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F 칼럼] 식은땀 주르륵..까다로운 크로캅과 마주한 공포 체험

이교덕 기자 입력 2015. 10. 23. 08:41 수정 2015. 10. 23.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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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덕 기자의 UFC 서울 대회 가이드①

■ 크로캅과 마주 보기…식은땀 나는 공포 체험

지난달 8일 오후 2시, 서울 '반얀 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개인 인터뷰실.

싸늘하다. UFC 관계자, 통역사, 영상 기자 등 10명 가까이 함께 자리했지만 인터뷰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모두가 미르코 크로캅이 날카로운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초긴장 상태,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두 시간 전만 해도 크로캅은 '싱글벙글'이었다. 뜨거운 취재 열기에 미소로 답했다. 기자회견 질의 응답 시간에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받자 "고맙지만 정확히 내 생일은 목요일(9월 10일)"이라고 농을 섞어 대답했다. 회견장에 모인 100여 명의 기자들을 웃음 짓게 만들 만큼 여유가 넘쳤다.

하지만 기자회견→사진 촬영→인터뷰 콤비네이션 공격에 '와일드 보이'도 지쳐 갔다. 특히 4~5개 매체가 진행한 1대 1 개별 인터뷰에서 같은 질문이 무한 반복되자 낯빛이 바뀌었다. 하필이면 마지막 차례에 배정된 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인터뷰실에 들어가기 전, 먼저 공포 체험을 마친 타 매체 동료 기자는 "찬바람이 쌩쌩 분다. 답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는다. 인터뷰를 5분 만에 끝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UFC 관계자는 "크로캅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으니 질문 수위를 잘 조절해야 한다"는, 생사와 직결되는 조언을 건넸다.

테이블 맞은편 크로캅이 매의 눈으로 날 주시했다. 그런데 난 '도끼 살인마' 반더레이 실바가 아니다. 건들거리며 눈싸움을 펼칠 용기가 없었다. 오른쪽 이마에 세로로 난 7~8cm 흉터, 이마와 눈가에 깊이 파인 주름, 여기저기 눈에 띄는 희끗희끗한 흰머리…. 킥복싱 31전(23승 8패)과 종합격투기 45전(31승 2무 11패 1무효)을 거쳐 온, 불혹을 넘긴 노장의 아우라는 특별했다.

예상대로 그의 답은 "그렇다", "아니다", "지금 당장 말할 수 없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퍼레이드였다. 특히 싸우고 싶은 상대에 대해 질문 받을 때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크 헌트와 재대결을 기대한다"고 하자 "UFC의 뜻에 달려 있다"고 짧게 말한 뒤 입을 닫았다.

어영부영 시간은 흘렀고, 5분 안에 인터뷰를 끝내야 한다는 관계자의 사인이 들어왔다. 이대로는 넘어갈 수 없다는 객기 어린 생각이 스쳤고, 과감히 '밑장'을 빼기로 결심했다. 괜찮다. 입은 눈보다 빠르니까.

"당신은 날카로운 인상의 소유자다. 하지만 평소 다른 영상들을 보면 장난도 많이 치고 개구쟁이 같다. 당신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까다로운 사람인가?"라고 했다.

그런데 전달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통역사가 내 말을 오해했다. "당신은 미디어에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로 시작하는 질문이 그의 귀로 들어갔을 때,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오역이 나온 덕분에, 크로캅에게 대 놓고 "너, 왜 미디어에 이렇게 신경질적이야"라고 물은 최초의 기자가 될 수 있었다.

다행히 기적이 일어났다. 냉소를 지으며 쏘아볼 것 같았던 크로캅이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식으로 나왔다. 천만다행. "시차 때문에 잠도 충분히 자지 못했다. 몇 시간 동안 미디어를 상대하는 일은 매우 힘들다. 평소 밝고 명랑하다. 난 날카로운 사람이 아니다. 단지 지금 피곤할 뿐이다." 인간적인 하소연이었다.

■ 빼지 못한 '밑장'…표도르의 복귀

어찌어찌 마무리된 인터뷰.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의 은퇴에 감정적인 동요는 없다", "프로 축구 경기에 나선 건 프로모션을 위한 쇼였다", "(크로아티아에서) 폴란드 등 멀지 않은 곳으로 이동할 땐 비행기 대신 차를 이용한다"는 등 몇 가지 흥미로운 답을 들었지만 깊은 대화는 나눌 수 없었다. 빼지 못한 '밑장'이 남아 아쉬울 뿐이었다.

끝내 꺼내지 못한 질문은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의 복귀에 관한 것이었다. 크로캅의 이름을 평생 따라다닐 연관 검색어 표도르. 2005년 프라이드에서 헤비급 타이틀을 걸고 싸웠을 때부터 이들은 비교 선상에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단짝이었다.

