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F칼럼] 파퀴아오, 영웅에 가장 근접한 현대인

조회수 2015. 5. 1. 13:5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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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경, 필리핀 남쪽 민다나오 섬 중부의 주민 로살리오 파퀴아오는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로 떠나버렸다. 홀몸이 된 아내는 여섯 자녀를 홀로 키워야 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800달러가 채 안되던 시절 필리핀에서 여자가 혼자 아이들 여섯명을 건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부모님이 이혼할 당시 12살이었던 네째아들 매니 파퀴아오는 좌판을 매고 거리에서 도넛과 담패를 팔았다. 그렇지만 그것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피퀴아오의 모친은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바랬다. 남편이 있을 때 까지만 해도 아들을 카톨릭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파퀴아오는 제네럴 산토스 시티에서 천주교의 사제가 되기위한 교육을 받던 도중 친구를 통해 복싱을 처음으로 접했다. 복싱에 흥미를 느꼈고 재능도 인정받았던 파퀴아오는 가세가 기울고 더이상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어졌을 때 마닐라 행 선편에 몸을 실었다. 복서가 되기 위해서였다.

마닐라에서의 생활은 노숙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도장에서 숙식을 하게 되었고 식비를 벌기위해 막노동을 했다. 프로 데뷔는 95년이었다. 데뷔 초기 16세의 파퀴아오는 주니어 플라이급에 미달되는 체중이었고 체중을 맞추기 위해 속옷에 금속을 넣고 저울대에 올랐다. 아마추어에서 60승 4패의 전적을 쌓았던 파퀴아오는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즉각 좋은 반응을 얻었다. 빠르고 공격적이었으며 주먹이 강했기 때문이다. ESPN의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한 파퀴아오는 당시 대전료로 겨우 2달러 가량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그래도 필리핀은 쌀값이 싸서 견딜만 했다'며 미소를 지었다.

1998년 12월 23승 1패 14KO 의 전적을 기록중이던 파퀴아오는 태국 원정 타이틀전에서 33승 1패 24KO의 전적을 가진 WBC 플라이급 챔피언 차트차이 사사쿨을 8회 KO로 꺽고 첫 벨트를 허리에 감았다. 타이틀과 획득과 함께 중대한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12세 이후 파퀴아오는 항상 영양실조 상태였다. 그렇지만 세계 챔피언이 되는 과정에서 충분한 식사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체구가 급격히 성장하는 원인으로 작용해 이후 체중조절에 큰 문제를 겪게 된다.

1999년 9월 파퀴아오는 태국으로 원정 방어전을 떠나 메드고엔 싱수라트라는 도전자를 상대했다. 그렇지만 체중조절에 실패하고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링에 오른 파퀴아오는 3라운드 KO패로 벨트를 풀었다. 이 패배는 파퀴아오게 중대한 두가지 결단을 내리게 만든 계기였다. 첫째는 체급의 상향이었고 두번째는 미국무대로의 진출이었다.

한번에 두체급을 올려 슈퍼 벤텀급으로 간 파퀴아오는 이후 6연속 KO승을 기록한다. 이 당시 상대들도 모두 훌륭한 선수들이었다.

99년 12월 레이난테 자밀 당시 41승 5패00년 3월 아넬 바로틸로 22승 9패 3무00년 6월 채승곤 23승 무패00년 10월 네달 후세인 19승 무패01년 2월 센리마 테츠토라 19승 4패 3무01년 4월 웨티야 삭무앙클랑 40승 3패

슈퍼 페더급에서의 안착이라는 과제는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영양실조와 체급의 족쇄에서 풀려나면서 파퀴아오의 파괴력이 급성장 했던 것이 전적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미국행은 난항이 거듭되었다. 그 어떤 체육관에서도 필리핀산 경량급 선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직접 도장들을 돌며 테스트를 받아봤지만 결과는 다를 바 없았다. 파퀴아오 일행은 필리핀 복서가 있다는 LA 헐리우드의 한 체육관을 마지막으로 방문하기로 했다. 근처의 한 모텔에서 잠을 자고 파퀴아오 일행은 와일드카드 짐을 방문했다.

