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의 따뜻한축구] 13년만에 만난 제자들

조회수 2013. 11. 19. 08: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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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는 참 분주했다.

한주 내내 '따뜻한 축구'를 쓰려고 노트북을 열었다가도러시아와 평가전을 치르는 우리 대표팀 경기 중계준비 때문에 다른 일이 먼저 손에 잡혀서 그렇게 되질 않았다.지난 주에는 중계준비로 버벅거리는 사이에 할 얘기가 너무 많았다.

흥민이가 해트 트릭을 했고 대표팀이 스위스를 이겼고한번도 지지않은 FC 서울이 한번도 이기지 못한 광저우에 아시아 챔피온 자리를 내주어야 했던 아쉬운 일도 있었고....

그럼에도 두바이에 와서야 겨우 중계준비를 마친 나는 문득 내 얘기가 하고 싶어졌다.

지난9일 주말에 최용수 감독의 FC 서울이 중국 광저우에서 아시아 챔피온스 리그 결승전을 했다.

최용수 감독이랑 두리를 응원하러 광저우에 갔는데 거기서 중국에 있는 제자들에게 붙들려 심천으로 내려갔다.이전 같았으면 '할 일이 있으니 다음에 오면 들리겠다'고 하고 돌아왔을 텐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제는 제자들이 붙들어 주는 것이 좋아서 못이기는 척 하고 계획을 바꿔가며 슬그머니 주저 않았다.

심천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고 그때 만난 선수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고마운 제자들이다.그래서인지 올해 환갑이 된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슬프고 가슴 아픈 시기였던 98년 월드컵을 끝낸 그때에 나를 좋아해 주었던 선수들을 13년 만에 만난 여운은 정말 뜨뜻했다.

나를 생포[?] 하는데 성공한 이 친구들이 심천으로 내려가면서 연락을 하는 것 같더니만 순식간에 열명이 넘는 제자들이 저녁자리에 모였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워낙 커서 400KM 정도는 가까운 이웃이라고 한다.

정말이다.

이전처럼 커다란 원탁에 둘러 앉아서 양한마리를 통째로 구워 손으로 찢어 밀전병에 싸먹었다. 내가 좋아했던 요리다. 중국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채소인 고수를 나는 안먹는다. 대신 매끼마다 식사후면 꼭 찾아 먹을만큼 찐빵을 좋아했는데 이 친구들은 그런 내 식성을 아직도 잊지않고 맞춰서 주문을 해줬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에게 맞추느라 장진이가 중국의 독주가 아닌 와인을 들고왔다. 모두들 "그렇지!" 를 외치면서 잔을 부딪히고는 좋아했다. 내가 자기들을 가르칠 때 선수들이 들으면 가장 기분 좋은 말이 그렇지! 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기본기를 익히지 못한 선수들이 많았던 터라 기술을 가르쳐 주고 잘 따라하면 내가 그렇지! 그렇지!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흡족해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들에게 그렇지!는 곧 Good! 하고 같은 대단한 칭찬으로 느껴지는 단어였다고 한다.

장뼈랑 장진, 위홍 유코치 쎄뽕 동이창 은 지금 지도자를 하고 있는데 자기 선수들이 잘하면 그렇지!하고 칭찬을 해 준단다. 심천 3부리그팀의 단장으로 있는 순깡도 직원들이 잘하면 그렇지! 한다고 하니 '그렇지!'가 꽤 중독성이 있는 단어인 모양이다.

하하하.

13년전 그들에게 차범근은 굉장한 축구인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꿈같은 분데스리가에서 스타플레이였고 당시 중국의 최고 스타였던 양천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뛰고 있으면서 '자기가 제일 존경하는 선수는 차붐이다'고 인터뷰마다 얘기를 하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하는 것을 따라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왕초는 내가 참 아끼는 귀여운 선수였다. 빠르고 키가 커 내가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런데 이녀석이 헬멧도 안쓰고 오토바이를 타다가 나에게 걸렸다. 그것도 신호등에 같이 서 있었는데 내 차 기사가 반갑다고 문을 내리고 부르는 바람에 걸린 것이다.

헬멧없이 오토바이를 타고다닌 벌로 내 까만 코트의 먼지를 테이프로 떼어내라고 했단다. 그때 감독님 옷을 보니까 조지 아르마니여서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옷이 조지 아르마니라는 것이 구나 했다고 하면서 그날 입고 나타났다. 하하하.

13년 전 당시 중국은 외부의 문화나 소비가 거의 막혀있어서 해외브랜드를 알 수 없던 때였다. 한명씩 잔을 들고 와서 자신들의 기억을 들려주는데 나는 참 좋았다. 사실 나에게 그들은 더 고맙고 잊을수 없는 존재라는 걸 그들도 알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힘든 시기었기에 그들에게 더 빠져들수 있었을거다.

나는 당시 내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조금의 우쭐거림도 거만한 마음도 없었고 그런 마음이 그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13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따뜻한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두리에게 자주 얘기한다.무엇을 잘 대접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해 주라고.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나를 좋아해 주는 마음'만큼 나를 따뜻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일은 없는것 같다.물론 쓸만한 돈이 있고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품어주었던 중국의 팬들과 선수들을 지금도 늘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 마음 때문에 중국의 티비나 신문 잡지 같은 데서 인터뷰 요청을 하면 나는 대부분 해주려고 애를 쓴다. 또 가끔씩 이런저런 일로 중국과 마찰이 생기는 상황이 생기면 잘잘못을 떠나서 그 다툼 자체가 불편하다. 지켜보는 마음이 편칠 않다.

사람의 마음. 권력이나 돈 힘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바로 그 마음이 내 편일때라야 그 사람이 진정한 내 편이지 않을까?

나는 그런 내 편이 아주 많은 노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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