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일의 들숨날숨] 스스로 '0'을 택하고 떠나는 황선홍, 포항을 남기다

조회수 2015. 11. 30. 15:57 수정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지난 2011년 초 제주도에서 황선홍 감독을 만났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부산 아이파크에서 3시즌을 보낸 뒤 친정 포항 스틸러스의 지휘봉을 막 잡았을 때다. 당시 황 감독은 초짜였던 부산에서의 시행착오가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노라고 회상했다.

황선홍 감독은 "처음 부산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3년이라는 계약기간을 두고 로드맵을 세웠다. 의욕은 있었지만 욕심을 내지는 않으려했다. 첫해에는 50% 정도를 채우고 2년차 때 70% 정도만 도달할 수 있다면 임기 마지막 해에는 승부를 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웃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 감독은 "2년이 지나니 70에서 100을 향하는 게 아니라 다시 0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현실을 생각지 않고 나의 축구적 이상향만 좇았던 시절"이라면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을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이 원점이 됐다"고 속마음을 전했다. 아팠다. 하지만 그때의 상처가 있었기에 훗날 단단한 새살을 만날 수 있었다.

서툴렀던 3년 속에서 지도자 황선홍이 가슴에 채운 것을 감히 밖에서 정리해보자면, '순리'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황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황선홍 감독은 "조급해한다고 원하는 곳에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느꼈다. 그래서 '느리게 가기'를 염두하고 있다. 천천히 갈 것이다. 그리고 정도를 걸을 것"이라는 각오를 전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3년 2월, 황선홍 감독을 포항에서 다시 만났다. 2012년 FA컵 우승으로 감독 입문 5년 만에 처음으로 결실을 맺은 황 감독은 확실히 넉넉해져 있었다. 때문에 2013시즌은 욕심이 날만한 시기였다. 외부의 기대도 커졌던 시즌이다. 하지만 황선홍 감독은 "선수들에게 2013시즌 목표는 우승이 아니라 '플레이를 잘하는 팀'이라고 말했다. 욕심은 있으나 우승을 바라지는 않겠다. 이기고 지는 것, 우승을 하고 안하는 것보다 축구를 잘하는 팀으로 만들자고 강조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외국인 선수 단 한 명도 없는 스쿼드였다. 성적을 내는 것이 쉽지 않았고 그것에 대한 부담 혹은 두려움 때문에 한 발 뒤로 뺀다고 느껴질 수 있는 출사표였다. 그러나 어쩌면 더더욱 원대한 포부였다. 그때 황선홍 감독은 '현실'을 말했다. 황 감독은 "모든 팀, 모든 감독들이 우승을 바라겠으나 목표는 현실에 맞게 수정해야한다고 생각한다"는 표현을 썼다. 그저 욕심만으로, 이상적인 그림만 생각하면서 팀을 운영하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이는 과거에서 배운 교훈이기도 했다.

그래서 성적이 아닌 근본적 지향점을 목표로 꺼내들었다. 거스르지 않고 순리를 따르자고 결심하니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찾아왔다. 그해 포항은 FA컵 2연패에 성공했다. 그리고 정규시즌 최종 라운드에서 극적으로 울산을 꺾고 K리그 클래식 트로피도 품었다. 지금껏 한국 축구사에 단 한 번도 없었던 '더블'의 주인공은 황선홍 감독의 포항이었다. 플레이를 잘하는 팀을 이끌고 두 마리 토끼를 잡았으니 찬사가 아깝지 않았다.

이후 포항은 2014년 4위, 2015년 3위 등 조금씩 아쉬운 성적을 남겼다. FA컵도 ACL도 2%가 부족했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 지난해에도 그리고 올해에도 포항은 포항다웠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만 공격하거나 누군가가 경기를 좌우하는 축구는 황선홍식 축구가 아니다. 모든 선수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균형 잡힌 축구, 황선홍 감독이 포항에 뿌리내린 중요한 자산이다.

[후반 50분 포항 김원일 골]

다시 2013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인 티를 벗은 이명주를 포항의 훈련장에서 만났다. 그에게 외국인 선수가 없어 아쉽지 않느냐고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명주는 "만약 굵직한 외국인 선수가 팀에 있다면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작년처럼 모든 선수들이 뭉쳐서 짜임새 있게 풀어내는 것이 더 즐겁다"면서 "특정 선수에게 의존하는 것은 좋은 축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현실을 밝게 바라봤다. 그 당돌함은 대답보다 당돌한 플레이로 바뀌었고 '스틸타카'의 중심에 있던 이명주는 더블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후반 49분 포항 이명주, 경기를 마무리하는 골]

이듬해, 역시 외국인 선수가 없었던 2014년 초 이명주는 마치 '용병' 같은 활약을 펼쳤다. 개막 후 11경기에서 그가 작성한 포인트가 5골9도움이다. 그랬던 이명주가 중동의 머니파워에 바람처럼 빠져나갔을 때 적잖은 이들이 포항의 휘청거림을 예상했다. 톱니바퀴의 축이 뽑혔으니 엇박자는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그런데 그 자리를 김승대가 대신했다. 그리고 또 손준호라는 새로운 동력이 나왔다.

포항은 '팀'이었다. 황선홍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이명주, 김승대, 고무열, 손준호, 문창진 등 좋은 선수들이 줄줄이 탄생했으나 보다 중요한 것 좋은 축구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좋은 땅이 만들어지면 어지간한 변화에도 싹이 튼다. 아예 싹수가 노란 씨앗이 아니라면.

재물이 계속 나온다는 화수분은 허구다. 그러나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다. 황선홍 감독의 지난 5년 노력은 포항 스틸러스 구단을 기름진 땅으로 만들어놓았다. 이제 좀 편하게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 열매를 다시 수확할 수 있는 조건이 됐다. 그런데 갑작스레 이별을 고했으니 역시 평범한 선택은 아니다.

[강상우, 황선홍 감독 감격시킨 골]

감독 3년차 때 어쩔 수 없이 '0'을 받아들여야했던 초짜 감독 황선홍은 그로부터 5년 뒤 또 '0'을 택했다.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스스로 택한 '비움'이었다. 속내까지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정체'와 '안주'를 경계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너무 빨리 가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기 위해 택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것은 아니고 언제 어떤 형태로 돌아올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당장 황선홍 감독을 K리그에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포항을 남겨두고 쉼표를 찍는다는 사실이다.

글= 임성일[뉴스1 스포츠부/lastuncle@daum.net]

사진= 스포츠공감/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외부필자의 칼럼은 Daum스포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