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의 따뜻한 축구] 동대문 운동장의 추억

풋볼리스트 2014. 3. 2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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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동대문 운동장이 있던 자리에 DDP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붙인 디자인 쎈터 건물이 문을 여는 날이다.오래 전부터 이 행사를 준비하는 분들이 이 날 참석해 달라고 초대를 해주었다.

사실 나는 행사같은데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대체적으로 행사라는게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소모적인 분위기여서 다녀올 때면 늘 뒷맛이 개운치 않다.그래서 나를 까다롭다고 한다.그러나 이 행사는 마치 집안행사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단박에 '그러마'고 했다.새로운 이름표를 다는 동대문 운동장을 꼭 지켜봐야 나중에 덜 아쉬울 것 같은 마음에서였다.

동대문 구장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었다.지금으로치면 시골의 공설 운동장에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였지만, 그 시절 축구를 하던 우리들에게 그 곳은 꿈과 역사를 함께 살찌워주는 '메카'같은 곳이었다.

당시는 인조잔디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어서 대부분의 경기는 맨땅인 효창운동장에서 치러졌고 잔디가 깔린 동대문 경기장에서는 국가대표나 그에 버금가는 아주 비중이 큰 경기들만 개최가 가능했다. 그래서 축구 선수가 동대문 구장에서 경기를 한다는 것은 영광 그 자체였다.

< 사진 >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차범근 고별 경기에는 구름 관중이 몰렸다.

본부석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국기게양대와 성화가 있었고, 왼쪽 골대 뒷편에는 스코어만 겨우 알려줄 수 있는 전광판이 있었다. 나름대로 축구를 좋아한다거나 축구를 보는 급수가 높다고 자평하는 사람들은 전광판 쪽에 팔짱을 끼고 자리를 잡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거기는 축구인들이나 조기회에서 힘좀 쓰는 실력가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

관람석은 계단 모양을 한 시멘트 바닥이었다. 아줌마들은 운동장 입구나 스탠드 통로에서 돈을 받고 비닐 씌운 방석들을 빌려주기도 했지만, 돈이 귀하던 시절이라 큰 돈 드는 게 아님에도 그걸 빌려서 깔고 앉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집에서 들고온 신문지를 바닥에 깔거나 배 모양으로 큼지막하게 접어 모자대용으로 쓰면 모자랄 것 없이 훌륭했다.

물론 지정석이나 정해진 자리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라 본부석 건너편 중앙석에 앉으려면 오후3시 경기가 있는 날에도 오전부터 일찍 와야 했다. 그리곤 화투도 치고 음식도 먹으면서 기다렸다. 그래서 운동장은 그 중심에서부터 시간대별로 점점 양쪽으로 자리를 넓혀갔다.

당시 운동장에서 주로 먹는 메뉴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처럼 먹기 좋게 말랑말랑하게 말린 것이 아니라, 입이 아프도록 몇시간을 빨면서 물어뜯어 먹을 수 있는 오징어랑 땅콩 외에는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운동장에서 콜라를 마셨던 기억은 없고 국산 사이다는 생각이 난다. 그러나 단맛이 나는 사이다는 꽤 귀한 것이어서 자주 마시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핫도그 같은 것이 등장한 것은 한참 후였고 컵라면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때는 지금처럼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을 때였는데 그 긴 시간을 때우는걸 도와준 인기 메뉴는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삶은 달걀? 다는 그것도 잘 먹지 못했는데.. 뭐였을까? 라면땅과 삼립빵도 기억난다.

당시 우리들에게 가장 진지한 경기 상대는 일본, 말레이시아, 태국, 버마였다. 이런 팀들과 경기를 하는 날이면 협회에서 표를 너무 많이 판 나머지 경기장에 입장한 사람들이 경기장 바닥까지 내려와 앉을 정도로 관중이 많았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일본은 왠지 우리들과의 교류는 달가워 하지 않은 분위기여서 박스컵이나 메르데카배, 킹스컵같은 동남아대회는 잘 참석하지 않던 때였다.

팬들은 우리가 수중전에 약하다는 것을 정설로 믿었던 까닭에 비가 오는 날이면 늘 불안불안하면서 기다렸고, '문전 처리 미숙'은 예나 지금이나 팬들의 단골 걱정거리이자 성토의 대상이었다. 하하하.

지금은 동남아 선수들이 우리보다 월등히 체격이 작은 느낌이지만 당시에는 우리와 같거나 도리어 우리보다 더 크다는 느낌으로 경기를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짜루'라는 별명을 가지고 운동장을 헤집던 (김)진국이 형이나, 지금 경남에서 감독을 하고있는 (이)차만이 형, (고)재욱이 형같은 미들필더들은 모두 큰 선수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당시 190cm이 넘는 '꺽다리' 김재한 선수의 등장은 정말 거인같은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뛰기 시작하면, 바닥에 붙어다니는듯한 진국이 형은 서너 배쯤 더 뛰어야 겨우 보폭을 맞출수 있었을 것이다. 하하하. 그래서 팬들은 더 재밌어 했다.

