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현의 스포츠 On Air] 수고했어, 대구시민야구장

조회수 2015. 10. 2. 09:0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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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민야구장 길 건너에는 우성식당이라는 음식점이 있다. 다소 허름해 보이지만 1982년부터 시민야구장과 역사를 함께했던, 상당히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과거에 선수들이 경기를 전후해 자주 식사를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미디어나 구단 관계자들의 지정식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야구 중계를 위한 대구 출장길에는 일상처럼 들르게 된다.

< 사진제공 - 박화영 기록원 >

넓지 않은 내부는 선수 및 아나운서, 해설위원들의 사인과 사진으로 가득하다. 그 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한 장 있다. 올 시즌 초 해설위원으로 깜짝 변신한 '헐크' 이만수 위원이 한명재 캐스터와 식당을 찾았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액자를 표구해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은 이 사진은 자세히 보면 '한명재 아나운서'가 아니라 '한영재 아나운서'라고 씌어있다. (이미 사진에 인쇄가 되어있기 때문에 수정은 어려워보인다.)

주인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친근하게 말을 건네며 메뉴를 물어보신다. 무엇보다 상당히 솔직하신 편이다. 이를테면, 비빔국수를 오랜만에 시켜먹으려 하자 "그거 오늘 좀 맛이 읎다. 딴거 묵으라"라며 쿨하게 거부하는 식이다. 오늘 재료 손질이 잘못됐거나 맛이 별로라고 생각되는 메뉴는 아예 주문을 받지 않는다. 낯이 좀 익으면 계란 후라이를 하나씩 더 내어 주는 배려도 잊지 않으신다.

지난 주 개인적으로는 대구 출장이 아마 이번 시즌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우성식당을 일부러 다시 찾았다. 주인 할머니에게 넌지시 신축구장이 생기는 바람에 이제 여기서는 야구를 안하니 장사에 지장이 있지 않겠냐고 여쭤보니, 역시 쿨한 대답이 돌아온다.

"야구 안 해도 오는 사람 많다. 걱정 말어."

< 야구장을 바라 보는 이만수 위원. 사진작가 알렉스김은, 이곳에서 현역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삼성의 레전드가 이제 곧 사라질 야구장을 바라보는 뒷모습에서 뭔가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삼성라이온즈의 신축구장이 거의 완성되면서, 대구시민야구장은 오늘 kt와 삼성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정규시즌에는 그 소임을 다하게 됐다. 더 이상 이곳에서는 프로야구 정규리그 경기가 열리지 않는다. 바로 길 건너에서 야구장과 오랜 세월동안 함께한 우성식당 할머니처럼, 그 공간과 시간을 공유했던 사람들 저마다 이곳에서의 추억을 한번쯤 꺼내보고 싶은 순간이다.

돌이켜보면 방송국에 스포츠PD로 입사해 처음 야구현장배정을 받은 곳이 바로 대구시민야구장이었다. 텅 빈 관중석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카메라 배치에 대해 처음 이해를 한 곳이고, 선배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으며 스포츠PD로서 걸음마를 떼던 곳이다. 아무래도 감회가 남다르다.

모든 야구장 중에 중계석과 경기장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중계석은 아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대구시민야구장은 백스탑 바로 위에 중계석이 있다. 조금 크게 이야기하면 포수나 주심은 아마 중계 코멘트를 들을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예전에 어떤 해설위원은 경기 중 궁금한 상황이 발생하자 앉은 자리에서 이닝 중간에 주심에게 바로 물어 확인한 적도 있다.

하지만 카메라 배치는 쉽지 않다. 다른 야구장에서 유심히 카메라들을 살펴보면 항상 1루나 3루쪽 덕아웃 옆에 중계 카메라가 배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대구시민야구장은 이 자리 자체가 없다보니 덕아웃 위로 카메라가 올라가있다. 다른 위치의 카메라들도 관중들에게 많이 치이기도 하고, 그물망이 자꾸 걸리는 등 썩 화면이 예쁘게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녁노을이 여기만큼 기가 막히게 잡히는 곳도 없다. 그만큼 고즈넉한 분위기가 운치 있는 오래된 야구장이다.

대구 더위야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인조잔디가 깔려있는 대구시민야구장은 특히 더 무덥다. 한여름에 삼성 덕아웃을 자세히 보면 한쪽 구석에 선수들이 몰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덕아웃 뒤에 실내로 연결되는 문이 열려있어 그곳으로 에어콘 바람이 조금 새어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뜻 류중일 감독을 슬금슬금 피해 몰려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더위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정규시즌 2065경기를 치르는 동안 삼성의 통합 4연패, 이승엽의 56호 홈런 등 수많은 기록을 탄생시킨 대구시민야구장의 퇴장을 아쉬워하는 건 비단 선수들 뿐만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관중들, 프런트, 볼보이, 구장 관리인, 경호원, 치어리더, 기자, PD, 식당 사장님 등 이곳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그 순간순간을 함께했던 모든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 오늘, 대구시민야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로 모든 야구팬들이 그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구단측에서도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한 모양이다. 레전드 뿐만 아니라 구장의 역사를 함께한 다양한 사람들을 초대했다고 한다. 긴 세월을 바로 곁에서 함께한, 우성식당 할머니 역시 이날 경기장에 초청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2066번째, 마지막 정규리그 경기는 오늘 저녁 6시 20분에 시작된다.

대구시민야구장. 그동안 참 수고가 많았다.

글=박차현(MBC스포츠플러스 PD)

[외부필자의 칼럼은 Daum스포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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