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인의 야구는 구라다] '허북왕' 허도환의 진심

조회수 2015. 6. 18. 14:43 수정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현역 시절 꽤 유명한 스타였던 어느 감독의 실제 회고담이다(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분).

학교 졸업하고 갓 입단했을 당시만 해도 장래를 촉망받는 포수였다. 그러나 처음 몇 년간은 게임 뛸 일이 별로 없었다. 이미 팀에는 리그에서 손꼽히는 선수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장-방졸의 관계였다. 당시만 해도 방장은 신이었다. 당연히 방졸은 모든 잡일을 도맡아야 했다. 그 핵심 업무 중 하나가 장비 수입. 즉 고참이 쓰는 배트나 글러브/미트 손질이다. 특히 글러브는 왁스 칠해서, 깨끗하고 말 잘 듣도록 최상의 상태로 해놔야 한다.

기약 없는 후보 생활에 조바심이 난 방졸은 어느 날 몹쓸 꾀를 낸다. 선배 미트의 가죽 끈에 몰래 칼집을 넣은 것이다. 왜 있지 않은가. 포수 미트 엄지와 검지 사이에 덧대어져 있는 부분 - 그걸 연결한 끈에 살포시 칼을 썼다는 것이다.

방졸이 상상한 시나리오는 이렇다. 아무 것도 모르는 선배는 그 미트를 들고 게임을 나간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칼집을 내놓은 끈이 끊어지면서 공을 놓친다. 감독은 노발대발. '저 녀석 당장 빼버려'. 뭐 이런 거다.

각본대로 됐냐고? 천만에. 눈치 챈 방장에게 사랑이 담긴 '어루만짐'을 듬뿍 받고 한동안 찍소리로 못냈다는…. 방장은 어찌 알았을까. 당시만 해도 그런 일은 심심치 않았다는 얘기다. 그만큼 자리 하나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살벌+치열했다는 말씀.

나라 잃은 표정에서 묻어나는 진심

어제(17일) 대전 경기를 보면서 <…구라다>는 그 생각이 들었다. 상대 팀에게 이글스는 어떤 느낌일까. 아마도 좀비 같지 않을까. 처치한 줄 알았는데, 꿈틀꿈틀 살아나고. 이곳저곳 사방에서 스멀스멀 나타나고. 도망가도, 도망가도 끊임없이 쫓아오는 소름 끼치는 존재 말이다.

4-0에서 4-2로 따라붙자 와이번스는 다시 7-2로 벌려놨다. 사실 그 정도면 확인 사살까지 마친 상태다. 그런데 이글스는 7회와 8회 꾸역꾸역 따라붙어 기어이 한 점차까지 만들어놨다.

그리고 9회말. 리그 최고의 안정감을 자랑하는 불펜 투수 정우람도 후달리긴 마찬가지였다. 최진행 몸에 맞는 볼→1사후→ 김태완 좌전안타로 1, 2루. 이제 삐끗하면 게임은 리셋 되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나온 타자가 정범모였다. 한동안 2군에서 지내다가 오랜만에 올라와 맞이한 타석이다. 잔뜩 벼르고 들어선 그는 초구 몸쪽 슬라이더(120km)에 한껏 헛스윙. 하필이면 이 순간을 MBC Sports+가 벤치에 있는 허도환의 표정까지 담아냈다(PD의 깨알같은 센스하고는…).

그 장면을 캡처한 것이 위의 첫번째 사진이다. 일단 그는 언제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덕아웃 맨 앞에 자리했다. 그리고 정범모의 배트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마치 나라 잃은 백성처럼 온 몸으로 안타까움을 방출했다. 이건 뭐 피붙이, 절친, 죽마고우라도 그런 애절함을 보이지는 못할 정도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정범모가 볼카운트 0-2로 몰린 뒤 3구째 높은 볼을 잘 참아내자, 이내 가열찬 물개 박수로 타자를 격려했다(두번째 사진). 아쉽게도 이런 응원이 끝내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한 컷이 보여주는 의미 - 팀(Team)

야신은 선수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하다. 그런 그도 요즘 허도환에게 대해서는 예외다. "성격 참 좋아 보여" "투수 리드가 몰라보게 좋아졌어" "홈런 치는 걸보고 깜짝 놀랐어" "몸에 맞고 1루 나가는 속도는 제일 빨라" "안 데려왔으면 어쩔 뻔 했나 몰라" 등등. 사랑과 예쁨이 듬뿍 담긴 멘트들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는 야신의 취향에 맞는 스타일이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오래 겪은 선수들을 유독 눈여겨 보는 그이기 때문이다.

신고 선수 - 방출 - 트레이드 같은 구구절절한 인사(人事) 용어가 그의 과거에 점철됐다. 스포트 라이트는커녕 팬들이 붙여준 유일한 별명조차(허북이=허도환+거북이) 느린 발에 대한 조롱이었다.

그런 그가 요즘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다. 늘 뒷전으로 밀려났던 후보 인생에 빛이 든 것이다. 그는 말한다. "요즘처럼 야구가 재미있던 적이 없다"고. 먹고 싶은 걸 참아가며 10kg 넘게 살이 빠졌는데도 힘든 기색 하나 없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 그는 여전히 스타가 아니다. 주전도 아니다. 조인성이 돌아오면 어찌될 지 아무도 모른다. 선발은커녕, 2번 포수 자리마저 정범모와 경합할 지 모른다.

다시 시계를 어제 밤으로 돌려보자. 만약 그 타석에서 정범모가 동점타를 쳤다면, 또는 끝내기 2루타라도 쳤다면. 오늘 이글스의 선발 마스크는 누가 쓰게 될까.

일자리는 곧 밥줄이다. 저 친구가 나보다 일 잘하면 내 자리는 없어진다. 그게 사회다. 그게 프로다. 그런데도 저 친구가 잘하라고 박수 칠 수 있겠는가. 헛스윙 했다고 세상 잃은 표정 지을 수 있겠는가.

'허북이'라는 조롱은 이글스에 와서 '허북왕'으로 레벨 업 됐다. 그를 아끼는 팬들이 '王'자를 붙여준 덕이다.

허북왕이 보여준 덕아웃 리액션은 누가 봐도 절실한 곳에서 우러난 진심이었다. 누구보다 승리를 원하는 간절함이 담긴 몸짓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와, 그의 팀이 요즘 왜 대단한 지를 깨닫게 해주는 의미심장한 한 컷이었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