와일드카드 짐의 헤드 트레이너는 프레디 로치다. 잔혹한 복싱광 아버지 아래에서 어린시절부터 복서로 키워진 그는 조 프레이저의 스승이었던 에디 퍼치의 문하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22명의 챔피언을 빚어낸 대가 퍼치는 로치에게 빠르지 않아도, 길지 않아도, 펀치가 세지 않아도 싸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것은 맞는것을 두려워 말고 들러붙어 수십센티미터 거리에서 구사되는 쇼트펀치를 끝없이 쏟아내 후반에 승부를 보는 방식이었다. 78년에 프로에 데뷔한 그는 86년까지 53전을 싸웠다. 하드 펀처 보비 챠콘, 차베즈와 싸웠던 그렉 호겐, 레젼드중 한명인 헥터 카마쵸등과 대전한 경험이 있지만 로치는 챔피언급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너무 잦은 경기를 가지고 너무 많이 맞아 부쩍 반사신경이 느려진 로치에게 퍼치는 은퇴를 권고했다. 이에 마음이 상한 로치는 스승의 곁을 떠나 선수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마지막 6경기에서 2KO가 포함된 5패를 겪은 로치는 다시 스승의 곁으로 돌아가 트레이너로써의 새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그의 첫 작품은 버질 힐이었다. 후일 라이트헤비급, 크루저급 챔피언으로 성장하게 되는 힐은 80년대 후반, 로치의 신참 트레이너 시절에 대해, '저의 모든 일을 그가 다 챙겨주었고 처음부터 그가 훌륭한 트레이너가 될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라고 말했다.

2001년경, 로취는 선수생활로 인해 입은 파킨슨씨병과 목근육의 이상 경직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증상은 점점 심해졌지만 깊어지는 병세만큼 그가 키워낸 챔피언의 숫자도 늘어갔다. 파퀴아오를 만날당시 그는 이미 15명의 챔피언을 길러낸 명조련사였다. 첫만남에서 로취는 파퀴아오의 미래를 보았다. 그는 파퀴아오의 가장 중요한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피드가 좋은 선수들은 많습니다, 파워가 좋은 선수들도 많아요, 하지만 둘 모두를 가진 선수들은 극히 드뭅니다. 파퀴아오에게는그 지극히 드문 조합이 있었습니다. 움직임 면에서 약간의 보완을 하고 몇가지 트릭만 가르쳐 주니까 재능이 바로 드러났어요."

2001년 6월, 파퀴아오는 남아공의 IBF 슈퍼 밴텀급 챔피언 레드와바의 상대를 대신에 2주만에 오퍼를 받고 긴급 대타로 투입되었다. 이날의 메인 이벤트는 당시 복싱 최고의 슈퍼스타 오스카 델라호야의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매치였다. HBO PPV 를 통해 생중계되는 큰 무대에서 파퀴아오의 미국 데뷔전이 이루어진 셈이다. 경기 직전 해설진의 래리 머쳔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퀴아오의 공동 메니저 중 한명인 마틴 엘로디는 필리핀에서 가장 존경받는 복싱 레전드인 플래시 얼로디의 아들입니다. 만약 이 파퀴아오라는 선수가 플래시 얼로디와 조금이라도 닮은 구석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 진짜 싸움을 보게 될겁니다."

파퀴아오는 머쳔트의 말대로 얼로디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것이 조금 많아서였던지 레드와바에게는 조금 박찼고 진짜 싸움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구타양상으로 전개되면서 6라운드 KO승을 거두었고 미국 데뷔전의 승리와 두번째 체급의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2001년 11월 파퀴아오는 아가비토 산체스와 WBO-IBF 슈퍼 밴텀급 통합 타이틀전을 가졌지만 무승부로 돌아섰다. 이후 2003년까지 세명의 도전자를 모두 KO로 때려잡은 파퀴아오에게 세계가 초대장을 보냈다.

