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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따뜻한축구] 경기장에 잘 가지 않는 이유

조회수 2013. 12. 10. 16:0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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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다.벨기에 알제리 러시아가 우리랑 한 조에 있다. 이 4나라의 반응이 모두 똑 같다.

"음..우리 조는 꿀같아!"

히히히. 맞다.

우리도 일본만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좋은 조에 들어갔다고 모두 만족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행여 포르투갈이 우리 조에서 나올까봐 많이 긴장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피했다. 무식한 척 응원하는 건 축구를 보는 재미다.

사실 스포츠를 너무 냉정하게만 보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그래도 내 편에 후한 기대를 하고 봐야지. 지금 기분 같아서는 3승은 못할것 같나? 그날 컨디션만 좋다면 말이다. 우리의 전술이 제대로 먹히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하하.

상대는 전술이 없겠나? 그래도 일단 우리 편에게 모든 긍정적인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스포츠를 보는 맛이다.

나같은 전문가는 더러 냉철하려고 하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냉정하기는 정말 어렵다. 대표팀의 경기를 중계하러 갈 때면 나는 왠만해서는 훈련장에 안나간다. 내가 나가면 일단 기자들이 한 마디라도 들어보려고 몰리게 되는데, 감독을 해본 입장에서 그것처럼 신경쓰이는 일이 없다.

어쩌다 내가 가려고 하면 아내가 붙든다. 애들 산만하게 하지 말라고..그래서 나는 피하고 호텔에서 우리팀 경기를 하나 더 본다.

며칠전 신문선 교수가 티비에 나와서 내 얘기를 했다고 한다.

'운동장에서 차감독을 만났는데 내가 두리 칭찬을 해줬더니 아주 좋아하더라. 그런데 막상 경기장에 가보니 차두리 이름이 선수 명단에도 없었다'며 아들보러 왔다가 허탕친 사람처럼 보였던 게 안타까워 얘기를 했던것 같다.

하하하.

나는 두리가 부담 받을까봐 두리가 경기를 안하는 날만 경기장에 가는데 그걸 몰랐던 모양이다.

최용수 감독도 "아버님, 어머님 꼭 오시라고 하라!"고 두리를 조른다. 두리도 "아버님 한번 오시죠?" 이러고는 나를 꼬드기지만 안간다. 내 마음이 정말로 움직이는 곳은 조용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싶어서 가질 않는다. 서정원의 수원 삼성도 그래서 한번도 가질 않았다. 긴장해서 경기를 지휘하는 뒷모습을 지켜보려면 정말 애가 많이 쓰인다.

아내가 경기장에 가지 않은지는 꽤 오래됐다. 98년 대표팀 감독이 됐을때 첫 경기 딱 한번 와보고는 98년 감독을 하던 내내, 그리고 수원삼성 감독을 하던 내내 단 한번도 운동장에 오질 않았다. 운동장에 안오는 것까지는 좋은데 축구에 관심을 아예 끊어 버렸다. 지난번 러시아전을 중계하러 두바이로 떠날 준비를 하는데 두리가 안방 문을 열고 고개만 들이밀더니 한마디 하고 달아난다.

"아버님,(이렇게 부르면 수상하다) 고명진이랑 윤일록이 자알 부탁합니다. 윤일록이는 떠오르는 샛별이라고 꼭 말해주세요. 고명진이는 많이 좋아졌다고 해주고요!"

이런 한심한..아무리 FC서울 동료라해도 부탁할 걸 해야지! 그리고 이날 윤일록이는 나오지도 않았고 고명진이는 잠깐 나왔는데 내가 되려 아무말도 못하고 있으니까 성재가 몇마디 거들어 줬다. 지가 나를 몰라?

집에서 두리가 고명진 선수 얘기를 많이 하니까 아내도 그 이름을 알게 된 모양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 뒤에 앉은 고명진이 인사를 해서 "응. 고명진이 수고했어!"했더니 갑자기 두리엄마가 뒤를 돌아보고는 "너가 고명진이냐?"하고는 반가워 했다.

"아니요 저는 김신욱입니다!" 그 옆이 고명진인데 수퍼스타 김신욱을 모르다니. 두바이에서 골도 넣었는데..

김신욱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모르는지 두리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한마디 더 한다.

"넌 그 헤어스타일이 멋있다고 하는거니? 두리가 그 머리 하려고 해서 내가 못하게 했는데 너가 했구나!"

"두리형이 멋있다고 칭찬해 줬는데요!"

"그 놈은 오지랖도 넓다! 너도 서울이냐?"

"저는 울산인데요."

이 정도면 완전히 코미디다.

아내는 자신이 김신욱을 모르는 사실이 얼마나 불경죄인지 조차도 모르고 있으니..

두리가 그 스토리를 듣더니

"엄마 그러시면 최소한 2천명을 평창동으로 쫒아올거야. 사고 크게 치셨네!"

두리는 요즘 엄마가 심하게 걱정되는 모양이다.

며칠 전 아내 생일이라 밥먹으러 갔다가 웨이터가 옆에 있는데도 우리집 막내한테 "우리 아들 너무 잘생겼어. 김우빈이보다 훨씬 멋있지?"하면서 방학이라 스위스에서 들어온 아들한테 흐뭇해하다가 놀란 두리가 "엄마 최소한 삼천명은 몰려올거야. 우리 이 호텔에서 쫒겨나요. 웨이터 형 죄송해요. 안 들은걸로 해주세요!"하는 바람에 멈췄다.

하하하.

아내는 축구를 정말 많이 잘 알았다.이번에도 조추첨이 시작되기 전 36개 팀을 놓고 얘기 하는데 과거의 스타들이나 히스토리는 사전처럼 꿰고는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김신욱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니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쩌다 할 수 없이 축구장엘 가도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고 있다. 축구는 우리 가족에게 정말 많은 것을 선물했지만 아물지 않은 상처도 함께 준 모양이다.

그래도 두리같은 아들을 생각해서 축구를 다시 좋아해주면 안될까? 나랑 두리는 축구가 정말 좋은데.

이제 그렇게 아플일도 없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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