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영의 마니아썰]'요리하는 프로골퍼' 故 배규태를 위해

김세영 기자 2015. 10. 2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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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배규태가 지난 9월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직접 만든 피자를 들어보이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사진=JTBC골프 고성진

이 글은 한 사람을 위한 거다. 지난 11일 불의의 사고로 서른셋 인생을 마감한 故 배규태가 주인공이다. 그의 생전에 직접 만나 대회를 나눠본 적은 없다. 인생의 절정기에 떠났다는 게 가슴 아프고, 그 뒤의 일 역시 안타까워서다. 유명 선수에 관한 일이라면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보도되지만, 젊은 프로 골퍼의 죽음을 애도하는 부고 기사 한 줄 없다는 현실이 마음에 걸렸다. 남들은 몰라도 내겐 그랬다. 골프라는 테두리로 묶인 동종업계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한다.

동생의 영원한 부재를 이 세상 누구보다 슬퍼하고 있을 형의 전화번호를 누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배규태에겐 세 살 터울의 형 한 명이 있다. 그는 프로 골퍼로 살면서 형과 함께 레스토랑 사업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뭐라고 위로의 말을 전할까' '무얼 물어보지' 등의 상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배범준입니다."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배규태'라는 이편의 말에 형의 목소리 톤은 금세 달라졌다. "네!" 말이라는 게 참 묘하다. 외마디에도 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형의 그 짧은 대답에는 "네, 맞아요. 우리 동생요?"라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제가 어릴 적부터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나면서 규태 혼자 컸어요. 그럼에도 어른스럽게 잘 컸죠. 나이 들어 이제 형제끼리 사업도 번창시키고, 규태 골프도 잘 되고 있었는데...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배규태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골프채를 잡았다.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도 몇 차례 했다. 2004년 프로 데뷔 후 본격적인 골프인생을 걸었다. 2부 투어를 뛴 지 4년 만인 2008년에 정규 투어에 합류했다. 2009년에는 일본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연습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어깨 부상이 찾아왔다.

▲ 올 시즌 개막전이었던 동부화재 프로미 오픈 당시 배규태(왼쪽)와 캐디를 맡은 그의 형 배범준 씨 모습. 사진=한석규 객원기자(JNA골프)

"어깨 회전근이 파열됐다는 진단을 받았죠. 클럽을 들지도 못하고, 의사 선생님은 앞으로는 골프를 못한다고 했어요. 규태가 좌절을 한 건 당연했죠. 그러다 잠시 몸과 마음을 추스를 겸 해서 제가 시작한 레스토랑 일을 도와주기 시작했죠."

배규태가 '요리하는 프로 골퍼'로 알려지게 된 계기다. JTBC골프가 그의 스토리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형제는 '라보나쿠치나'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형이 본점을 운영했지만 동생이 가맹점 관리 등 실질적 운영을 맡았다. 본점 외에 전국에 가맹점도 5곳이나 생겼다.

"제가 사업을 시작했지만 사업을 일군 건 규태에요.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저보다 사업 수완이 훨씬 뛰어났죠. 월 순수입 3000만~5000만원까지 올렸는데 그게 다 동생 덕분이에요. 규태가 사실상 사업리더였던 셈이죠."

레스토랑 사업이 번창하자 배규태는 다시 필드가 그리웠다. 어머니를 생각해서다. 주변에서도 권했다. "어머니가 규태 골프하는 데 20년 동안 뒷바라지 했잖아요. 어머니에게 우승 트로피 안겨 드리는 게 동생의 마지막 소원이었어요. 그게 효도라고 생각했던 거죠. 시합 땐 어깨가 아파 진통제를 먹고 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러면서 어머니께 트로피 안겨 드리면 미련 없이 골프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지난해 2부 투어부터 다시 시작했다. 형이 백을 메고, 동생은 선수로 나섰다. 배규태는 올해 대기 신분이지만 정규 투어에 합류했다. "전투기 조종사였던 아버지가 규태 고1 때 돌아가셨는데 현충원에 계세요. 지난 9월 매일유업오픈이 열렸던 유성 골프장 10번홀 티잉 그라운드에 서면 현충원이 보여요. 나흘 동안 경기를 하면서 동생과 저는 그 홀에만 올라서면 말없이 잠시 묵념을 올렸어요. 아버지도 지켜보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서요."