열정↔냉정, 불꽃 하이킥↔얼음 파운딩, UFC↔M-1·어플릭션·스트라이크포스, 특히 은퇴 시기에 갈린 '불'과 '얼음' 같던 이들의 대조적인 행보에 팬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표도르는 3연패 뒤 3연승하고 2012년 미련 없이 종합격투기를 떠났다. 파이트 쇼츠 대신 양복을 차려입고 러시아 정계에 진출했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였다. 반면 크로캅은 UFC와 재계약에 실패한 뒤 은퇴를 번복하고 K-1, IGF, 글로리를 맴돌았다. 경기력이 예전 같지 않은데,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듯했다.

특히 2013년 11월 러시아에서 열린 '레전드 파이트 쇼 2'에서 올렉시이 올리니크에게 당한 패배는 절망적이었다. 주저주저하다가 그라운드로 두 차례 끌려 내려갔고, 곁누르기에서 넥크랭크에 걸려 탭을 쳤다. 경기 시간 4분 42초. 킥 한번 차지 못했다. 답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을 땐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당시 이 경기를 관전한 표도르는 냉철한 평가를 내렸다. 러시아 미디어에 "크로캅의 전성기와 비교하면 실력 차가 많이 났다. 그의 경기 방식을 알고 있는데, 이번엔 전혀 보여 주지 못했다. 어떤 생각으로 계속 링에 오르는 걸까? 몸 상태도 좋지 않아 보였다"고 말했다.

진심 어린 충고였을지 모를 표도르의 발언에 크로캅은 감정적으로 나왔다. "표도르가 우리 지역에서 경기했다면 난 호텔로 찾아가 식사를 함께 하고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조언은 기자들을 거쳐서가 아니라 그에게 직접 했을 것"이라며 "우리는 전우였다. 종합격투기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펼쳐 왔다. 그런데 표도르는 대기실에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를 비판하다니, 내가 알던 표도르가 아니다"고 휙 토라졌다.

지난해 일본의 연말 이벤트인 이노키 봄바예에서 선수와 게스트로 만난 두 파이터는 링 위에서 악수를 나누며 묵은 감정을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 라이벌은 성향도, 인생관도 180도 다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올해 두 파이터의 쌍곡선이 드라마처럼 교차했다. 크로캅은 지난 4월 맹수가 우글거리는 UFC로 복귀해 가브리엘 곤자가에게 3라운드 3분 30초 만에 팔꿈치로 TKO승했다. UFC에서 가장 잔인한 KO패로 꼽히는 2007년 4월 하이킥 실신 KO패의 치욕을 말끔히 씻어낸 한판이었다. 옥타곤에서 패배를 안긴 선수들과 다시 싸워 이기겠다는 '복수 혈전 시리즈'의 서막이기도 했다.

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표도르는 지난 7월 복귀를 선언했다. UFC행이 기대됐지만, 그가 택한 무대는 일본의 신생 단체 라이징. 더군다나 상대 후보로 종합격투기 2전의 인도 킥복서 자이딥 싱이 거론되자 여론은 차갑게 그에게서 돌아섰다. 톱 클래스에서 경쟁할 것이 아니면 왜 돌아왔느냐는 비판이 잇따랐다.

오히려 이젠 크로캅의 선택이 옳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크로캅은 UFC 서울 대회 기자회견에서 "표도르는 특별한 조언이 필요하지 않은 경험 많은 파이터"라고 칭찬했지만, 분명히 그를 향한 메시지가 품고 있을 듯했다. 그걸 묻고 싶었다.

■ 남탕 팬 미팅에 크로캅은 행복했다

그나마 다행은 흐지부지 끝난 개별 인터뷰 이후 팬 미팅에서 크로캅이 생기를 되찾은 것, 그래서 팬들의 질문에 상세히 답해 준 것이었다.

같은 날 오후 6시, 서울 '4TP 피트니스 센터' 팬 미팅 현장. 150여 명의 국내 팬들이 3시간의 휴식을 마친 크로캅을 맞이했다. 여성 팬을 발견하기가 '월리를 찾아라' 만큼 어려웠던 '남탕', 하지만 이들이 내는 중저음의 "크로캅, 크로캅" 연호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랑하는 크로캅,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곡과 함께,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모형이 떡 하니 장식된 케이크를 받을 때도 그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무엇이 당신을 계속 경쟁하게 만드는가?',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여기서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우리나라 팬미팅 문화에 감탄했고 마음을 활짝 열었다.

