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k.column] 요한 크루이프: 축구를 바꾼 사나이 ②

2015. 10. 27. 17:2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포포투플러스> 독점 콘텐츠

[포포투+]

(편집자 주 - 1편에서 이어집니다.)

###

완벽해 보이는 그의 팀에도 문제가 하나 있었다. 스쿼드가 너무 얇았다. 수준 높은 전술을 운용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선수들이 더 필요했다. 점유에 특화된 선수가 부족했다. 라마시아의 생산 라인에 점검이 필요했다.

이 걱정은 차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그리고 리오넬 메시의 등장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크루이프는 선수들을 현재 능력뿐만 아니라 체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잠재성으로 선택했다. 1986년 15세 소년이 신체검사에서 키가 너무 작다는 결과를 받았다. 선수 생활을 유지하려면 180cm로 커야만 했다. 소년이 소리쳤다. "나는 180cm 이상 클 거야! 곧 멋진 축구 선수가 될 테니까 두고 봐!" 그가 바로 펩 과르디올라다.

크루이프는 180cm에 대한 통념을 바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알베르트 페레르, 세르히오 혹은 기제르모 아모르처럼 키가 작은 동료들과 함께했다. 훌륭한 체격 조건 없이도 그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공을 소유했다. 그리고 쥐떼처럼 상대를 압박했다. 과르디올라도 마찬가지였다. 체격이 월등하진 않았지만 영리하게 공을 다뤘다. 딱 내가 원하던 모습이었다."

한때 첼시에서 뛰고 싶어 했던 라이트백 페레르가 말했다. "크루이프는 선수 간격을 좁히고 빠르게 전진하길 바랐다. 공중볼 다툼에서 이기는 것보다 중요했다. 그는 어떤 선수가 필요한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키가 좀 작은 선수나 청소년 선수를 데려와도 문제없었다. 그는 이 선택이 팀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확신했다."

바르셀로나 유스팀부터 B팀까지 모두 혁신적인 3-4-3 전술을 도입했다. 공을 점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비로소 크루이프가 원했던 생산 라인이 탄생했다. 라마시아에서 페레르, 아모르 그리고 세르지가 졸업했다. 그들은 모두 합쳐 약 1,000경기 이상 출전했다. 180cm가 넘는 선수는 없었다. 천천히 성장하던 과르디올라도 384경기에 출전했다.

일간지 < 문도 데포르티보 > 저널리스트 오리올 도메네크가 당시 바르셀로나를 회상했다. "공이 주인공이 됐다. 체력 훈련 때도 공을 갖고 했다." 그는 바르셀로나 유스팀에서 6개월 동안 훈련했다.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를 지도하던 때였다.

"나처럼 작은 선수들을 위한 기회가 많았다. 내가 라마시아에 있을 때 과르디올라의 체구는 아주 작았다. 그러나 크루이프는 그에게 항상 뛰라고 지시했다. 그가 더 성장할 거라고 했다. 크루이프가 없었다면 차비나 이니에스타 그리고 티아고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크루이프의 계획이 윤곽을 드러냈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다. 1989년 많은 기대를 받으며 들어온 미카엘 라우드럽과 로날드 쿠만은 진가를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쿠만의 첫 시즌은 암울했다. 크루이프가 쿠만에게 쏟아지는 언론의 주목을 막아내는 데 질릴 정도였다.

매일 진행하던 브리핑도 중단했다. "언론에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불신으로 세상과 등진 크루이프가 남긴 경고였다. 그의 인터뷰 내용은 점점 난해해졌다. 그가 한 리포터에게 말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더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는 레알에 승점 11점 뒤진 채 시즌을 마감했다. 그가 첫 시즌에 낸 성과는 코파 델 레이 우승컵뿐이었다. 누네스 회장은 선수들로부터 불신임 투표를 거부했다. 크루이프를 내보내기 위해서다.

그러나 1990-91시즌, 크루이프와 바르셀로나가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이는 전설적인 시즌으로 회자한다. 라마시아의 열매가 결실을 보았다. 크루이프가 라마시아를 설립한 '진짜' 목적은 중요치 않았다.

"나는 프랑코의 독재 아래에 있다. 카탈루냐 사람들이 어떤 생각인지 잘 안다. 특성도 안다. 바르셀로나 팬은 1군 선수가 뛰어난 재능을 보이길 바란다. 그들은 감독을 감독 이상의 존재로 여긴다. 나는 그들이 카탈루냐인으로서 환호할 수 있는 경기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팬은 경기가 뜻대로 진행이 안 되면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지 않길 바랐다."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는 잃어버렸던 퍼즐 한 조각이었다. 약간 다혈질이어도 골 결정력이 탁월했다. 드리블과 패스에 능했고 특히 그의 왼발 슈팅은 위협적이었다. 그에게 '말라 레체'라는 별명이 붙었다. 성질이 나쁜 사람을 뜻한다. 그는 이기기 위해선 무엇이든 하는 싸움꾼이었다. 1990년 스토이치코프는 슈퍼컵에서 심판에게 항의하다 2개월 경기 출전 금지 징계를 받기도 했다.

