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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청의 타인의 시선] '자진 사퇴'가 없어야 K리그가 산다

조회수 2015. 5. 22. 10:1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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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 후 111일만에 사퇴라니…"

21일 자진 사임한 조진호 대전시티즌 감독의 소식을 듣고 기록을 찾아봤다. 개막 후 얼마 되지 않아 사임한 이들을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올림픽대표팀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박성화(부산아이파크, 16일)를 제외하더라도, 150일(5달) 안에 그만 둔 이들이 5명이나 됐다.

"그게 말이 자진 사임이지…"

조 감독과 대전의 결별처럼 양측의 말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양측의 이야기가 엇갈린다. 축구계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으로 '자진사퇴 형식을 한 경질'이다. 구단에서 감독에 강한 압박을 가해 지휘봉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구단이 잔여연봉을 주지 않기 위해 이런 방법을 사용할 때도 있다.

결정권은 구단에 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결정권을 사용하는 시점과 방법이다. "팀을 제대로 만들려면 적어도 3년이 필요하다." 이 말은 일종의 명제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지휘봉을 잡고 리그에서 채 10경기를 치른 감독이 스스로 그만둘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황보관은 FC서울에서 7경기, 당성증은 대구FC에서 8경기만 치르고 지휘봉을 내려 놓았다.

명장이라 인정받는 루이스 판 할 감독도 2014/2015시즌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감독을 부임하면서 "올 시즌에는 우승이 어렵다"라고 했다. 라다멜 팔카오, 대니 블린트, 앙헬 디마리아를 영입하고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첼시가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지만, 부임 후 한 시즌 만에 자신이 바라는 축구를 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판 할도 그런데, 지휘 경력이 일천한 젊은 지도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좋은 선수가 아니라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는 시간이다. 시간이 부족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일정 시간은 당신의 마음대로 해보시오. 계속 져도 부담 갖지 마시오"라는 말이 필요한 것이다.

국내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계약 단계에서부터 지도자에 불리한 조항을 넣는 경우도 있다. 프로가 성적으로 말한다는 걸 부정하고 싶은 게 아니다. 경험이 적은 감독을 데려다가 바로 좋은 성적을 거두리라 기대하는 건 과욕이다. 바르셀로나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2군 감독을 성공적으로 마친 주제프 과르디올라 정도에게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지도자에게 단 시간에 성공하라는 압박을 주면, 또 다른 역효과가 나온다. 축구가 재미 없어 진다. 이기는 축구가 아니라 지지 않는 축구를 할 수밖에 없다. 승점을 따지 않으면 목이 날아가는 상황에서 어떤 배짱 좋은 지도자가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있겠나. '올 시즌은 일단 이렇게 넘기고 다음 시즌에 잘해보자'라며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

현실과 타협해 살아남더라도, 그 다음 시즌에 멋진 축구를 시도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구단과 지도자 모두 '지난 시즌보다는 잘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공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승점에 더 연연하는 축구를 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이런 상황이 되면 감독에 따른 축구의 편차는 매우 적어진다. 감독들이 모두 지지 않는 축구를 기반으로 전술을 운용한다고 생각해보라. K리그는 안정적으로 경기를 하는 팀들로 채워질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게 아니다. 결과적으로 누가 지휘봉을 잡아도 같은 축구를 구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선택하는 이들은 인물에 집착하게 된다.

지휘 능력에 상관없이 현역 시절을 화려하게 보냈던 이들이 감독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비약이 아니다. 이미 K리그의 현실이다. 최강희 전북현대 감독, 김학범 성남FC 감독이 조명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팀 감독들은 하나 같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이다. 이른바 '비주류 선수'였던 이들이 감독 생활을 잘하는 게 K리그에서는 특별한 일이다.

인물에 대한 집착은 다른 부작용도 몰고 온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른바 비주류 출신 지도자들은 구단과의 계약 단계에서부터 자신의 의견을 펴기 어렵다. 유명 선수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기회가 다시 찾아올 확률이 낮다고 생각 하게 된다. 지휘봉을 잡으면 뜻을 펼치기 어렵고, 제안을 거절 하면 꿈을 펼치기가 어렵다.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경험이 많은 한 중견 감독을 만났을 때도 이런 주제가 도마에 올랐었다. 그 감독은 분개했다. "요즘 젊은 감독들은 문제야. 구단에서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면, 당차게 거절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냥 넙죽 받거든. 그러면 결과적으로 구단에 종속 되는 거야. 구단이 구단의 지시를 잘 따르고, 내치기도 어렵지 않은 이들을 찾는 게 근본적인 문제지만 말이야."

한국 축구계에서 지도자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도자를 키우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기에 사실상 검증이라는 걸 하기도 어렵다. 지도자를 교육하고 검증하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니 구단들은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다. 누굴 써도 똑같다면 "기왕이면 다홍치마"를 외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지도자 교육과 검증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도자가 살지 못하면 K리그도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지도자에 시간과 운신의 폭을 주지 않으면 팬들에게 외면 받는 축구밖에 할 수 없다. 하부 구조를 바꾸는 노력을 기울이는 동시에 상부 구조에 있는 K리그 지도자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 7~8경기만 치르고 '자진 사퇴'하는 젊은 지도자는 없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글= 류청 풋볼리스트 취재팀장

사진=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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