이 당시 슈퍼 밴텀급-페더급은 마르코 안토니오 바레라와 에릭 모랄레스의 양강체제였다. 두 선수 모두 멕시칸이었다. 두 선수 모두 힘과 기술 또 체력 정신력 맷집등 모든 면에서 나무랄데가 없는 명챔피언들이었고 2000년 모랄레스가 바레라를 자신의 36연승 제물로 삼으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2002년 바레라가 41연승 중이던 모랄레스에게 첫 패배를 안기며 복수에 성공했다. 두 선수의 24라운드는 그렇지만 두대체 누가 이겼는지 아무리 봐도 판단하기 힘들 정도로 팽팽했다. 판정은 단지 결과였을 뿐 팬들도 두 선수 스스로도 승부가 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2003년 11월 57승 3패 1ND 40KO의 그 바레라가 매니 파퀴아오를 대전상대로 지목했다. 37승 2패 1무 28KO를 기록중이던 파퀴아오는 물론 세계무대에서는 아직 무명이었고 팬들도 전문가도 도박사들도 바레라의 넉넉한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이 경기에는 링 페더급 타이틀과 페더급의 리니얼 타이틀이 걸려있었다. 파퀴아오 인생 최초의 밀리언달러 파이트이기도 했다.

파퀴아오는 자신이 기거하던 체육관에가서 어린시절을 돌아본 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경기 전날에는 전 로치와의 인연이 이루어 지던 전날밤 묵었던 모텔에서 1박을 했다.

2003년 11월, 바레라와 파퀴아오의 경기 직전 래리 머쳔트는 다시한번 흥미로운 언급을 했다.

"바레라는 파퀴아오에게서 젊었을 때의 자신을 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과연 본인의 젊은시절 같은 파퀴아오의 화력을 기교로 피해나갈 수 있을까요? 아니면 파퀴아오가 걸어오는 정면승부에 말려들까요?"

결론은 후자였다. 파퀴아오는 첫라운드에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적중시키고 수비동작으로 돌아가는 도중 중심을 잃고 넘어졌는데, 주심이 그것을 녹다운으로 판정하는 바람에 귀중한 2점을 잃으면서 경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2라운드 부터 파퀴아오는 좌우 상하단으로 골고루 펀치를 뿌려대기 시작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그리고 3라운드 강력한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적중시키며 파퀴아오가 1라운드의 빚을 갚았다. 61전을 싸워온 바레라의 생애 네번째 다운이었다.

속개된 3라운드, 파퀴아오는 끝장을 보기위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렇지만 바레라의 냉정한 카운터가 터지기 시작했고 난타전이 전개되면서 관중석에서는 엄청난 함성이 터져나왔다. 4라운드 부터는 힘의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바레라는 방어에 급급했고 카운터 회수가 점점 잦아들었다.

6라운드에는 파퀴아오가 벨런스를 잃은 바레라의 안면에 가벼운 레프트-라이트를 적중시켜 다운을 뺐았다. 그러나 심판은 그것을 슬립다운으로 판정했으며 해설진에서는 냉소가 터져나왔다. 1라운드의 다운 판정이난 상황은 슬립이었고 6라운드의 슬립다운 판정은 사실 진짜 다운이었기 때문이다.

초반 이후 모든 라운드에서 우세를 점한 파퀴아오는 후반이 되어서도 스테미너를 유지했다, 그리고 강타보다는 짧고 정교한 연타로 바레라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11라운드, 바레라의 눈가에서는 출혈이 점점심해졌고 파퀴아오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로프에 기댄채 파퀴아오의 맹공에 속절없이 당하던 11라운드 후반, 바레라의 코너맨은 레프리에게 경기의 중단을 요청했다. 바레라의 생애 첫 KO패 였고 파퀴아오는 아시아인 최초로 3체급을 달성했다.

