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률의 S담쓰談]'단신 외인 대히트?' 韓 농구 축복인가, 재앙인가

조회수 2015. 8. 17. 12:4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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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구연맹(KBL)이 야심차게 도입한 이른바 '단신 외인'들이 대히트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국 무대 첫 공식 경기에서부터 화려한 기량을 뽐내며 2015-2016시즌 열풍을 예고했다.

이들은 본격 시즌의 전초전 격인 '2015 프로-아마 최강전'에서 강렬한 데뷔전을 치렀다. 외국인 드래프트의 유일한 1라운드 출신 안드레 에미트(KCC · 191cm)와 최단신 조 잭슨(오리온스 · 180cm) 등이다.

블로킹을 피하는 플로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덩크슛을 호쾌하게 꽂으며 장신들을 무색하게 만든 단신 외인들의 플레이에 팬들은 연신 탄성을 질렀다. 아직 완전히 뚜껑을 열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이 정도면 KBL의 기대를 충분히 채워줄 것으로 보인다.

< '충격 데뷔' 오리온스 조 잭슨(왼쪽)이 16일 삼성과 경기에서 호쾌한 덩크를 터뜨리는 모습과 KCC 안드레 에미트가 KGC 수비를 뚫고 돌파하는 모습.(자료사진=KBL) >

에미트는 16일 KGC인삼공사와 최강전 1차전에서 무려 35점을 쏟아부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리바운드도 13개를 걷어냈는데 모두 양 팀 최다 기록이었다. 이날 출전 시간이 3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수치를 찍은 게 더 놀랍다.

유려한 드리블에 스텝을 가미한 돌파는 국내 선수들의 겹수비도 무인지경으로 뚫어냈다. 가공할 점프력을 자랑하는 상대 찰스 로드(200cm) 앞에서 연신 공을 띄워 림을 갈랐다. 이전까지 봐왔던 김선형(SK), 전태풍(KCC) 등과는 또 다른 느낌의 신선한 플로터였다. 미국 프로농구(NBA)를 경험한 에미트표 고품격 플로터였다.

5개 중 2개를 성공시킨 3점슛도 비교적 정확했다. 여기에 비슷한 키의 국내 선수를 상대로 골밑 일대일 공격까지 선보였다. 리카르도 포웰(196cm)과 앨리웁 플레이까지 패스도 갖췄다. 올 시즌 단신 최대어로 손색이 없었다.

한 마디로 다재다능, KGC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KGC는 최고 수비수로 꼽히는 양희종(194cm)과 국가대표 센터 오세근(200cm)이 이날 뛰지 않았다. 그러나 에미트 역시 다소 헐거운 경기에 전력을 다하진 않았을 터. 시즌에서도 에미트 봉쇄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 '이것이 NBA급 활약' KCC 에미트는 16일 KGC와 경기에서 넓은 시야와 유려한 플로터 등 빼어난 기량을 선보였다.(자료사진=KBL) >

거의 유일한 외인 정통 포인트 가드 잭슨도 못지 않았다. 잭슨은 삼성과 최강전 1차전에서 18점에 3도움을 올렸다. 전체 경기 시간의 절반 수준인 20분여만 뛰고도 올린 기록이다. 역시 돌파가 수준급 이상이었고, 잇딴 비하인드 백패스 등 시야와 패싱력도 갖췄다.

무엇보다 180cm의 단신임에도 터뜨린 덩크에 입이 쩍 벌어졌다. 잭슨은 4쿼터 5분께 속공 상황에서 돌고래처럼 솟구쳐 올라 투핸드 덩크를 림에 꽂았다. 대부분 단신들이 구사하는 한 손이 아닌 장신들이 주로 하는 두 손 덩크였다. 엄청난 운동 능력을 입증했다.

이밖에 전자랜드 알파 뱅그라(191cm), 케이티 마커스 블레이클리(192.5cm) 등도 무난한 데뷔전을 치렀다. 뱅그라는 15일 동부와 1차전에서 30분8초를 소화하며 17점, 9리바운드, 블레이클리도 모비스와 1차전에서 15분38초만 뛰고도 9점 10리바운드 더블더블급 활약을 펼쳤다.

단신 외인은 김영기 KBL 총재가 심혈을 기울여 부활시킨 제도다. 올 시즌부터 외국인 선수 2명 중 1명은 193cm 이하 이른바 '단신'을 뽑도록 규정을 바꿨다. KBL 초창기 코트를 주름잡았던 단신 테크니션들의 화려한 기량으로 시들어가는 농구 인기를 되살려 보자는 의도였다.

< '영광 재현을 위하여' 지난달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 김영기 KBL 총재(아래 가운데)와 선발된 선수들이 기념 촬영한 모습.(자료사진=사진공동취재단) >

지난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외국 선수 드래프트 때 만난 김 총재는 "KBL 초창기는 제럴드 워커(전 SBS), 칼레이 해리스(전 나래), 버나드 블런트(전 LG) 등 작은 선수들이 경기를 휘어잡았다"면서 "하지만 이후 장신 외인들이 득세하면서 KBL 재미도 떨어졌다"고 진단했다. 이어 "한 마디로 기술자들이 있어야 고득점 경기가 펼쳐지고 흥미도 높아진다"며 단신 선수 부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일단 지금까지는 KBL의 의도대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단신 선수들은 1경기뿐이지만 단숨에 농구 팬들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데 성공했다. 1997년 KBL 원년 워커와 해리스에 이어 블런트까지 단신들이 빼어난 기량으로 신드롬을 일으킨 것처럼 말이다.

