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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률의 S담쓰談]KBO 리그, '韓·美·日' 문화 충돌의 용광로

조회수 2015. 5. 28. 03:0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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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달아올랐다. 승부도 승부였지만 두 팀의 기싸움이 팽팽했다. 그라운드 대치 상황이 벌어졌고, 살짝 보기 민망할 정도의 과격한 몸짓과 언성이 오갔다.

27일 창원 마산구장에서 열린 NC-두산의 '2015 타이어뱅크 KBO 리그' 경기에서 벌어진 두 팀의 벤치 클리어링 상황. NC가 7-1로 앞선 7회초 두산 공격 때 1루 땅볼을 친 오재원과 NC 선발 에릭 해커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그라운드 대치도 경기의 일부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벌어지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심코 내뱉은 말에 대한 오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재원을 향했던 해커의 고함은 욕까지는 아니었는데 오해를 부를 여지는 또 있었다. 어쨌든 큰 불상사는 없이 마무리는 됐다.

< '다시 말해봐' 27일 마산 경기에서 벌어진 벤치 클리어링 때 홍성흔, 오재원 등 두산 선수들이 흥분한 모습(위)과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NC 선발 에릭 해커(아래 오른쪽)의 모습.(마산=OSEN) >

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전에도 더러 벌어졌고, 앞으로도 심심찮게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KBO 리그는 오해를 생길 만한 여건이 꽤 잘 갖춰졌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한국과 미국, 일본 등 야구 3국의 문화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아마도 오재원이 부른 타임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7회 선두 타자로 나선 오재원은 볼카운트 1볼-2스트라이크에서 해커의 4구째를 받기 전 타임을 요청했다. 해커는 이미 와인드업 투구 동작에 들어갔지만 구심은 타임을 받아들였다. 이에 오재원은 배터 박스 밖으로 나갔다.

이를 뒤늦게 본 해커는 그러나 투구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포수 김태군이 던지지 말라는 사인을 보냈지만 해커는 그대로 공을 던졌다. 공은 심판 키를 훌쩍 넘어 백네트를 그대로 맞췄다. 투구 동작에 들어갔는데도 타임이 받아들여진 데 대한 불만의 표현으로 볼 수 있었다.

쌓인 감정의 앙금은 다음 순간 솟구쳤다. 해커는 오재원의 1루 땅볼 때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 아웃을 만든 뒤 오재원을 향해 뭐라고 외쳤다. NC 관계자는 해커의 외침은 "타석에 들어가라(Get in the box)!"라고 설명했다. 앞선 상황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는 게 확실했다.

이에 오재원도 폭발해 갈등이 번졌다. 중계 화면에 비친 오재원의 입 모양을 보면 해커의 외침을 욕으로 오해한 것처럼 보인다. 결국 두 팀 선수단이 몽땅 그라운드로 쏟아지게 됐고, 해커를 향해 야구공이 날아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심판진은 두산 장민석이 던진 것으로 판단, 퇴장 명령을 내렸다.

< '형 우리끼리 왜 이래요' 27일 마산 경기에서 벌어진 그라운드 대치 때 다소 흥분한 두산 홍성흔을 NC 손시헌, 이종욱(오른쪽) 등 예전 두산 멤버들이 말리는 모습.(마산=OSEN) >

이 사태를 보면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오재원은 기존에 하던 대로 타임을 요청한 것이었고, 심판은 또 관행대로 이를 받아줬다.

해커는 해커대로 투수에게 부상의 위험이 있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와인드업 동작을 갑자기 멈추게 되면 매커니즘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은 여러 차례 전문가들이 지적한 부분이다.

해커가 외국인 선수, 특히 미국 출신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미국 야구, 즉 메이저리그(MLB)에서는 앞선 상황이라면 심판이 타임을 받아주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투수가 투구 동작을 시작한 경우라면 타자가 타임을 요청하고 배터 박스를 벗어나도 볼카운트가 인정된다. 심판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KBO 리그와는 미묘한 시각 차이가 생긴다. KBO 리그의 심판들은 타자들의 타임에 비교적 관대한 편이기 때문이다. 해커가 비록 KBO 리그 3년차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완전히 이런 부분까지 녹아들진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KBO 리그의 외국인 투수들이 심판의 상대적으로 넓은 '타자의 타임 인정' 아량에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이 더러 보이는 이유다.

< '이것도 문화 충돌과 발전의 과정?' 지난해 욕설 파문을 일으켰던 두산 유네스키 마야(왼쪽)이 사과하자 LG 양상문 감독이 흔쾌히 받아주는 모습.(자료사진=스포츠조선) >

KBO 리그는 미국, 일본과 비교해 묘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각기 뚜렷한 제 색깔을 갖고 있고, 오랜 역사를 통해 전통과 특색이 굳어져왔다. 흔히 빅볼과 스몰볼이라는 큰 특징을 지닌 그들의 야구는 서로 잘 섞이지 않았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KBO 리그는 두 리그의 영향에 한국 야구 고유의 문화까지 매우 독특한 색깔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982년 출범한 KBO 리그는 초창기부터 일본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록과 야구 용어 등에서부터 많이 따왔다. 백인천, 김일융, 장명부 등 일본 야구 출신 선수들이 KBO 리그에서도 맹활약해왔고, 지금도 일본인 코치들이 활동 중이다.

