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청의 타인의 시선] 사오정 시대, 김병지 700경기의 의미

조회수 2015. 7. 22. 11: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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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단순한 숫자는 아니다.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20대에 '2002 한일월드컵'을 경험한 필자는 한 가지 버릇이 있다. 당시 뛰었던 선수들이 은퇴를 할 때마다 나이를 세어보는 일이다. 홍명보, 황선홍, 유상철 등이 은퇴할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을 나이 대의 선수들이 은퇴하는 시기가 오자 조금씩 위축되기 시작했다. 2015시즌 개막을 앞두고 2살이 많은 설기현이 은퇴했을 때는 '올게 왔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아직도 뛰는 이천수에게는 보이지 않는 응원을 보내곤 한다. 아마 필자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도 나이에 관한 자각을 했겠지만, 최근 3~40대가 느끼는 것과 같은 압박은 없었을 것이다. "'사오정(45세 정년)'도 축복이다라"는 씁쓸한 농담이 난무하는 시대다. 시쳇말로 '스펙이 빵빵'한 후배들이 때로 몰려오는 시대에, 20대를 '2002 한일월드컵'과 보낸 이들은 위축되고 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나이로 46살에도 경기장을 누비는 김병지의 의미는 특별하다. 이미 '사오정'을 넘어선 나이에도 한국프로축구 최고 무대에서 당당히 주전을 지키고 있다. 김병지는 오는 26일 광양전용구장에서 벌어지는 제주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프로통산 700경기 출전을 기록하게 된다. 30년이 넘는 프로축구역사에서 누구도 이루지 못한 대기록이다. 한 시즌에 30경기를 뛴다고 했을 때 24시즌 동안 뛰어야 도달할 수 있다.

기록보다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전남은 현재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2015'에서 3위를 달리고 있다. 자신도 인정하듯이 전성기 때의 운동능력은 보이지 못하지만 경험과 노련미로 팀 수비를 이끌고 있다. 아무리 감독, 코치와 동갑내기 친구라도 실력이 받쳐주지 못했다면 골문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철저한 관리의 힘이고, 그의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의 힘이다. 그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700경기는 그렇게 눈 앞에 다가왔다.

김병지는 40대의 희망이다. 그의 동년배들 중 다수는 승진과 퇴직의 갈림길에서 악전고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세상은 계속해서 각박해지는데 같이 길을 떠났던 이들은 보이지 않고, 많은 것과 이별하고도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는 느낌. 한 선배는 고립무원이라는 단어를 40대에 이해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곳이지만 같은 시점에 출발했던 김병지의 건재함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될 수 있다. "아, 김병지가 아직 뛰고 있구나. 나도 더 뛸 수 있다."

"40대 팬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2008년, 43살의 나이로 2000탈삼진의 대기록을 세운 송진우(현 KBSN 야구해설위원)이 한 말이다. 송진우는 자신이 동년배들에게 힘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40대 회사원 팬들이 내가 던지는 모습을 보면 힘이 된다고 한다. 그 분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마운드에서 은퇴할 때까지 공 한 개 한 개 열심히 던진다"라고 했다. 마흔을 넘긴 선수가 고졸 신인선수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모습은 본 동년배 직장인들은 얼마나 짜릿했겠나.

김병지의 선방을 보는 3~40대 팬들이 기뻐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조카를 넘어 아들뻘 선수들이 날린 강력한 슈팅을 막아내며 "내 뒤에 공은 없다"고 외치는 김병지다. 실점을 하면 10년 전과 같이 불같이 화를 내고, 또 금새 수비선수들을 다독이는 그는 여전히 팔팔한 현역이다. 김병지는 이미 기록과 같은 거창한 것들에는 관심을 끊었지만, 그를 보는 이들의 감회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700경기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그 감정은 이어질 것이다.

선수들에게도 김병지는 특별한 의미다. 몇몇 이들은 "후배들을 위해서 길을 열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한다. 김병지가 은퇴하면 한 명의 후배가 주전 자리를 잡는다는 의미에서는 옳다. 하지만 후배들은 특히 골키퍼들은 김병지가 쉽게 물러서길 바라지 않는다. 한 때는 경쟁자였고, 한 때는 무서운 선배였을지라도 지금 현재 김병지는 그들에게 등대이자 산이다. 김병지가 더 멀리 걸어야 자신들의 희망도 크기 때문이다.

김병지는 얼마 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위에서는 그런 이야기(은퇴)를 많이 한다. 하지만 오히려 권순태, 정성룡, 김용대와 같은 후배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형님, 삼촌 더 오랫동안 뛰어주세요. 저희의 길을 열어주세요'라고 말한다. 내가 더 오래 뛰어야 자신들의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큰 나무 밑에서는 다른 나무가 자라지 못하지만, 큰 사람 밑에서는 여러 사람이 성장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많이 하시던 말씀이다. 알제리 이민자의 아들이었던 지네딘 지단의 은퇴를 정론지인 '르몽드'가 사설을 통해 반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많은 이민자의 후손들에게 지단은 하나의 상징이자 큰 사람이었다. 김병지는 이미 K리그의 큰 사람이다. 지금 뛰는 후배들도 프로축구선수를 꿈꾸는 아이들도 김병지를 보며, 김병지처럼 걸을 것이다.

김병지는 흔들림 없이 걸었다. 김구 선생이 좋아했던 서산대사의 선시처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이. 그래서 오는 26일 전남과 제주의 기념비적인 경기에서 김병지에게 그리고 분투중인 그의 동년배들에게 선물을 안겨주고 싶다. 일정상 경기장에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멀리서 마음속으로라도 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 이주헌 해설위원이 '주간서형욱'에서 만들었던 김병지의 응원가다.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슈팅 막기 딱 좋은 나인데~"

글= 류청 풋볼리스트 취재팀장사진= 한국프로축구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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