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의 따뜻한축구] 그 시절 소련 축구의 기억

조회수 2013. 11. 19. 15: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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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러시아, 소비에트유니온, 루슬란드..어떻게 불려지든 상관 없이 그곳은 우리에게 두렵고 공포스런 곳이었다.

지금은 구소련이라 부르는게 가장 정확한 단어이겠지만어마어마한 땅이 있는, 해체되기 이전의 구소련은반공교육으로 무장된 우리들에게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왠지 벌을 받게 될것 같던. 베일에 쌓인 먼 나라였다.

그런 70-80년대에 나는 그 곳을 가야했다.호기심 같은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두려움이 더 컸다.이미 UEFA 컵 경기를 하기위해 루마니아나 체코를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소련방문은 좀 부담이 되었다.Cup winners Cup. (편집자 주 : 현재의 유로파리그. 1999년 UEFA컵으로 통합되며 사라졌다)

각 나라의 컵대회를 우승한 팀들이 모여서 유럽의 우승을 가리는 또하나의 대회였는데1981년 프랑크푸르트가 독일컵을 우승한 댓가로 다음해에 이 대회에 출전권을 얻은 것이었다.나도 결승전에 골을 보탠 수훈선수다.알아주면 고맙겠다.ㅎㅎㅎㅎ

<1981년 여름, 프랑크푸르트 시절의 나. 왼쪽에서 두번째는 당시 나의 후보 공격수였던 뢰브 선수다. 아시다시피 지금까지 8년째 독일 대표팀 감독이다.>동유럽의 어느 나라든 배낭 하나 메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지금의 젊은 친구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가 되질 않겠지만당시는 아무리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방문이라고 해도 우리 정부의 허가가 없는 방문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반드시 외무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UEFA 대회 조추첨은 경기 2주 전에 한다.조가 정해지고 2주 후에 바로 경기가 있다는 얘기다.이때 동구권 팀이 상대로 정해지면 내 여권은 한국으로 날아가 도장을 받아와야 했다.2주면 무엇이든지 다 할수 있는 긴 시간 같지만 당시 상황은 그렇지가 못했다.

우선 프랑크푸르트-서울의 직항 노선이 없었다.외국 항공사는 아예 다니진 않았고 파리나 취리히에서 떠나는 국적기조차도 일주일에 2-3번 정도였다.이 비행기로 보내서 외무부를 거쳐 다시 돌아오려면 정말 빠듯했다.언젠가는 동구권 원정을 떠나기 직전에 공항에서 여권을 받은 적도 있다.정말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의 얘기 같다.

그런데 나를 더 불안하고 심란하게 하는 것은 입국심사였다.군복을 입은 공항직원이 나를 세워놓고는 십분이상 보고 또 보고 했다.그 사람에게도 나에게도 많은 경계심이 오가는 순간이었다.나는 그때마다 행여 나를 따로 불러 이상한 방으로 데려갈까봐 항상 전전긍긍하면서 서 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구 러시아의 모스크바는 북쪽에 있으니 더 춥고 더 어두웠다.구소련의 국제공항은 모스크바 한 군데여서 모든 입국자는 거길 통해 국내선으로 갈아탔으니 도네츠크를 가도 모스크바를 통과해야했다. (편집자 주 : 지금은 우크라이나 도시인 도네츠크도 당시는 소련 영토였다.)

어젯밤 배성재가 기록을 뒤졌다.도네츠크와 어웨이에서는 1:0으로 졌고, 프랑크푸르트 홈에서는 3:0으로 이겼는데 내가 두골을 넣었다면서 도네츠크는 지금도 구 소련에서 분리독립한 우크라이나에서 아주 강팀이라고 했다.

맞다.그날 홈경기는 기억한다.왼쪽 하프라인에서 치고 들어가 슈팅을 하고 골을 넣었던 기억이 생생하다.내가 기억하는 잘한 경기 몇 개 중에 늘 기억나는 경기다.요추에 금이 가는 큰 부상에서 헤어나 엉겹결에 뛰었던 경기였고그 경기 이후 부상의 악몽을 떨어내지 못해서 아주 긴 슬럼프에 빠졌었다.

성재가 인터넷을 뒤져 기록을 찾아내고 내가 몰랐던 것까지 상세하게 밝혀주었지만나하고 두리엄마가 같은 말을 되풀이 해가며조금은 과장되다 싶을 정도로 설명에 설명을 거듭하는 긴장감이나 공포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다.영화 속의 무리한 설정 정도로 치부하는 것 같다.에이~

그래.여권 하나면 못가는 곳이 없고내가 그렇게 공포스럽게 여겼던 그 시내의 건물들을 엘지 삼성 현대 기아의 광고가 이미 접수를 끝낸,그래서 그걸 봐도 더 이상 자부심 같은 것 조차도 느껴지지 않는,그게 생활이 되어버린 너희네들에게 내가 아무리 잘 설명을 한들 어떻게 피부로 느껴지겠냐.내가 무리한것 같다.

아무튼 나는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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