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즈버러 참사 26주년의 기억을 '기억'하자

조회수 2015. 4. 16. 09:1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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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라. 그러나 잊지 말라.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건립된 추모 박물관 야드 바솀 출입구에 걸린 문구다. 2층 전시실에는 "망각은 포로 상태로 이어지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라는 경구가 새겨져 있다. 인간의 힘으로 벌어진 사건을 돌릴 수는 없으나, 기억하면 아픈 역사가 재발하는 것은 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기억은 수동적인 최소한의 행위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이다.

우리와 먼 이야기는 아니다. 축구는 사회와 동떨어진 단독자가 아니다. 축구계에서도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있다. 2014년 4월 15일(이하 현지시간)로 26주년을 맞이한 *힐즈버러 참사를 대하는 리버풀과 에버턴 그리고 영국의 방식은 분명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억이 어떠한 힘을 갖는지 보여주고 있다. 26년 전인 1989년 96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를, 이들은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다. 희생자를 기리기는 분위기도 여전하다.

리버풀은 참사 26주년 당일 공식홈페이지 첫 화면에 희생자 96명의 개별 사진을 모두 실었다. 희생자들의 사진이 바둑판처럼 박히고 가운데 추모의 성화가 들어간 이미지를 클릭하면 본문을 만날 수 있다. 본문에는 희생자 전원의 사진과 이름이 기재돼 있고, 클릭하면 더 많은 정보를 볼 수 있도록 했다. 26년이 지난 사진이라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지만, 구단과 팬들이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현재 팬과 당시 희생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리버풀은 크지 않은 도시다. 2012년 기준으로 인구가 55만 명 정도다. 26년 전 96명의 희생자가 있었다면 멀지 않은 친지나 친구 중에 누군가가 변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잘 알려졌듯이 리버풀의 주장인 스티븐 제라드도 사고로 사촌을 잃었다. 제라드가 지난 2013/2014시즌 34라운드 노리치시티(2014년 4월 14일)와의 경기에서 골을 넣은 후 눈물을 흘린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 희생당한 사촌을 떠올렸다.

이들의 사례로 보면 기억이 어렵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사고 당시에는 모든 문제가 리버풀 훌리건 때문이라는 분석과 보도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더선'은 '진실'이라는 제호의 기사에서 일부 리버풀팬들이 망자의 지갑에서 돈을 훔치고 경찰을 폭행했다는 오보(당시의 일로 리버풀에서는 지금까지도 '더선' 구독율이 다른 지역보다 낮다. 제라드도 '더선'과는 접촉을 꺼린다.)를 내기도 했다. 경찰당국과 리버풀 시당국도 훌리건을 주범으로 몰아갔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리버풀 시민들은 희생자와 참사를 잊지 않았다. 진상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2012년에는 진상보고서를 펴냈다. 당시 경찰은 제대로 현장을 통제하지 못했다. 사고를 키운 것은 마가렛 대처 총리가 훌리건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경기장에 설치한 측면 철조망이 사고를 키웠다. 팬들을 서로 분리시키기 위해 경기장에 설치한 측면 펜스는 끔찍한 압사 사고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 펜스만 없었다면 사고는 그렇게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41명이 응급조치를 제대로 받지 못해 숨졌다는 조사결과도 발표했다. 진상보고서가 나온 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하원 연설에서 '두 번의 부정'에 대해 유가족에 사과했고, 영국축구협회도 사과문을 냈다.

진상이 밝혀진 것은 리버풀뿐 아니라 영국사회 전체가 힐즈버러 참사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 더비 중에서 가장 경고와 퇴장이 많이 나온다는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리버풀의 상대인 에버턴만 봐도 분위기를 잘 알 수 있다. 에버턴은 맞수를 위해 참사 26주년 당일 홈페이지 메인에 추모를 위한 이미지를 올렸다. 9번이 새겨진 에버턴 유니폼을 입은 소녀와 6번이 새겨진 리버풀 유니폼을 입은 소년이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을 게재했다. 96명의 희생자를 추모한다는 뜻이다. 지난 시즌에는 리버풀의 최대 라이벌 맨체스터유나이티드도 추모에 동참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영국 사회 전반의 성숙도를 볼 수 있다. 자주하는 이야기지만 축구는 생의 전부가 아니다. 벨기에의 전설인 에릭 게레츠의 말처럼 세상에는 "축구보다 중요한 게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경기장 안에서 승리를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앙숙일지라도, 가장 중요한 가치(생명, 자유, 이웃사랑 등등)에 대해서는 손을 잡는 게 골자다. 축구는 승자가 하나일 수밖에 없는 제로섬게임이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얼마 전 브리스톨시티의 6세 팬 오스카 파이크로프 군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견원지간인 브리스톨로버스팬과 함께 런던 웸블리 구장까지 걸었던 일도 있었다. 라이벌 감정보다 한 소년의 미래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기억은 힘이 세다. "기억하자", "기억해주세요"는 단순히 공허한 구호가 아니다. 어떤 사건 혹은 인물을 잊지 않았을 때와 잊었을 때의 결말은 확연히 다르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일본만화 '원피스'에서 명대사로 꼽히는 부분이 있다. 자신을 죽이려는 적들을 앞에 두고 닥터 히루루크가 남긴 유언이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총알이 심장을 꿰뚫었을 때? 아니다. 불치병에 걸렸을 때? 아니다. 독버섯 스프를 마셨을 때? 아니다. 사람들에게 잊혀질 때다. 내가 사라져도 내 꿈은 이어진다."

우리는 이들이 기억하는 방식을 기억해야 한다. 리버풀 구단은 96명의 희생자 사진 밑에 자신들의 응원가 제목을 써 놓았다.

당신들은 절대 홀로 걷지 않으리. You'll never walk alone.

글= 류청 풋볼리스트 취재팀장사진= 리버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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