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잊을 수 없는 몰리나의 울부짖음, 그리고 노랑머리들

조회수 2017. 3. 24. 09:31 수정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4회 WBC를 빛낸 결정적 장면들

나라(자치령) 전체 인구래봐야 겨우 370만 명이다. 부산보다 조금 많은 정도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 전체가 온통 난리였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수도 샌 후안 거리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삼삼오오 대형 TV 화면이 걸린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별과 스트라이프가 그려진 국기를 흔들며 열광적인 응원을 펼쳤다.

희한한 것은 그들의 헤어 스타일이었다. 한결같이 짧은 금발 머리다. 혹자는 은발을 반짝였다. 머리숱이 부족한 사람들은 하다못해 수염이라도 물들였다.

덕분에 섬 전체의 미용실은 북새통이었다. 너도나도 염색의 대열에 낙오라도 할까봐 장사진을 쳤다. 대통령 격인 자치령 지사 리키 로젤로도 노랑머리가 됐다. 그러다 보니 나라 전체에 염색약이 동났다. 금색이 부족하자, 오렌지색, 은색도 날개 돋친듯 팔려나갔다. 모두가 ‘팀 루비오(rubioㆍ금발의 스페인어)’가 됐다.

'팀 루비오'가 모여 경기전 의식을 치르고 있다. 푸에르토리코는 이번 대회 화제의 중심이었다.    mlb.tv 화면

네번째 WBC가 끝났다. 종주국의 우승으로 마무리됐다. 마지막 아웃 카운트의 순간 그들은 유니폼을 흔들었다. 양 손으로는 앞에 새겨진 팀 이름(USA)를 가리키며 감격했다. 마운드에는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 조각상을 세웠다.

대회를 주최한 MLB는 크게 고무됐다. 성공적인 흥행 덕분이다. 관중은 처음으로 100만을 넘겼다. 대회 수익 또한 역대 최고인 1억 달러(1121억원)를 넘겼다.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는 “경기마다 열정이 넘쳤다. 이번 대회의 큰 성공을 계기로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대회에 참가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커미셔너의 말처럼 뜨거운 이벤트였다. 모든 팀들이 그랬지만, 특히 푸에르토리코가 인상적이었다. 비록 목표 한 발 앞에서 좌절했지만, 그들은 이번 WBC의 주역이었다. 리더였던 포수 야디어 몰리나는 가장 많은 감동과 얘깃거리를 안겨줬다.

그들, 노랑머리들을 중심으로 4회 WBC의 결정적 장면을 꼽아봤다.  

최고의 스타, 그러나 가장 헌신적인 플레이어   

▶  2라운드 : 푸에르토리코 -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 파크)

9회말 2사. 아웃 카운트는 달랑 1개 남았다. 그러나 스코어는 6-5. 한 점 차이로 턱 밑까지 쫓기는 상황이다. 게다가 미국의 3루 주자(크로포드)가 동점 27미터 앞에서 잔뜩 도사리고 있었다.

다음 타자는 조시 해리슨. 펫코 파크를 가득 메운 관중들은 모두 일어섰다. 그들은 일제히 ‘U. S. A.’를 연호하며 동점을 갈망하고 있었다. 볼카운트 2-2. 디아스의 5구째 슬라이더가 몸쪽으로 파고 들었다. 해리슨의 방망이는 무력하게 헛돌았다. 구심의 오른손이 올라가며 27번째 아웃 카운트가 선언됐다.

순간 펫코 파크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환호와 탄성에 휩싸였다. 하지만 잠시. 그 모든 소음을 압도하는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몰리나였다. 마지막 스트라이크를 포구한 그는 마치 한 마리 야수처럼 포효했다. 벅차 오름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 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5~6초 가량이나 이어진 그의 절규는 중계팀 음향 마이크를 타고 조국의 동포들에게 길게 울려퍼졌다.

몰리나가 2라운드 미국전서 승리한 뒤 감격에 겨워 울먹이고 있다.               mlb.tv 화면

8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차지한 최고의 포수다. 평생 1개도 어렵다는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2개나(2006년, 2011년) 갖고 있다. 평균 연봉만 해도 1,500만 달러(약 168억원)나 된다. 부족할 것 없는 대스타였지만 가장 앞에서, 가장 헌신적으로 플레이했다.