바르셀로나는 1991년 1월 말 레알에 2-1로 승리하며 승점 5점 차이로 다가섰다. 라리가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던 때다. 바로 전 시즌 부진한 출발을 했던 신입생들이 빛을 발휘했다. 쿠만이 수비 앞에서 유연하게 움직였고, 라우드럽은 혼 안도니 고이코체아와 호흡을 맞추며 중원을 지휘했다.

크루이프의 결정적 약점이 드러났다. 그의 전술이나 선수단은 문제없었다. 흡연이 문제였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쭉 담배를 피웠다. 결국, 동맥이 꽉 막혀 심장 수술이 필요했다. 크루이프는 누캄프에서 책임감을 짊어진 데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하루에 한 갑씩 피는 습관이 생겼다. 건강이 급격히 악화했다. 그는 네 시간의 수술 끝에 다시 누캄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신이 그에게 준 최고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라는 선물을 지켜냈다.

크루이프는 아홉 경기를 쉬었다. 그 동안 코치 카를레스 렉사흐가 지휘했다. 그는 6년 만에 탈환한 리그 1위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아홉 경기 중 여섯 번 승리했다. 미드필더 에우제비우는 크루이프의 기초 작업이 튼튼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훈련 도중 대여섯 번을 멈췄다. 그리고 우리의 위치를 재배열했다. '아니, 거기가 아니야! 오른쪽으로 1m 더 가봐. 이제 보여? 패스 시야가 전보다 훨씬 나아졌을 거야.' 그의 세심한 지도는 우리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매 경기 정확한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우리를 이 정도로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수년에 걸친 경험을 통해 우리를 훌륭하게 지도했다."

크루이프는 회복 후 벤치에서 담배 대신 추파 춥스를 입에 물었다. 1991-92시즌의 출발이 부진했다. 8라운드까지 승리가 없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는 11월 UEFA 유러피언컵에서 카이저슬라우테론을 만나며 전환점을 맞았다. 1차전에서 2-0으로 승리했지만 2차전에서 그들의 경기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전반전에 한 골을 내어주며 끌려갔다. 동기 부여가 필요했다.

센터백 미구엘 앙헬 나달이 전반전이 끝난 후 라커룸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크루이프가 탈의실에 왔다. 우린 호되게 혼날 줄 알았다. 그는 손을 비비며 말했다. '빌어먹을, 밖에 너무 추워.' 우린 이 경기가 마지막 유럽 무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단지 춥다고만 말했다. 어떤 압박도 없었다. 그는 늘 그의 팀이 승리한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늘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었다. 그는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었다."

바르셀로나는 후반전에도 골을 내줬다. 그러나 호세 마리 바케로가 경기 종료 직전 극적으로 헤딩골을 넣었다. 이 경기는 그들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 시작이었다. 크루이프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이듬해 5월 리그 2연패를 확정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레알이 10위권 밖에 있던 테네리페에 예상치 못하게 패한 덕분이었다. 더불어 UEFA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샘프도리아를 이기며 우승컵을 차지했다.

"그는 팀의 과거를 잊으라고 했다. 이전 결승전에서 겪은 아픔도 기억하지 말라고 했다. 특히 1986년 결승전이다." 나달이 샘프도리아전을 회상했다. "그는 딱 한마디만 던졌다. '나가서 즐기고 오라'. 이 한마디가 모든 압박에서 벗어나게 했다."

삼프도리아전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양 팀 모두 득점 없이 연장전에 돌입했다. 추가 시간에 쿠만이 환상적으로 프리킥을 성공했다. 이는 바르셀로나에 첫 유러피언컵 승리를 안겼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미국 농구팀이 전승 쾌거를 이루며 역사상 최고의 드림팀이라 불렸다.

그러나 드림팀은 또 존재했다. 바로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다. 크루이프가 들어오기 전 4년 동안 바르셀로나에 몸담았던 선수 중 두 명만이 드림팀에 속했다. 골키퍼 수비사레타와 주장 알렉산코다. 이들은 에스페리아의 반란자이기도 하다.

"1992년 팀에 색다른 정신과 분위기가 감돌았다. 모든 이가 느낄 수 있었다." 에우제비우가 말했다. 그는 샘프도리아전에서 과르디올라와 함께 중원을 장악했다. "우린 4년 동안 같은 길만 걸었다. 그러나 낯선 선수들이 들어오며 바르셀로나의 역사가 바뀌었다. 우린 선택된 자들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 시대가 열렸다."

에디터=홍재민, 글=Andrew Murray, 번역=정재은, 사진=Gettyimages/멀티비츠, 포포투

- [epl.fiver] 프리미어리그 10R 다섯 가지 이야기- [uk.column] 라리가 강팀들이 흔들린다- [fft.knowledge] '나이는 숫자일 뿐' 유럽 베테랑 12인- [from상암] 경기 절반을 없애는 빅매치의 불편함- [AIA생명] 축구 꿈나무 12인, 손흥민과 케인 만나다

[Copyrights ⓒ 포포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포포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