 이야기, 영화로 만든다면?

이교덕 기자 2015. 10. 31.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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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이교덕 기자] 재일동포 4세, 일본으로 귀화해 한국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유도가, 헤이세이(平成)의 콘데 코마, 히어로즈 라이트헤비급 그랑프리 챔피언.

스베루 스베루(すべる すべる), 마왕, 미사키 가즈오에게 처형당한 남자, 섹시야마, UFC 아시아 최고령 파이터, 모델 야노 시호의 남편, 사랑이 아빠.

그리고 추성훈 또는 아키야마 요시히로.

'그'의 40년 인생은 다사다난했다.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위·아래·위·위·아래' 롤러코스터 같았다. 16부작 미니 시리즈로도 그의 삶 전부를 담아내기 힘들지 모른다.

■ 조국을 메친 남자

거대 제작사가 1000만 관객을 노리고 '그'의 삶을 영화화한다면, 그 시작은 2002년이 돼야 하지 않을까. 일본으로 귀화해 아키야마(秋山)가 됐고,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단 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결승전 상대는 우리나라 선수 안동진이었다. 한 스포츠 일간지는 1면에 '조국을 메쳤다'는 헤드라인을 달았다. 한국 대표에서 탈락한 한을 여기서 풀었다고 썼다.

이날 승리로 '그'는 한국에선 유도 파벌의 희생양 추성훈으로, 일본에선 금메달을 안긴 아키야마로 유명해졌다.

2004년 종합격투기 전향을 결정했다. 그해 12월 31일 'K-1 다이너마이트'에서 만난 데뷔전 상대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 출신 프랑소와 보타를 1라운드 1분 54초에 암바로 이겼다.

여기에 2승 1패를 추가한 '그'는 2005년 11월, 유도가가 아닌 파이터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K-1의 종합격투기 대회 히어로즈 서울 대회 메인이벤트에서 만난 상대는 오쿠다 마사카츠였다. 오쿠다는 서울에 살고 있던 일본 진무관 가라테의 파견 사범이었다. 혹자들은 이 경기에 대해 "일본인이 된 재일동포가 한국인 같은 일본인과 싸운다"고 표현했다.

'그'는 가드에서 암바를 거는 오쿠다를 번쩍 들어 올려 바닥에 내리찍는 괴력을 발휘해 TKO로 이겼다. 그리고 경기 내용보다 강렬한 승리 소감으로 우리나라 팬들의 가슴에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다시 새겼다.

"지금 저는 한국 사람 아닙니다. 일본으로 국적을 바꿨습니다. 그러나 여기 흐르는 피는 완전히 한국입니다." '그'의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명대사가 될 것이다.

'그'는 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남자였다. 등장할 때부터 특별했다. 대부분 선수들이 빠른 록 음악을 입장곡으로 쓸 때, 안드레아 보첼리와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타임 투 세이 굿바이(Time to Say Good bye)'라는 서정적인 곡을 틀었다.

이 노래가 시작되면 유도복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절을 한 뒤, 동료들의 손을 잡고 링으로 향했다. 4분 4초의 음악이 끝날 때 신기하게도 정확히 링 줄을 뛰어넘고 자신의 코너에 서서 상대를 향해 목례했는데, 리허설 때 반복 훈련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기장 크기에 따라 보폭을 맞췄고, 노래를 들으며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등장부터 철저하게 계산된 퍼포먼스였다.

매력적인 캐릭터에 경기력을 갖춰 나가니 당연히 인기가 올라갔다. 2006년 10월 '히어로즈 라이트헤비급 그랑프리 결승전'에서 멜빈 맨호프에게 암바로 승리하면서 스타 파이터의 탄생을 알렸다.

■ 추락, 마왕의 부활, 굴욕

그러나 빠르게 올라간 만큼 추락하는 속도도 빨랐다. 2006년 12월 31일 'K-1 다이너마이트'에서 상대 사쿠라바 가즈시는 경기 도중 '그'의 몸이 미끄럽다며 심판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어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경기는 1라운드 5분 37초 만에 사쿠라바의 TKO패로 끝났다.

그런데 나중에 '그'가 경기 전에 몸 전체에 로션을 발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과는 무효로 바뀌었고, 팬들의 비난은 극에 달했다. 일명 '스베루 사건'이다. 일부러 몸을 미끄럽게 하려고 했는지 고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처음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다가 로션을 바르는 관련 영상이 나오자 사실을 인정했으니 도덕적인 지탄을 면하기 어려웠다.

일본의 한 격투기 잡지는 '그'를 '마왕'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붉은 도복을 입고 붉은 눈동자를 한 악마 같은 모습을 표지에 실었다. 몇몇 팬들은 '그'가 유도 선수 시절에도 도복 깃에 비누를 발라 왔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팬들도, 관계자들도 '그'를 등지고 있었다.

2007년 10월 '히어로즈'의 두 번째 한국 대회에 출전하기로 했다. 처음엔 다소 수월한 상대가 거론됐는데, K-1에서 '마왕'을 잡을 만한 선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결정된 상대가 '슈퍼 코리안' 데니스 강이었다. 데니스 강은 2006년 프라이드 웰터급 그랑프리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실력이 절정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언더독의 반란이 일어났다. '마왕'의 잠재력이 폭발했다. 1라운드 4분 45초에 어퍼컷으로 데니스 강을 주저앉혔다. '그'는 한국에서 또 이겼다.

