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일의 들숨날숨] 당신도 다쳐봤잖아요. 깨진 동업자 정신에 깨진 구두

조회수 2015. 8. 28. 11: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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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의 유리 구두가 바삭, 깨졌다. 어려서부터 간절히 원했던, 그래서 모두가 안 된다고 말할 때 남모르게 땀 흘렸던 과거를 이제 겨우 보상받고 있는 상황에서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화려한 조명이 꺼지며 무대도 푹 꺼졌다.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기분이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함몰된 광대보다 아픈 것은 한동안 꿈을 펼치지 못한다는 믿기 싫은 사실일 것이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 부임 후 일약 '신데렐라'로 떠오른 상주상무의 공격수 이정협이 큰 부상을 당했다. 26일 오후 창원축구센터에서 열린 경남과의 원정경기 도중 상대 수비수와 충돌 이후 앞으로 고꾸라진 뒤 일어서지 못했다. 심판이 곧바로 경기를 중단했고, 이정협은 들것에 의해 실려나간 뒤 응급차를 타고 경기장을 빠져 나갔다.

상주 관계자는 "27일 오전 서울로 이송돼 한양대 병원에서 1차 검진을 받았다. 광대 함몰에 따른 안면 복합 골절이라는 진단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기 후 곧바로 서울로 이동하려했으나 선수가 극심한 고통을 호소해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한 뒤 이튿날 아침 이동했다"면서 "지금으로서는 수술도 불가피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이정협은 상주상무의 간판 공격수다. 내년 1부리그 승격을 위해, 오는 10월 전역 전까지는 계속해서 핵심으로 뛰어줘야 할 자원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말이 조심스러우나 '시즌아웃'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박항서 감독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그 구름은 슈틸리케 감독 머리 위로도 향했다.

이정협은 오는 9월3일 라오스전과 9월8일 레바논전에 출전할 23명의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31일 소집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무산됐다. 대한축구협회는 이미 이정협이 대체선수로 김민우를 발탁한다고 발표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중상이라는 의미다. 가뜩이나 마땅한 공격 자원이 없어 고심하던 슈틸리케 감독에게 이정협의 이탈은 생각지 못한 변수다.

박항서 감독도 슈틸리케 감독도 아프다. 하지만 이정협 자신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건장한 스물넷 운동선수가 아파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면 짐작키 힘든 고통이다. 그것보다도 아픈 것은 마음일 것이다. 좌절과 관련된 이야기다. 2014년까지 철저한 무명이었던 그가, 2015년 들어 겨우 작은 날갯짓에 신이 나 있었는데 갑자기 꺾여 버렸다.

운동선수에게 부상이란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일로 간주된다.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선봉장 역할을 맡을 것이라 예상했던 이동국은 K리그 경기 도중 무릎이 돌아갔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핵심 수비수 곽태휘는 현지에서 진행된 마지막 평가전에서 부상을 당해 홀로 귀국길에 올라야했다. 그때의 잔인함은 지금 이정협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이정협의 부상이 안타까운 것은, 함께 뛰는 동료로부터 기인됐다는 점 때문이다. 이른바 '동업자 정신'의 상실이다.

이정협이 부상을 당했던 장면을 보면 아찔하다. 표면적으로는 공중볼을 따내기 위한 선수와 선수 간의 특별할 것 없은 경합이었다. 하지만 한쪽이 지나치게 공격적이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정협이 공중에 떴고, 경남의 베테랑 수비수 배효성이 날아들었다. 뒤통수를 맞고 앞으로 넘어진 이정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배효성의 표정은 굳었다. 미안한 감정이 들었을 땐 이미 늦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성적인 판단이 있어야했다.

일부러 다치게 하려 했던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팀의 후방을 책임지는 맏형으로서 상대의 간판 공격수를 조금은 위축되게 만들겠다는 뜻이 담긴 행동이었을 것이다. 전쟁에 비유되는 축구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다. 다만 정도가 심했다. 의도까지 있었다면 더더욱 곤란하다. 더 아쉬운 것은, 배효성 자신이 그렇게 다쳐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배효성은 지난 2008년 6월 인천과의 경기 도중 쓰러진 기억이 있다. 당시 부산 소속의 수비수였던 스물여섯 배효성은 인천의 외국인 공격수 라돈치치의 팔꿈치에 안면을 강타 당해 광대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당했다. 배효성의 2006년 마지막 경기였다. 시즌아웃 판정을 받은 것이다. FIFA가 그토록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팔꿈치 가격'이 아니었다면 벌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불상사다. 역시 동업자 정신이 아쉬웠다. 그렇게 아파봤던 배효성이 이번에는 누군가를 아프게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불가피한 부상들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축구판이다. 원치 않거나 예상치 못한 일들도 비일비재하다. 막고 싶어도 막지 못하는 일들이 많다. 때문에, 최소한 막을 수 있는 것들은 막아야한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플레이 하나가 누군가의 앞길을 막아버릴 수 있다.

펄펄 날던 이청용은 지난 2011년 9월 톰 밀러의 악의적인 태클 이후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가정법은 의미가 없으나 그때의 부상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청용의 입지나 위치는 달라졌을 공산이 크다. 물론 이정협이 입은 지금의 부상이 향후 선수 생활에 치명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쉬어가는 것이 더 큰 도약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바람이자 위로다. 없어도 될 공백이 끼어든 것은 누구도 보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한동안은 선한 웃음을 머금고 겸손히 그리고 성실하게 뛰어다니던 이정협의 플레이를 볼 수 없다. 오는 10월 전역과 함께 '군데렐라' 틀을 벗고 진짜 '신데렐라'로의 변신을 준비하던 이정협의 유리구두가 깨졌다. 이정협이 희생양이 됐을 뿐이다. 대상은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동업자 정신이 깨지면, 누군가의 구두가 또 깨질 수 있다.

글= 임성일[뉴스1 스포츠부/lastuncle@daum.net]사진= 스포츠공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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