파퀴아오는 이 경기의 대전료를 수령한 후 자신의 고향마을에 창고를 빌려 쌀과 생필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동내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것들을 본인의 손으로 일일이 나누어 주었다. 또 어린시절 자신이 기거하던 체육관에는 어린 선수들을 위한 기숙시설을 지어주었다. 필리핀 정부는 파퀴아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필리핀에서 파퀴아오 현상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이 시기 부터다. 그의 경기가 하는 날에는 길거리에서 사람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바레라와 모랄레스의 전장이 페더급으로 이동하고 파퀴아오도 합세하면서 페더급의 맹주로 떠오르고 있던 또한 명의 멕시칸 후안 마누엘 마르케즈도 출사표를 내밀었다. 네명이 모두 라운드당 80~100발의 펀치를 내는 타격의 달인들이고 수비와 공수전환도 매우 훌륭한 만능형 선수들이었다. 이 네명의 각축전은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복싱 중경량급대를 황금기로 이끌었다.

1. 바레라-모랄레스 I, 2000년 2월 모랄레스 판정승2. 바레라-모랄레스 II, 2002년 6월 바레라 판정승3. 파퀴아오-바레라 I, 2003년 11월 파퀴아오 KO승4. 파퀴아오-마르케즈 I, 2004년 5월 무승부5. 바레라-모랄레스 III, 2004년 11월 바레라 판정승6. 파퀴아오-모랄레스 I, 2005년 3월 모랄레스 판정승7. 파퀴아오-모랄레스II, 2006년 1월 파퀴아오 KO승 (10라운드, 모랄레스 생애 최초의 KO패)8. 파퀴아오-모랄레스 III, 2006 11월 파퀴아오 KO승9. 마르케즈-바레라 2007년 3월 마르케즈 판정승10. 파퀴아오 마르케즈 II 2008년 3월 파퀴아오 판정승

여기까지 바레라가 4전 2승 2패, 모랄레스가 5전 2승 3패, 마르케즈가 3전 1승 1무 1패, 파퀴아오가 5전 3승 1무 1패인 셈. 최종 승자는 파퀴아오였고 세명의 특급 멕시칸 파이터를 꺽었다는 의미에서 팬들이 그에게 맥시큐셔너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모랄레스와 파퀴아오는 세차례의 라이벌전 도중 꽤 친분을 쌓았다고 하며 두 선수가 함께 필리핀의 한 맥주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파퀴아오는 2008년 6월 라이트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WBC 챔피언 데이빗 디아즈는 경기 내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가 9라운드에 결국 깊은 잠에 빠졌다. 5체급 돌파였다.

2008년 12월, 오스카 델라 호야가 파퀴아오와 경기를 가졌다. 11cm의 신장차와 15cm의 리치차, 그리고 무거울 중자 중량급의 파워를 가진 호야와 싸우기에는 파퀴아오가 너무 작아 보였고 전문가들은 미스매치라고 지적하고 나섰으며 도박사들도 호야의 여유있는 우세를 점쳤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1라운드 부터 8라운드 까지 파퀴아오는 쉬지않고 호야를 두들겼다. 8라운드가 끝난 후 호야의 코너에서 경기를 중단시켰다. 이것으로 파퀴아오가 웰터급에서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파퀴아오는 95년 주니어 플라이급에서 데뷔해 2008년에는 라이트급과 웰터급에서 싸웠다. 주니어 플라이급의 한계체중은 49kg이고 웰터급은 67kg다. 데뷔때 보다 거의 40%가량 무거운 체급에서 싸우고 있는 셈인데, 이런것은 복싱 역사상 초유의 상황이었다.

파퀴아오 하이라이트

2009년 5월 파퀴아오는 주니어 웰터급 타이틀에 도전했다. 상대는 링, IBO 챔피언 리키 해튼이었다. 오스카 델라 호야는 물론 엄청나게 컸지만 전성기를 훌쩍 지난 몸이었다. 경기에 특별한 타이틀이 걸리지도 않았고 일종의 스페셜 매치였기때문에 결과의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었지만 해튼전은 조금 달랐다, 해튼은 엄연한 현역이었고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를 만나기 전까지 43연승을 달리고 있던 강자였다. 파퀴아오와 싸울 당시 해튼의 전적은 45승 1패 32KO였다. 경기는 불과 2라운드만에 끝났다. 첫라운드부터 파퀴아오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하고 큰것을 연거푸 허용하며 두번의 다운을 당한 해튼은 2라운드 종료 직전 파퀴아오의 레프트를 정통으로 받은 후 조용히 잠들었다. 여섯번째 체급. 이것으로 파퀴아오는 다체급 석권 부분에서 오스카 델라호야와 함께 유이한 6체급 달성자가 되었다.

