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영의 마니아썰]리디아 고의 깨달음-박인비와 나의 차이

김세영 기자 2015. 8. 1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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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 고 자료사진.박태성 기자

며칠 전 캐나다의 17세 소녀 브룩 헨더슨이 캠비아 포틀랜드 클래식에서 8타 차의 압도적인 우승을 거뒀다. 언론은 그에게 '천재 소녀'라는 수식어를 붙여줬다. 한때는 나, 리디아 고에게 붙었던 수식어다. 난 그 대회에서 공동 46위를 했다. 그저 그런 성적이다. 요즘엔 나의 천재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난 여전히 세계 랭킹 2위다. 만 18세가 되기 전 최연소 '넘버1' 자리에 올랐고, 시즌 상금 랭킹도 2위를 달리고 있으니 모두들 부러워할 만한 성적이다. 하지만 자세히 따지고 보면 최근에는 뭔가 될 듯하면서 되지 않는 분위기다. 딱히 못 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잘 치는 것도 아닌, 그런 어정쩡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한땐 최고의 선수였지만 지금은 그냥 정상급 선수 중 한 명이 돼 버렸다. 우승 맛을 못 본 지도 4개월째다. 이럴 때가 참 난감하다. 딱 하나 좋은 점은 언론의 관심권에서 조금 벗어났다는 거다.

리디아 고의 마지막 우승은 지난 4월 스윙잉 스커츠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지난 4월 시즌 첫 메이저 대회였던 ANA 인스퍼레이션부터다. 당시 모든 언론과 팬들은 나를 주목했다. 연속 언더파 라운드 기록을 두고서였다. 골프 역사에 또 다른 기록이 탄생한다며 다들 호들갑이었다. 어쨌든 대회 1라운드에서 1언더파를 쳐 29라운드 연속 언더파 스코어를 적어냈다. 어릴 적 우상으로 삼았던 안니카 소렌스탐의 기록과 타이였다. 뿌듯하고 벅찼다.

하루만 더 언더파를 치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골프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내 이름을 하나 더 새길 수 있었다. 각종 인터뷰에서는 부담감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 속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잃을 게 없는 상태였기에 무서움이 없었지만 올해 시즌 개막과 더불어 세계 랭킹 1위에도 오르고, 그동안 각종 기록을 작성하다 보니 이젠 하나 둘 지켜야 될 것들이 생겼다. 동시에 '이젠 빼앗기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라운드 전 코치인 데이비드 레드베터 아저씨는 "기록 따윈 의식하지 말고 '지금까지 초밥을 몇 개나 먹었나'쯤으로 생각하라"는 쪽지를 건넸다. 엄마를 비롯한 주위 모든 사람도 똑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말이 나를 더욱 옭아맸다. 결국 2라운드에서 1오버파를 쳐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후유증은 이어져 3라운드와 4라운드에서도 연속 오버파를 기록했다. 최종 순위는 공동 51위.

그 전까지 6개 대회에 출전해 우승 한 번에 준우승 두 번을 거뒀고, 나머지 대회에서도 모두 톱7위 안에 입상했던 나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무아지경의 경지인 '존'(Zone)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ANA 인스퍼레이션 때 존에서 빠져 나온 이후 곧바로 다음 대회에서 우승을 하긴 했지만 예전 같지 않다.

리디아 고는 항상 "세계 랭킹 1위에 대한 부담감은 없다. 그냥 즐겁고, 게임도 즐기려 한다"고 했다. AP뉴시스

남들은 "내 마음 속에 구렁이 몇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고들 하지만 그건 날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마음속으론 떨리지만 겉으로 내색만 하지 않을 뿐이다. 뭔가 큰 타이틀이 걸려 있으면 더 하다. ANA 인스퍼레이션 때는 최다 언더파 라운드 타이틀 외에도 첫 메이저 우승이 걸려 있었다. 심적 부담이 이중이었다.

시즌 두 번째 메이저 대회였던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 때도 그랬다. 명색이 세계 랭킹 1위이고, 정규 투어를 뛴 지도 2년째가 됐으니 내 커리어 상으로는 이젠 메이저 우승컵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부담이 컸다. 결국 둘째 날 3오버파를 치며 컷 통과에 실패했다.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컷 탈락했다.

(박)인비 언니와 나와의 차이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인비 언니는 심리적 압박감이 클 법한 상황에서 오히려 집중력을 발휘한다. 내가 컷 탈락했던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에서는 단일 메이저 3연패라는 대기록 달성을 앞두고도 흔들리지 않고 목표를 달성했다. 커리어 그랜드 슬램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한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도 그랬다.

박인비는 "요즘 어린 선수들이 게임을 즐긴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솔직히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인비 언니가 커리어 그랜드 슬램 달성 후 한국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들었다.

"나는 바닥까지 가봤다. 그땐 골프를 그만두려고까지 했다. 그렇게 바닥을 쳐봤기에 이젠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작은 슬럼프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요즘 어린 선수들도 각종 인터뷰에서 게임을 즐기려고 한다고 말한다. 정말 그들이 진짜 즐기는 게 어떤 건지 알고 말하는지 궁금할 때도 있다. 물론 이해하고 있다면 다행이다."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나도 세계 랭킹 1위에 올랐을 때 "심적 부담감은 없다. 그저 랭킹 1위라는 게 재밌고, 게임을 즐기려고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정말 내가 즐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건 코치 아저씨와 엄마 등 주변 어른들의 말을 그냥 녹음기처럼 재생한 것뿐이었다.

이번주 캐나다여자오픈에서 리디아 고가 다시 천재성을 발휘하며 정상에 오른다면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다.

이번 주 대회는 캐나다 여자오픈이다. 내가 2012년 우승하면서 LPGA 투어 역대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던 이벤트다. 당시 캐나다 현지 언론은 대회장이 있는 도시 코퀴틀람의 철자가 'Coquitlam'이 아니라 'Koquitlam'이 됐다고 보도했다. 나의 성인 고(Ko)를 따서 쓴 것이다. 이듬해에도 그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나와는 인연이 깊다.

이번 대회가 분위기 반전의 기회다. 그걸 발판으로 다시 '존'에 들어가야 한다. 점점 둔해지는 천재성도 다시 날카롭게 다듬어야 한다. 그나저나 인비 언니는 분명 잃을 게 많은 데도 잃을 게 없다고 했다. 가끔은 득도한 선승(禪僧)을 보는 듯하다. 그런 깨달음은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진정 마음까지는 비우기가 벅차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 했는데, 난 아직 만 18세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이 글은 리디아 고의 입장에서 픽션과 논픽션을 섞어 일기 형식으로 쓴 겁니다.

김세영 마니아리포트 국장 freegolf@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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