▲ 배규태는 후배들에게 프로 골퍼도 골프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어 했다. 사진=JTBC골프 고성진

사업에 성공한 형제는 지난해부터 어머니에게 본격적인 효도를 했다. 올해 60세인 어머니가 더 늙기 전에 여행을 실컷 보내드리기로 했다. "어머니가 미국여행 20일 정도 다녀오신 후 일주일 정도 함께 집에 있다가 이번엔 유럽으로 여행을 보내드렸어요. 그런데 갑자기 규태 일이 터진 거죠. 어머니가 24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신 그 길이 아마 지옥 같은 과정이었을 거예요."

배규태는 내년 봄이면 새로운 가족을 꾸릴 예정이었다. 3년간 사귄 피앙세가 있었다. 올 시즌을 마친 후 양가 상견례를 할 계획이었다. 11월에는 '1000일' 기념 파티도 준비하고 있었다. 배규태와 친하게 지냈던 타이틀리스트 투어밴 담당자는 "지난 추석 땐 '예비 처갓집에 뭘 선물해야 하느냐'고 물어보며 웃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고 했다.

배규태가 JTBC골프가 발행하는 골프매거진에 '요리하는 프로 골퍼'로 소개된 뒤 몇몇 사람들은 프로 골퍼의 명예를 깎는 것 아니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했다. 이에 대해 그의 형인 배범준 씨는 이렇게 말했다. "동생은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프로 골퍼가 골프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줄 수 있다고 여겼죠. 저 역시 동생이 많은 후배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몇몇 후배들은 매장에 와서 파스타 먹고 울고 가기도 했고요. 동생이 프로 골퍼로서는 큰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사업으로는 성공했잖아요. 다른 프로들에게 용기를 줬으면 해요."

▲ 지난 9월 데상트코리아 먼싱웨어 매치플레이 당시 배규태.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참가한 대회다. 그는 32강까지 진출했다. 사진=박태성 기자

그는 이번에 많은 동료들이 와주고, 함께 슬퍼해줘 고맙다고 했다. 죽음이란 언제나 그렇듯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에서 뛰는 그의 동료들은 빈소를 찾지 못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활약하고 있는 김민휘(23)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대신 여전히 살아 있는 배규태의 핸드폰에 그를 그리워하는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PGA 투어에서 우승 후 인터뷰를 하게 되면 배규태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다. 이인우 KPGA 선수협의회 회장은 "다음 달 열리는 시즌 마지막 대회인 투어챔피언십 때 출전 선수 모두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에 참가할 예정"이라고 했다.

배규태. 그는 먼저 떠났지만 영원히 '요리하는 프로골퍼'로 남게 됐다.

에필로그

이번 일의 진행 과정을 보며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부고에 관해서다. 애석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고, 경중이 어디 있겠는가. 협회에서는 종종 임원들의 부친상, 장인상 등에 관해 보도 자료를 뿌리고, 언론은 이를 알린다.

그런데 협회의 사실상 주인인 회원 본인이 상을 당했을 때는 그런 게 없다. 물론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회원이 약 6000명이나 된다. 때문에 이들의 궂긴 소식을 모두 알릴 수는 없다. 다만 현역 투어 프로의 경우에는 본인의 별세 소식에 한해서라도 자료를 내는 게 어떨까 싶다. 현역 투어 프로 본인이 사망하는 경우는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팬들에게 알린다는 의미도 있어서다.

김세영 마니아리포트 국장 freegolf@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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