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인의 야구는 구라다] 박해민, 권혁의 백핸드를 무너뜨리다

조회수 2015. 7. 27. 09: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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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민, 권혁의 백핸드를 무너뜨리다

경기 후 이승엽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올해 한화전에서 잘한 기억이 없다. 특히 탈보트 공을 너무 못쳤다. 오늘 직구는 포기했다. 삼진을 먹더라도 체인지업 하나만 보고 타석에 들어갔다. 노린 공이, 노린 코스로 들어와 다행이었다."

참 겸손한 소감이다. 따져보면 그렇다. 다른 타자들이라고 왜 그걸 모르겠나. 탈보트가 왼손타자 만나면 주로 던지는 게 그 공인데 말이다. 그 체인지업이 어디 노린다고 쉽게 칠 수 있는 구질인가. 그것두 하루에 2개 씩이나.

어쨌든 어제(26일) 게임은 이승엽의 홈런 두 방이 압도적이었다. 적어도 전반전까지는 그랬다.

흐름이란 게 참 절묘하다. 6회말 홈 팀이 선두 타자 주현상의 볼넷으로 얻은 추격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곧이은 수비에서 이승엽에게 도망가는 홈런을 맞았다. 3-0. 7회 말 2사가 돼도록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믿는 구석 정근우와 김태균이 힘없이 물러났다. '아, 오늘은 틀렸구나.' 홈팬들의 어깨가 처질 무렵이다. 김경언과 이성열이 백투백 아치를 그렸다. 3-2 한점차. 열대야보다 뜨거운 함성이 그라운드를 덮었다. 그럼. 그래야 마리한화지.

다시 한번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역전의 조짐. 그러나 그 강렬한 기운을 단 한 방에 꺾어 버린 게 있었다. 그건 폭발적인 스윙이 아니었다. 터질 것 같이 격렬한 파열음도 아니었다. 여리디 여린, 살포시 떨어뜨린, 아주 가벼운 번트 타구 하나였다.

또 다시 찾아온 무사 1루

한 점차로 따라붙었다. 마운드는 권혁이다. 기대치는 만렙까지 치솟았다. 한번만 더 막으면, 상대는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차곡차곡. 반전의 시나리오다.

순간,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8회 첫 타자 구자욱의 빗맞은 타구가 행운의 안타로 변했다. 하지만 괜찮다. 전날 경기에서도 몇 번의 무사 1루를 풀어내지 않았나. 번트, 버스터, 강공, 히트앤드런. 모든 경우의 수를 해결했다. 걱정 없다. 빠르고 기민한 내야진이 1단에서 2단 기어로 변속을 시도했다.

상황은 너무나 명확하다. 흐름으로 보나, 타순으로 보나, 틀림없이 보낼 (번트) 것이다. 게다가 권혁은 차분했다. 확인 절차도 잊지 않았다. 초구에 앞서 1루에 견제구 하나. 공격진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한 조심성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타자가 꿈쩍도 않는다. 번트가 아닌가?

수비는 약간 혼란스럽다. 갑자기 '100% 번트 시프트'가 부담스러워진다. '100% 시프트'란 상대가 무조건 번트란 전제 아래 1, 3루수가 모두 극단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공, 또는 페이크라면? 공간이 너무 커진다. 뭔가 애매한 상황에서 권혁이 1구를 뿌렸다.

어랏? 예상과 달랐다. 박해민은 바로 결행했다. 번트는 약간 빠르게 투수 왼쪽으로 흘렸다. 속도와 방향이 절묘했다. 좌투수는 공을 던질 때 몸이 3루쪽으로 쏠린다. 그러니까 권혁의 왼쪽은 역동작이 된다.

중복은 곧 공백을 의미한다

실전 결과는 아시다시피 번트 안타였다. 분명히 잘 준비한 공격 기술이었다. 하지만 역시 수비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완벽한 성공은 거둘 수 없었으리라.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림3>을 보시라. 처음부터 1루수(김태균)는 늦었다. 몇 걸음 들어오다가 이내 포기하고 베이스로 돌아갔다. 반대로 처음부터 적극적인 시프트를 걸었다면? 물론 아웃시키기 쉽지 않았다. 워낙 잘 댄 번트였다. 하지만 실전보다는 훨씬 해볼만했다.

두번째 문제는 중복이다. 1루에서 김태균과 정근우가 겹쳤다. 한쪽이 중복됐다는 건, 다른 쪽에 공백이 생겼다는 뜻이다. 수비 두 명이 한 곳에 몰렸으니, 당연히 빈 자리가 생겼을 것이다. 하필 그 자리가 타구 방향이었다. 권혁이 간신히 멈추지 못했으면, 구자욱을 3루까지 보낼 뻔했다.

정근우는 처음부터 1루 커버를 위해 전력질주했다. 반면 김태균의 전진 동작은 애매했다. 그 작은 헛점으로 박해민이 파고 들었다. 처음에는 바늘 구멍만한 틈이었다. 하지만 바늘 구멍은 순식간에 둑을 무너뜨렸다. 불과 하루 전에만 해도 잘 짜여진 포메이션을 자랑하던 이글스 내야진은 한 순간에 붕괴됐다.

무사에 빠른 주자 2명. 그리고 클린업 트리오로 이어지는 중심 타선. 권혁이 버텨내기는 너무나 악조건이었다. 무려 4실점. 올해 처음으로 삼성의 위닝 시리즈를 지켜봐야 했다. 그의 ERA도 4.35까지 올라갔다.

이 경기를 결정지은 요소는 여러가지다. 탈보트의 체인지업을 담장 너머로 배달한 이승엽의 스윙 2개도 대단했다. 8회 고비에서는 터진 최형우와 이지영의 적시타도 파괴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홈팀을 뼈아프게 만든 건 박해민이었다. 권혁의 백핸드를 아스라이 파고든 번트 하나. 미약하고, 하찮은 '데굴데굴'이 승부의 결정적인 물길을 바꿔놓았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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