2009년 11월 미겔 코토를 상대로 파퀴아오가 7체급 정벌에 도전했다. 코토는 대단히 훌륭한 파이터였다. 강력한 레프트 훅과 바디블로를 멋지게 구사하는 선수였지만 파퀴아오를 상대로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며 12라운드 TKO패를 당했다. 파워가 아무리 좋아도 맞추지 못하면 소용이 없았다는 것, 그리고 파퀴아오은 경량급의 스피드와 중량급의 파워를 가진 선수라는 점이 증명된 내용이었다. 이것으로 WBO 웰터급 벨트를 수집목록에 추가하면서 파퀴아오는 복싱 역사상 최초로 일곱 체급에서 챔피언이 되었다.

▲2009년 11월 파퀴아오는 타임지의 표지모델이 되었다.

필리핀의 파퀴아오 현상은 이 무렵,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필리핀의 범죄율을 0%로 떨어뜨리고 반군과 정부군이 암묵적인 휴전에 돌입하도록 할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메이웨더와의 대전설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2010년 11월, 파퀴아오는 8번째 체급의 타이틀에 도전했다. 상대였던 안토니오 마가리토와 파퀴아오는 공석이었던 WBC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을 놓고 맞붙었는데, 세계 최대의 개폐형 돔인 달라스 카우보이스 홈구장에서 벌어진 이 경기에서 파퀴아오는 마가리토를 상대로 다시한번 일방적인 참극을 연출했다. 10라운드 들어서 마가리토의 얼굴은 엄마도 못알아볼 정도로 심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해설진은 경기를 말려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12라운드가 되었을때 파퀴아오는 돌연 공세를 늦췄다. 외곽으로 돌며 가벼운 펀치를 툭툭 던지며 경기를 마무리 했는데, 이를 두고 해설진은 파퀴아오가 자비심을 발휘했다고 평했다.

신장 169cm의 조그만 필리핀인이 세계를 주목시키고 있었다. 18개의 체급이 있는 복싱에서 파퀴아오는 9개 체급에서 싸웠고 그중 8체급에서 챔피언 벨트를 획득했다. 만약 10년전에 누군가가 이런 일이 가능할거라고 말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정도의 업적이다.

이 이후의 파퀴아오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메이웨더와의 대전 교섭이 계속해서 결렬되면서 파퀴아오의 시선은 링을 떠나 국회의사당을 향했다. 브래들리전에서 어이없는 판정패를 당했고, 마르케즈와의 4차전에서는 참혹한 실신 KO패를 경험했다. 일부 팬들은 나이도 많은데 너무 심한 충격을 입은 것이 아니나며 은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2014년 파퀴아오는 브래들리를 상대로 복수전을 성공시키고 알 지에리 와의 경기에서 여섯번의 다운을 빼앗아 내며 이겼지만 이때의 파퀴아오는 예전의 그 뜨거운 왼손잡이 하드 펀처가 어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연 그에게 지금 복싱으로 이룰 것이 뭐가 남았을까. 그에게는 이제 필리핀의 국회의원으로써의 책무가 더 급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반전 되었다. 지난 3월경 메이웨더와의 경기가 성사 된 것. 파퀴아오에게 만약 복싱에서 남은 볼일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메이웨더와의 싸움일 것이며, 그것이 현실화 된 지금 파퀴아오는 다시한번 언더독으로써 헝그리 정신을 발휘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이경기의 경제적 효과라든지, 흥행에 관련된 기록에 대한 이야기, 티켓과 암표의 가격, 대전료의 규모등은 전세계적으로 화제다. 어느나라의 언론을 살펴봐도 다들 숫자놀이에 심취해 있다. 그렇지만 필리핀 만큼은 그런 외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직 파퀴아오의 승리에 대한 열망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

절대 다수의 필리핀 국민이 그의 승리를 소망하며, 그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 잘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놀라운 영향력이다. 놀라운 리더십으로 볼 수 도 있다. 좌판을 메던 어린 소년, 노숙과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가난한 복서가 대업을 이루면서 온 나라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셈.