위기의 KBL과 농구 인기를 살릴 만한 '한 수'라는 평가가 벌써부터 나온다. KBL는 최근 전, 현직 감독과 선수들의 불법 스포츠 도박과 승부 조작 연루 혐의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전창진 KGC 감독이 아직 혐의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임에도 최근 자진사퇴했고, 선수들에 대한 수사 발표가 조만간 이뤄질 것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이런 가운데 단신 외인들의 깜짝 데뷔전은 KBL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될 만하다. 정규시즌이 개막된 뒤에도 열풍이 이어진다면 KBL의 르네상스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김 총재는 "필리핀처럼 화끈한 개인기와 공격 농구가 펼쳐져야 KBL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 '우리도 있다' LG 맷 볼딘(왼쪽부터)-전자랜드 알파 뱅그라-케이티 마커스 블레이클리의 최강전 경기 모습.(자료사진=KBL) >

하지만 또 다른 걱정이 한편으로 밀려드는 것도 사실이다. 외국 선수 제도를 논할 때 항상 '양날의 검'처럼 빼놓을 수 없는 국내 선수들의 위상과 입지다. 가뜩이나 골밑을 외인들이 점령한 가운데 가드, 포워드 포지션까지 국내 선수들이 설 자리가 없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여기에 승부처 해결사 역할을 외인들이 도맡는 주객전도 현상이 더욱 심화할 가능성도 높다.

농구계에서는 외국인 선수 제도 도입 이후 국내 선수들의 역할이 크게 줄었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돼왔다. KBL 무대에서도 토종들은 들러리에 그친다는 지적이 있었다. 적잖은 농구인들이 "국내 선수들은 외인들이 골밑에서 빼주는 패스를 받아 3점슛을 쏘려고 스텝만 밟고 있다"는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때문에 외국 선수들의 출전 시간을 제한하는 쪽으로 규정이 바뀌었다. 2명 출전에서 쿼터 제한, 또 1명 출전으로 규정이 바뀌면서 국내 선수들의 출전 시간을 보장했다. 그러다가 올 시즌부터는 4라운드 이후 2, 3쿼터에 외국인 선수가 2명 출전할 수 있게 됐다. 외인들의 출전 시간이 늘어나면 토종들의 기회가 줄어드는 딜레마인 것이다.

이는 KBL의 자양이 될 학원 스포츠에도 영향을 미친다. 장신 외인들이 골밑을 차지하자 국내 빅맨들은 외곽으로 밀렸다. 고교, 대학 시절 최고의 센터였던 이규섭 현 삼성 코치(198cm)가 프로로 오면서 3점 슈터로 변신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코치는 성공했지만 적잖은 토종 센터들이 자리를 잃었다.

이는 초, 중, 고교 및 대학 선수들의 센터 기피 현상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가드, 포워드까지 외인들이 맡으면 농구 꿈나무가 더욱 줄어들 위험도 커진다. 이렇게 되면 단신 외인들은 한국 농구의 축복이 아니라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

< '이제 어느 포지션으로 가야 하나요' KBL 외국인 선수 제도는 학원 농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지난해 전자랜드와 케이티의 농구 교실 모습.(자료사진=KBL) >

하지만 이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KBL의 장신 외인들에 맞서 국내 선수들도 경쟁력을 키워온 만큼 토종 단신들도 한 단계 도약할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재민 KBL 경기본부장은 "사실 농구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에서 국내 장신보다 가드진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때문에 193cm 이하의 외국인 선수와 경쟁을 통해 국내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장훈(207cm), 현주엽(195cm) 등 KBL 초창기에 이어 김주성(205cm), 오세근, 김종규(207cm) 등 토종 빅맨들이 외인들과 맞서면서 국제대회 경쟁력을 키운 것처럼 단신들도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의 생각은 어떨까. 허재 전 KCC 감독(50)과 현주엽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40)이다. KBL 초창기 단신 외인들과 경쟁에서 우위를 보이거나 대등한 경기를 펼쳤던 이들은 신중한 의견을 드러냈다.

먼저 허 감독은 "야인이라 현 KBL 제도에 대해 언급하기가 그렇다"고 말을 아꼈다. 이어 허 감독은 "KBL 초창기 단신 외인들의 등장으로 국내 선수들의 시간이 줄어든 것은 맞다"면서도 "하지만 팀이 이기고 잘 되는 방향으로 선수들을 뽑았고 지금도 그랬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 '토종들도 할 수 있다' 허재 전 KCC 감독(왼쪽)과 현주엽 해설위원은 KBL 초창기 외인들을 능가하는 기량으로 코트를 주름잡았다.(자료사진=KBL) >

현 위원은 지난 시즌에 이어 올 시즌도 해설을 맡은 만큼 더 구체적인 의견을 내놨다. 프로-아마 최강전 중계 때도 마이크를 잡은 현 위원은 "단신 외인들이 볼거리를 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분명히 있다"면서 "반면 국내 선수들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단점 또한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토종들을 생각하기에는 농구 인기가 너무 죽어 있다"면서 "일단 단신 외인들로 농구 열기를 되살린 뒤 제도 변경을 통해 국내 선수 보호와 육성을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덧붙였다.

후배들에 대한 애정어린 조언도 있지 않았다. 현 위원은 "사실 예전에 비해 국내 선수들의 기량이 다소 떨어진 것도 사실"이라면서 "단신 외인 제도 부활로 토종들도 반성을 많이 하고 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충격적인 데뷔전으로 리그에 신선한 돌풍을 예고한 단신 외국인 선수들. 과연 한국 농구에 축복처럼 내려진 발전의 씨앗이 될까, 얇은 저변을 더 고사시킬 재앙으로 다가올 것인가. KBL과 농구계가 더 깊게 생각하고 다가서야 할 부분이다.

글=CBS노컷뉴스 체육팀장 임종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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