▶ 준결승 : 푸에르토리코 - 네덜란드 (LA 다저 스타디움)

젊은 네덜란드의 패기를 초반에 잠재운 것도 몰리나의 치밀함이었다. 1회 2개의 아웃 카운트가 그의 어깨에서 나왔다. 특히 주릭슨 프로파를 1루에서 잡아내는 장면은 백미였다. 안타 치고, 세리머니하는 빈틈을 매와 같은 눈으로 포착해낸 것이었다. 5회 수비 때도 실점을 막았다. 홈인하는 3루 주자(조나단 스쿱)의 슬라이딩을 완벽한 블로킹으로 차단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따로 있었다. 피 말리는 연장 승부의 끝이었다. 허무한 패배를 당한 네덜란드 선수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그곳에 뜻밖에도 몰리나가 있었다. 블라디미르 발렌틴에게 다가가더니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뭔가 위로와 아쉬움을 얘기하고 있었다.


경기 중이었다. 위협구 시비가 있었다. 머리쪽 높이에 발렌틴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벤치 클리어링 직전까지 갔다. 주위의 만류로 사태는 일단락됐다. 몰리나는 그 점이 못내 마음 쓰였나 보다. 짜릿한 끝내기 승리를 기뻐하고, 환호하기도 부족한 짬이었는데 말이다.

몰리나가 네덜란드전 승리후 발렌틴을 찾아가 위로하고 있다.    mlb.tv 화면

‘더 캐치(The Catch)’를 향한 찬사와 경의  

▶  2라운드 : 미국 - 도미니카 (샌디에이고 펫코 파크)

죽음의 F조. 2라운드 마지막 경기였다. 다저 스타디움행 티켓은 달랑 1장 남았다. 지는 팀은 곧바로 짐 싸고 방을 빼야 한다. 이른바 단두대 매치였다.

2-4로 뒤지던 도미니카의 7회 공격. 선두 타자 매니 마차도가 4구째(카운트 2-1) 실투를 놓치지 않았다. 강렬한 스윙을 만난 타구에는 엄청난 백스핀이 걸렸다. 하늘 높이 치솟으며 맹렬하게 뻗어나갔다.

중견수 애덤 존스가 반응했다. 타구를 힐끗거리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20미터 이상을 달렸을까. 더 이상 질주를 담장이 허용하지 않았다. 순간, 화려한 도약이 이뤄졌다. 1미터 가까이 뛰어오른 것 같다. 펜스를 등지고 왼손을 죽 뻗었다. 관중석에 떨어져야 할 공은 그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투수(아레나도)조차 포기했던 타구였다.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머리를 감싸쥐고 “오 마이 갓”을 외쳤다. 그리고 양 손을 번쩍, 만세를 부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때였다. 타자의 행동이 눈길을 끌었다. 마차도는 1루를 돌며 자신의 홈런이 도둑맞는(?) 장면을 확인했다. 순간 헬멧을 번쩍 벗어들었다. ‘아, 홧김에… 집어던지겠군.’ 그런 수준 낮은 상상력이 발휘될 무렵이었다. 오른손으로 높이 올린 헬멧은 중견수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한동안 중견수를 향한 찬사와 경의의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물론 둘은 같은 소속 팀, 김현수 동료들이다). 

홈런성 타구를 잡아내는 애덤 존스(왼쪽), 여기에 경의를 표시하는 매니 마차도의 모습.    mlb.tv 화면

아직도 WBC에 대한 시선은 뜨뜻미지근하다. 몸 사리고, 요리 빼고, 조리 빼고…. 대충대충, 적당히 하는 이벤트라는 비난은 여전하다. ‘그게 무슨 챔피언십이냐’는 반론도 당연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갈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유니폼 앞에 새겨진 이름을 위해, 자신이 지키는 스포츠의 품격을 위해. 그 열정적인 헌신에는 뜨거운 찬사가 전혀 아깝지 않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