2002년 아시안 게임, 2005년 오쿠다 마사카츠 전, 2007년 데니스 강 전 등 한국에선 유독 강했다. 훗날 그는 "한국에는 어떤 기운이 있는 거 같다. 팬들의 성원에 힘을 받는다. 한국에서는 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2개월 뒤, 평생 잊지 못할 굴욕을 경험했다. 연말 이벤트 '야렌노카'에서 사커킥에 KO된 뒤(나중에 무효 경기로 결과 변경), 상대 미사키 가즈오에게 "넌 많은 사람들과 아이들을 배신했다. 이제부터는 성의를 보여 주길 바란다"는 훈계를 들었다. 대회 관계자들은 코피를 흘리는 '그'를 병원으로 보내지 않고 미사키의 앞에 세워 뒀다. 일종의 화형식 같았다.

2012년 12월 미사키의 은퇴식에 '그'는 깜짝 등장했다. 꽃다발을 들고 나왔지만, 특별한 말을 건네지 않았다. 단지 미사키와 인사를 나눈 뒤 기념사진을 촬영한 것이 전부였다. 묵은 감정을 털어 내자는 의미 있는 만남, 하지만 당시 훈계 장면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다.

■ 4연패, 그리고 5년 만에 승리

2009년 '그'의 파이터 인생에 새 막이 올랐다. UFC와 계약했다. 여기서 새로 쓰기 시작한 별명은 '섹시 + 아키야마'라는 뜻의 '섹시야마'였다. 영화 내용에서 전환이 일어난다면, 바로 이때 이후일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련은 다시 시작됐다. 옥타곤 데뷔전에서 앨런 벨처에게 판정승했지만, 2011년까지 크리스 리벤·마이클 비스핑·비토 벨포트에게 패했다. 2012년엔 미들급에서 웰터급으로 체급을 내렸으나 제이크 실즈를 넘지 못했다. 4연패 수렁에 빠졌다. 거기다 심각한 무릎 부상으로 공백이 길어졌다. 은퇴 절차를 밟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는 유명 모델 야노 시호와 낳은 딸 추사랑과 함께 출연한 KBS 예능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 출연으로 우리나라에서 또다시 화제의 인물로 떠 올랐다. 파이터보단 예능인이 더 어울린다는 악플도 나왔다.

지난해 9월 'UFC 파이트 나이트 52'에서 5년 만에 값진 승리를 차지했다. TUF 우승자 아미르 사돌라를 시종일관 압도해 판정승했다. 아직 선수로서 경쟁력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성공과 실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과정 속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그'는 은퇴를 앞두고 있다는 전망이 무색하게 UFC와 재계약했다. 그리고 다음 달 28일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UFC 파이트 나이트 서울 대회' 출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제 다시 연승을 노린다.

유도가들은 테이크다운 스페셜리스트들이다. 중심이 좋아 잘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플링 압박으로 승리를 노린다. '암바 대마왕' 윤동식이나 '스턴건' 김동현이 그런 편. 그런데 '그'는 10년 동안 파이터로 성장하면서 타격 능력을 극강으로 키운 특이한 경우다.

반대로 미나는 유도가 출신이면서 타격보다는 그라운드 게임에 능숙하다. 의외로 유도가들이 장기적인 그래플링 공방에서 약점을 보이는 반면, 미나는 주짓수 기술로 상대를 조인다. 11승 가운데 KO승은 5회, 서브미션승은 6회가 있다. 판정까지 간 적이 없다.

톱클래스 타격 능력의 유도가 대 수준급 그래플링 능력의 유도가의 대결. '그'가 스탠딩 타격전을 유지할 수 있다면, 승산은 높아진다.

UFC 아시아 파이터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타이틀에 크게 욕심이 있다기 보다 도전에 의미를 두고 있다. 아직 은퇴할 시기는 아니다. 계속 강해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한국 팬들 앞에서 이기고 싶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 추성훈 또는 아키야마 요시히로

"일본에 살 때는 한국인이었는데, 한국에서는 한국인도 아니었고 일본인도 아니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정체성은 항상 도마 위에 오른다. "독도는 어느 나라의 땅인가?"라는 한 일본 팬의 질문에 그는 "우리 모두의 땅"이라고 답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다.

'그'는 2004년 데뷔전 때부터 태극기와 일장기를 유도복 양쪽 어깨에 달았다. "아키야마 요시히로"라는 링 아나운서의 소개에 양 어깨를 두들겼다. 자신의 삶을 소개한 저서의 이름은 '두 개의 혼(2009년)'이었다.

처음부터 한국인도 아니었고 일본인도 아니었지만, 한국인이기도 했고 일본인이기도 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으로서 갈등과 고뇌, 그리고 선택이 '그'의 영화에서도 가장 진지하게 다뤄야 할 핵심 주제일 것이다.

하지만 일단 옥타곤에 올라 이기기 위해 싸우는 파이터가 되는 15분 동안은 '그'에게 국적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무의미하다. 한계를 깨 보려는 마흔 살 노장의 투쟁이 있을 뿐이다.

이번에 '그'는 추성훈이라는 이름으로 옥타곤에 오를 전망이다. UFC는 마케팅을 위해 '아키야마' 대신 '추'라는 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브루스 버퍼의 "추성훈"이라는 외침에도 그는 변함없이 태극기와 일장기를 한 번씩 두드릴 것이다.

재일동포의 삶을 다룬 일본 영화 '고(2001년)'에서 복서 출신 아버지는 주인공인 아들 스기하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왼손을 곧게 뻗고 그 상태로 한 바퀴 돌아라. 그 원의 크기가 너라는 인간의 크기다. 복싱은 그 원을 네가 뚫어서 밖의 것을 쟁취해 오는 것이다."

'그'는 그 원을 뚫는 데 집중할 것이다. 옥타곤 위에서 추성훈인지, 아키야마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끝

[그래픽] 김종래 제작 [영상] 김용국 ⓒ스포티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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