필리핀인의 염원은 그러나 필리핀 만의 것이 아닌 분위기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로는 메이웨더의 승리를 예상하지만 가슴으로는 파퀴아오의 업셋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파퀴아오가 이기기 위해서는 연속기를 꽃아 넣어야 한다. 메이웨더는 한두발로는 떨어뜨리기 힘들 만큼 맷집이 좋다. 본인의 특기인 엄청난 스텝으로 전후좌우 다양한 앵글에서 공격을 시도하고 빈틈이 보이면 현란한 좌우연타로 맹렬하게 물어뜯는 스타일로 메이웨더를 거칠게 몰아붙여야 한다. 정밀기계에는 드라이버를 가지고 덤빌게 아니라 오함마로 때려부숴야 한다.

상대의 앞손을 자신의 뒷손으로 받아치는 왼손잡이 특유의 공방

라이트잽-레프트 바디-라이트 훅으로 이어지는 파퀴아오의 컴비네이션, 자주 나오는 장면.

파퀴아오는 좌우 움직임, 피봇 동작등을 잘 구사해 상대의 측면이나 등뒤로 돌아 움직이면서 펀치 연속기를 쏟아내는 능력이 매우 우수하다. 좌우 움직임이 많으면 많을수록 때리기가 어려운데, 파퀴아오는 그 와중에 공격도 많이 하기 때문에 느린선수일수록 쉽게 무너진다. 파퀴아오가 슈퍼벤텀에서 슈퍼 페더까지의 영역에서 오히려 고전을 많이 했고 라이트급 이상의 체급에서는 오히려 더 압도적인 경기를 할 수 있었단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 다양하고 풍성한 움직임과 그 사이에서 나오는 강력한 공격력 덕분이라는 것.

뭐니뭐니 해도 파퀴아오의 대표적인 컴비네이션은 바로 이것, 잽-레프트-라이트 버티컬잽, 이 동작 이후 오른쪽으로 돌아 움직이며 게속해서 펀치를 쏟아내는 경우도 많다.

파퀴아오의 역설은 여기서 나온다. 파퀴아오는 방어능력이 부족하거나 반사능력이 떨어지는 선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이 맞는다. 이유는 바로 그의 장점의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 기회가 오면 굉장히 거센 공세를 길게 가져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정교한 카운터를 구사하는 선수, 공수전환이 좋은 선수들에게는 본인도 많이 맞게 되는 것이다. 1차전때의 모랄레스나 마르케즈가 대표적으로 공수전환이 좋고 카운터가 날카롭기 때문에 파퀴아오가 애를 많이 먹었다.

메이웨더의 카운터 능력은 일품이다. 그리고 그의 펀칭 파워는 파퀴아오의 입장에선 숨겨진 위협이다. 메이웨더가 본인보다 큰 선수들과 싸우게 되면서 파워보다는 스피드와 방어에 치중하게 된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메이웨더의 펀치력은 절대 약하지 않다. 본인보다 작은 파퀴아오에게라면 언제든지 큰 상처를 입힐만한 충분한 힘을 메이웨더는 가지고 있다. 파퀴아오가 강한 공세를 거는 만큼 메이웨더에게도 좋은 카운터의 기회가 돌아간다. 따라서 KO를 잡으러 가던 파퀴아오가 KO를 당하게 되는 그림도 없지 않다.

판정으로 갈 가능성이 물론 많다, 그렇지만 KO가 날 확률도 충분히 있으며 파퀴아오가 이길 가능성도 충분하다. 빠르고 주먹이 강한 왼손잡이는 누구에게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법이다.

본 경기는 5월 3일 오전 11시 다음스포츠를 통해 온라인 독점생중계로 즐길 수 있다.

이용수 기자

mfight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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