"평소 지방이 끼지 않은 최상의 몸매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머리도 짧게 자르고, 경기가 있는 날에 말끔하게 면도를 한다. 염색을 하지 않는다. 문신을 반대하진 않지만 내 몸에 문신을 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승리해도 링 밖으로 뛰어나간다거나 요란하게 기뻐하지 않는다. 그것이 팬들을 위한, 상대를 위한 예의라고 믿는다."

"매일 정해진 훈련 일정을 꼭 소화한다. 월·화·수요일에 강하게 훈련하고 목요일에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다시 금·토요일에 훈련하고 일요일에 쉬는 걸 반복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가족들이 파티를 즐길 때 난 지하 체육관에서 정해진 양의 훈련을 마치곤 한다."

특히 그가 언제까지 경쟁 속에서 살아갈지도 대답 속에서 알 수 있었다. 1974년생인 크로캅은 1970년생 댄 헨더슨, 1974년생 마크 헌트와 함께 노장 빅 3다.

크로캅은 "선수로 노쇠했다는 평가의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가. 종합격투기에서 45세 정도가 한계 연령이라고 생각하는데, 난 그때까지 뛸 수 있는 선수 가운데 하나"라면서 "경기가 잡히면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식단을 관리하고 매일 훈련한다. 그게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는 비법"이라고 밝혔다.

개별 인터뷰에서 조성하던 공포 분위기는 없었다. 팬들의 사랑은 크로캅도 춤추게 했다. 그렇다. 파이터의 마음을 여는 인터뷰의 기본은 관심과 애정이었다.

■ 세 번째 한국 방문…진짜 '와일드 보이'가 온다

크로캅은 19년 전인 1996년, 무명의 아마추어 선수 시절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익산에서 열린 무에타이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였다. K-1에서 미르코 타이거라는 이름으로 데뷔하기도 전의 일. 크로캅은 "당시 한국 일정이 길지 않아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다"고 아쉬워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뒤, 파이터 인생 끝자락에 다시 찾은 한국. 그는 슈퍼스타가 돼 있었고 열렬한 팬들은 그의 41번째 생일을 함께 축하했다. 22살의 청년 미르코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 41살 미르코에게 일어난 것.

선수 생활 가운데 최고의 팬미팅이었다는 말을 남긴 크로캅은 기자회견과 팬미팅을 마친 다음 날인 지난달 9일, 크로아티아로 돌아갔다. 관계자 누구에게도 기별하지 않은 채 호텔에서 나와 공항으로 나갔다고. 딱 크로캅다운 작별이었다.

이제 그는 다음 달 28일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리는 UFC 서울 대회(UFC FIGHT NIGHT SEOUL)에 출전하기 위해 세 번째로 한국을 찾게 된다. 이번엔 '와일드 보이'가 대회장에 울려 퍼질 것이고 관중들은 엉덩이를 들썩거릴 것이다.

상대는 18전 14승 4패의 앤서니 해밀턴. UFC에선 2승 2패를 기록하고 있다. 50%의 KO율을 보일 정도로 타격전에 자신감을 갖는다. 195cm의 장신이며 명문팀인 잭슨 윈크 아카데미 소속이다.

크로캅은 복수를 하기 위해 옥타곤으로 돌아왔다고 말해 왔다. 이번 해밀턴은 다음 설욕전을 앞두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상대. 여기서 지면 복수 혈전 시리즈의 드라마도 재미를 잃는다. 그는 "이 경기 후 계속 복수전을 펼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해밀턴에게만 집중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음 달 25일은 공개 훈련, 26일은 미디어 데이, 27일은 계체 순으로 UFC 서울 대회 행사가 진행된다. 미디어 데이는 크로캅과 다시 마주할 수 있는 기회다. 그때는 "도바르 단(Dobar dan)"이라고 인사한 뒤 질문 공세를 이어 나가고 싶다.

크로캅의 마지막 하이킥 승리는 지난해 12월 31일 이시이 사토시에게 거뒀다. 2006년 9월 10일 프라이드 무차별급 그랑프리 준결승에서 반더레이 실바를 하이킥으로 쓰러뜨린 지 8년 3개월 만이었다.

크로캅은 "하이킥 방어 기술이 크게 발전했다. 선수들은 내 하이킥이 나올 때 준비한 카운터 전략을 쓴다. 하이킥 KO가 잘 나오지 않는 이유다. 그래서 곤자가를 무너뜨린 팔꿈치처럼 다양한 공격 방법을 갖고 있다. 또 다른 비장의 무기가 있다"면서 "그러나 한국 팬들이 원한다면 하이킥 KO를 노려 보겠다"며 웃었다.

[사진] 한희재 기자 [영상] 배정호·김용국·송경택 기자 [그래픽] 김종래 기자 ⓒ스포티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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