여기에 KBO 리그는 차츰 MLB의 영향도 받게 된다. 특히 90년대 박찬호를 필두로 서재응, 김선우, 김병현, 최희섭 등 한국 선수들의 미국 진출 러시가 이뤄진 게 컸다. MLB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 상황에서 1998년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되면서 미국 야구의 영향은 본격화하게 됐다.

타이론 우즈, 브룸바, 로마이어 등 힘 좋은 용병들의 등장으로 KBO 리그는 국내 선수들까지 웨이트트레이닝이 유행처럼 번졌다. 정교한 일본 야구에 MLB의 호쾌한 빅볼까지 KBO 리그의 재미를 더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한국만의 야구가 형성됐다.

2006년과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대표적이다. 한국 야구는 일본보다 세밀함은 떨어졌지만 힘의 우위로 극복했고, 미국 등 MLB권 국가에 다소 밀리는 파워는 정교함으로 벌충했다. WBC 4강과 준우승, 올림픽 금메달은 한국 야구가 갖는 혼합과 융화의 발전적이고 모범적인 사례였다.

< '한미일 야구의 결정체?'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야구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낸 뒤 기뻐하는 모습. MLB에 진출한 류현진과 KBO 리그 베테랑 진갑용, 일본에서 활약 중인 이대호, 오승환 등의 얼굴이 눈에 띈다.(자료사진=노컷뉴스) >

한국 야구의 문화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국과 일본 야구의 요소에 한국 고유의 선후배 문화까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섞여 있는 KBO 리그만의 색깔 말이다.

만약 27일 경기에서 투수가 해커가 아닌 국내 선수였다면 갈등상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국내 투수라면 으레 그러려니 하고 투구 동작을 익숙하게 멈췄을 것이고 아무렇지 않게 베이스 커버를 하고 넘어갔을 테다.

한국 야구만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같은 날 대전 한화-KIA의 경기에서 나타났다. 한화 선발 배영수가 잇따라 던진 몸에 맞는 공에 KIA 주장 이범호가 잠시 발끈했지만 포수 조인성이 말리면서 일단락됐다.

배영수가 몸쪽 승부를 즐기는 공격적 투수임은 익히 알려진 터. 여기에 조인성의 다독임에 이범호는 1루로 향하는데 한국 야구의 선후배 문화를 잘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 '범호야 나 봐서 참아' 27일 대전 경기에서 KIA 이범호(가운데)가 한화 투수 배영수의 사구에 발끈하자 포수 조인성(왼쪽)과 심판이 말리는 모습.(대전=KIA 타이거즈) >

한국과 미국 야구 문화의 충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야구의 특성도 여전한 이질감 속에 KBO 리그에 녹아드는 과정이 현재 진행형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야신' 김성근 한화 감독일 것이다.

재일교표 출신인 김 감독은 일본 야구가 갖는 대표적 특징인 스몰볼의 대명사다. 김 감독이 즐기는 희생번트와 도루 등의 작전 야구다. 여기에 김 감독은 구단 운영에 절대적인 비중을 사령탑이 차지하는 일본식 문화에 익숙하다. 최근 KBO 리그에 불어닥치고 있는 프런트 야구와는 상반된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김 감독의 야구는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린다. SK 시절부터 김 감독이 보여온 플래툰 시스템이나 세밀하게 진행되는 투수 교체 등을 승부사의 전술로 칭찬하는 팬들이 있는가 하면 선이 굵지 못하다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다. 때로는 그라운드에서까지 김 감독이 추구하는 야구와 문화는 다른 팀과 강하게 충돌하기도 한다.

< '김성근과 KBO의 충돌?' 김성근 감독(가운데)이 이끄는 한화는 올 시즌 롯데(아래), 케이티(위)와 불문율을 놓고 갈등 양상을 벌이기도 했다.(자료사진=한화, KBS N 스포츠 캡처) >

현재 KBO 리그는 어쩌면 한국은 물론 미국, 일본 야구 문화가 실제 경기처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들 각 나라의 야구를 경험한 선수, 감독, 관계자들이 이처럼 모두 모여 활발하게 활동하는 국가는 전 세계에서도 한국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MLB에서 KBO 리그 출신 선수들의 진출은 이제 막 걸음마 단계고, 일본 리그에서도 한국 선수들이 맹활약하지만 그들의 문화까지 영향을 미치기에는 숫자가 적고, 감독, 코칭스태프 등 관계자들의 진출은 아직까지는 미미하다.

그런 점에서 KBO 리그는 하나의 펄펄 끓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다. 세 나라의 야구와 문화가 뜨겁게 경쟁하면서 서로 닮거나 내치며 섞이는 과정을 겪고 있다. 오재원과 해커의 충돌도 아쉬움이 남지만 어쩌면 반가운 부분도 있는 것이다.

각 나라의 야구와 문화가 특징이 있기에 '로마에서는 로마 법을 따르라'는 말만 앞세우기도 쉽지 않다. 어느 문화가 더 옳고 그르며 우위에 있다고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대부분 KBO 리그의 외국인 선수들은 한국 야구 문화를 따르지만 이들의 비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 야구가 국제무대에서 이뤄낸 빛나는 성과처럼 KBO 리그의 수준과 문화도 더 발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성숙한 결과물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국 야구 전통의 이면에 바람직하지 못한 불순물과 외래 문화의 부작용 등은 녹여내고 장점들만이 순수한 결정체로 남기를 말이다.

글=CBS노컷뉴스 체육팀장 임종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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