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일의 들숨날숨] 숨 쉬는 실수가 숨죽인 눈치보다 백번 낫다

조회수 2015. 10. 24. 14: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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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축구공을 가지고 놀기 시작할 때부터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들이 유럽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자란 세대들의 플레이에서 '주눅'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눈에 담긴 것이 자랑스러우니 행동 역시 당당했다.

칠레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축구연맹(FIFA) U-17 월드컵에 참가하고 있는 최진철호가 24일 오전 열린 잉글랜드와의 B조 예선 최종 3차전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지난 18일 브라질과의 1차전 그리고 21일 기니와의 2차전을 모두 1-0 승리로 장식했던 한국은 2승1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조별예선을 마감했다.

단 3경기를 통해 만들어진 새 역사가 한둘 아니다. 첫 경기 후 U-17 대표팀은 FIFA 주관대회에서 브라질을 꺾은 최초의 한국 대표팀이 됐다. 최진철호는 기니와의 두 번째 경기까지 승리하면서 16강행 티켓을 조기 확보했다. 월드컵과 올림픽, U-20 월드컵과 U-17 월드컵 등을 포함해 지금껏 대한민국 남자 축구대표팀이 1, 2차전을 모두 승리하고 조별리그를 통과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새 역사는 잉글랜드전에서도 집필됐다.

우선 승점 1점을 추가하며 1위를 확정했다. 조별리그를 1위로 통과한 것은 2002년 월드컵과 2008년 U-17 여자월드컵에 이어 3번째다. 비록 3연승은 실패했으나 또다시 패하지 않았다. 2승1무는 2002월드컵과 함께 최고 성적이다. 최초 작성 기록도 있다. 최진철호는 3경기 동안 단 1골도 내주지 않았다. 한국 남녀 축구사를 통틀어 FIFA 주관대회에 출전한 것은 총 45회인데, 조별리그를 무실점으로 마감한 것은 이번뿐이다. 지금껏 최소실점은 2002년 월드컵과 2012년 런던올림픽 당시의 3경기 1실점이었다. 요컨대 많은 것을 얻었던 경기다.

이미 16강 진출이 결정됐기에 최진철 감독은 앞선 2경기와는 다른 구성으로 나섰다. 예고된 변화였다. 경기를 하루 앞두고 최 감독은 "지금껏 출전하지 못한 이들에게 기회를 줄 것"이라면서 "그들에게도 월드컵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다른 선수들을 위한 배려인 동시에 주전급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덕분에 누군가는 평생 없을지도 모를 월드컵 무대를 밟았고, 핵심 전력들은 체력을 비축했다. 그러면서도 잉글랜드와 비겼으니 잘했다.

사실 결과가 그리 중요했던 경기는 아니다. 무승부만 나와도 조 1위를 확정할 수 있었고 패하더라도 브라질-기니전 결과에 따라 1위 가능성이 존재할 만큼 유리한 입장이었다. 져서 2위가 된다고 큰 탈이 생길 배경도 아니었다. 1위로 올라갔을 때의 파트너와 2위로 올라갔을 때의 상대 중 누가 나을지 점칠 수 없었다.

덕분에 잉글랜드전은 여유로운 운영이 가능했다. 억지로 3승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다만, 지금의 좋은 분위기를 망쳐버리는 결과가 나오면 곤란했다. 호흡을 고르면서 적당한 결과가 필요했는데, 적당한 그림이 나왔다. 대한민국 축구가 잉글랜드라는 이름값 높은 팀을 조별탈락 시켰다. 여기에 아스널 유스팀, 에버튼 유스팀에서 뛰고 있는 미래의 프리미어리거들과 당당하게 맞붙던 선수들의 모습도 뿌듯함을 주었다.

물론 최상은 아니다. 내심 아쉬움을 말하는 목소리도 적잖다. 내용까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일단 지난 2경기에서 워낙 잘해 눈높이가 높아진 탓이다. 하지만 객관적이고 냉정히 짚어도 그리 수준 높은 경기는 아니었다. 이승우를 포함, 앞선 경기에서 주축으로 활약하던 이들의 빈자리도 느껴졌던 경기다. 그래도 잘했다. 16강에 올라갔는데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냐'고 덮자는 게 아니다. 선수들의 자세 때문이다. 우리 축구를 펼치려다 나온 실수였기에 괜찮다.

선수들의 플레이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머뭇거림이 없었다. 결과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경기라는 조건이 선수들을 편하게 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아직 17세 이하 어린 선수들이 월드컵이라는 무대에서 잉글랜드라는 팀을 만났는데 긴장하지 않기도 어렵다. 그런데 최진철호의 선수들은, 시쳇말로 '쫄지는' 않았다.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1998년생이다. 1999년생이 좀 섞여 있다. 이들이 태어나서 뛰어다닐 때 한국 축구는 월드컵(2002)에서 4강에 올랐다. 그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2005)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매머드 클럽에 입단했다. 이후 유럽리그에서 뛰는 한국 선수를 보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FIFA 대회에 출전하는 각급 대표팀에게 16강은 당연한 고지가 됐다. 그런 일상을 보고 자란 선수들이 최진철호에 탑승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축구 선수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당당하다.

경기 중간중간 이승우가 있었으면 달랐을 수 있겠다 싶었던 장면들이 있었으나 이승우가 없이도 과감하게 패스를 시도하고 돌파를 노리고 슈팅을 날리던 다른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실수에 굴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던 몇몇 선수들을 향한 팬들의 비난 목소리가 있으나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일이다.

아스널 유스팀에서 진짜로 잘 뛰는지 이름만 올라있는지도 모를 선수가 가로막고 있다고 발이 땅에 붙어 있는 대한민국 대표선수를 보는 것보다는 백번 희망적인 실수였다. 숨 쉬는 실수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질질 끌려가거나 숨죽이고 눈치 보다 무난하게 경기를 마치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발전은, 앞으로 내딛고자 할 때 가능하다.

글= 임성일[뉴스1 스포츠부/lastuncle@daum.net]

사진= 대한축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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