나는 동대문 운동장에서 참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당시로서는 아시아 최강 중에 하나인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5분만에 3골도 넣었다. 그날 경기를 마치고 나오는데 우르르 몰려든 꼬마들이 내 허벅지를 만지면서 '도사님 같다'고 떠들던 게 기억난다. 이런 만화같은 사실은 이제 자료 화면이 남아있질 않으니 우리 세대가 지나가면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분데스리가로 떠날때는 국가대표팀이 경기를 하는 날보다 더 많은 관중들이 동대문 구장에 모여서 격려하고 환송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보통의 팬들에게 나의 존재감을 무엇보다 확실하게 알려준 것은 74년 서독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전에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터트린 왼발 슛이었다.

여기서 내 자랑을 하자면, 스타가 되려면 중요한 경기에서 임팩트가 있는 골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가장 잘 들어맞는 골이 바로 그거였다. 서양 사람들과 비슷한 체격을 가진 이스라엘을 상대로 그것도 연장전에 스무 살짜리가 넣었으니 나는 그 골 하나로 단숨에 아무도 따라올수 없는 아시아의 스타가 되었다.

자랑은 그만하고......

언젠가는 일본과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찼는데 일본 골키퍼의 손끝을 스치면서 아슬아슬하게 문대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그것을 못 넣었다면 아마도 나는 오랫동안 팬들에게 엄청난 미움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 매국노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일본한테 진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고 축구를 하던 시절이었을 뿐만 아니라 팬들 역시 스포츠와 애국심을 하나로 알고 믿으면서 응원을 했었다. 월드컵 예선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한 임국찬 선배같은 분이 이민을 가지 않고는 도저히 못배길 정도였으니 당시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조금은 이해가 갈것이다.

동대문운동장에서 만들어진 나의 추억은 정말 끝이 없다. 1998년 월드컵을 마치고 내가 중국에 있을때, 한국에서 어렵게 축구를 하고 있던 두리가 전국대회 득점왕이 되면서 우수 선수상을 받았고, 그 무거운 트로피 두 개를 중국까지 들고와 내 침대맡에 놓아주었는데, 바로 그 경기도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렸다.

두리 인생에 처음 받아보는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였다. 두리는 지금도 자기가 상을 받으러 올라갈 때 근처에 몰려있던 기자들이 주욱 길을 터주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자주 얘기한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던터라 기자들의 관심이 고교대회라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많이 쏠렸던 모양이었다.

< 사진 > 당시 두리가 받았던 두 개의 트로피

그러니 동대문운동장은 아들 두리 대에까지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곳이다. 그런 동대문 운동장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니 나로서는 아쉽고 안타깝다. 그런데 두리는 츄리닝 입은 아저씨들이 보쌈에 소주 한 잔씩 하면서 "야, 두리야! 잘해라!" 응원해주던 효창운동장의 기억이 더 많다고 한다. 잘생긴 동국이형이나 다른 선수들은 여고생들이 응원해주는데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은 기분 좋을만큼 거나하게 취한 삼촌같은 아저씨들 뿐이었다는 섭섭함과 함께. 하하하.

동대문 운동장에는 축구장과 나란히 야구장이 있었다. 70년대는 지방 명문 고등학교의 야구팀들이 강세여서 당시 고교야구는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종목 중의 하나였다. 축구장에서 골이 터지고 시끄러우면 야구장 관중들은 축구장 쪽 담장으로 몰려와서 목을 빼고 내다보고 또 반대로 야구장 쪽에서 와!와!거리면 축구장 관중들이 스탠드 끝으로 몰려가 야구장을 내다보면서 양쪽 운동장을 다 즐겼는데, 그렇게 내다보면 경기 모습이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분위기 때문에 그러고 있었던 것인지 나는 지금도 가끔씩 궁금해진다.내 생각으로는 양쪽 담장의 각도상 경기장 안이 보일 것 같지 않은데 .....

나같은 축구선수나 축구팬 뿐 아니라 야구팬들까지 함께 70년대를 보냈던 그런 동대문 운동장이 이제 내일이면 이름조차도 역사속으로 사라진다니 나로서는 아쉬운 마음이 크다. 새로 태어나는 DDP 에는 이런 기억들을 함께 공유할수 있는 공간이 남아있을까? 몹시 궁금하다.

아내는 양복을 다리고 와이셔츠랑 넥타이, 행커치프를 골라 놓았다. 잔칫집에는 잘 차려입고 가야한다며 특별한 날에만 아껴서 신는 구두도 닦아놓았다. 그래도 나에게는 맘껏 축하만 해주기에는 무언가 많이 섭섭한 잔치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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