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간 벤치 생활.. 그 때의 좌절이 날 만들어"

용인 입력 2014. 4. 21. 20:21 수정 2014. 4. 21. 21: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라운지] ■ 정상에서 은퇴하는 이숙자
재활 중에 챔프전 출전해 GS칼텍스 우승 이끌어
실업시절 포함 7차례 정상
23년 정든 배구 그만두려니 아직까지 실감 안 나
"세터는 지면 욕 먹고 이겨도 공격수가 빛나지만
승부 성공 때 짜릿한 매력"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뤘다. 남들은 한 번도 쉽지 않다는 우승 트로피를 7차례(실업 5회, V리그 2회)나 들어 올렸다. 2013~14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에서 IBK기업은행을 꺾고 GS칼텍스의 통산 2번째 우승에 힘을 보탠 세터 이숙자(34)가 23년 간의 선수 생활을 뒤로 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경기 용인의 한 까페에서 18일 만난 이숙자는 "정들었던 배구를 그만 둔다니 아직까지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면서 "수 많은 시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인고의 시간이 만들어낸 명 세터

이숙자는 최고의 순간과 힘든 시간을 함께 보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배구를 시작한 그는 줄곧 승승장구했다. 은혜여고 시절 청소년 대표 주전 세터였던 이숙자는 부푼 꿈을 안고 1999년 현대건설에 입단했지만 이내 좌절했다. 국가대표 부동의 세터였던 강혜미(당시 선경)가 팀이 해체되면서 갑자기 현대로 오게 된 것. 당시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연속 우승을 차지했을 정도로 강 팀이었던 현대에서 이숙자의 자리는 없었다. 벤치에서만 6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선수들은 벤치 옆에 있는 웜업존을 속칭 '닭장'이라고 부른다. 이숙자는 "난 닭장 대장으로 불렸다. 1~2년도 아니고 무려 6년 가까이 닭장에서만 보냈다. 내가 오면 '닭장 대장님 오셨다'고 선수들도 얘기했었다"고 돌아봤다.

23년 동안 운동하면서 한번도 도망친 적이 없는 모범생 이숙자였지만 당시는 하루하루를 견디기 힘들었다. 밤마다 일기장에 "그만두고 싶다" 는 말을 수백 번 반복했다.

결국 강혜미가 은퇴한 이듬해 2005년 V리그 원년부터 주전 세터로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무뎌진 감각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스스로 실망해 은퇴를 결심하기도 했다. 가족의 만류로 다시 마음을 굳게 먹은 그는 비가 온 뒤 땅이 더 단단해지듯 성숙해졌다. "당시엔 죽도록 힘들다는 생각뿐이었는데 그때 참 배구뿐만 아니라 인생을 많이 깨우친 것 같다. 덕분에 지금까지 이렇게 운동을 할 수 있었다"고 환하게 웃었다.

처음과 끝 우승으로 함께 한 GS칼텍스

좌절하고 있던 이숙자에게 2007년 새로운 계기가 생겼다. 처음으로 생긴 FA(자유계약선수) 제도 덕분에 정대영(32)과 함께 GS칼텍스 유니폼으로 갈아 입은 것이다. 이숙자는 이적 이후 곧바로 GS칼텍스의 첫 우승을 이끌며 최고의 반열에 올라섰다. 현대에서 실업 시절 5차례 우승했을 때만 해도 느낄 수 없던 짜릿한 쾌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숙자에게 2007년부터 함께 호흡을 맞춘 정대영은 좀 특별한 존재다. 이숙자의 공을 가장 많이 때렸던 선수 중 한 명이다. 그는 "대영이와는 정말 다툼도 많이 했었다. 신기하게 연습할 때 그렇게 안 맞다가도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손발이 잘 맞았다. 믿고 편하게 줄 수 있는 선수였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숙자는 지난해 여름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부상을 당해 올 시즌 막판에야 코트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재활에 매진했지만 챔피언결정전(5전3선승제) 출전도 불투명했다. 1차전 승리를 거둔 뒤 2,3차전을 내리 내주며 위기에 몰렸던 GS칼텍스는 4차전에서 깜짝 투입된 세터 이숙자의 활약을 앞세워 승부를 5차전으로 끌고 갔다. 이선구 GS칼텍스 감독은 우승을 차지한 뒤 "이숙자의 투입이 결정적이었다. 덕분에 우승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숙자는 "GS칼텍스는 정말 특별하다. 처음 유니폼을 입었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운 좋게 우승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난 다시 태어나도 세터다"

세터는 경기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자리다. 경기에서 지면 욕을 먹고, 이겨도 스포트라이트는 주 공격수의 몫이다. 그래도 그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난 세터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숙자는 "가끔'내가 공격수였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도 해봤지만 세터가 가장 잘 맞는 것 같다. 상대 강 서브를 받아낼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세터는 코트에 서면 고민해야 한다. 상대 블로킹의 위치도 보고 우리 선수가 어느 자리에 누가 있는지도 살피면서 토스를 올려야 한다. 이숙자는 "언제나 모험 그 자체였다. 선수를 믿고 승부를 걸어 성공했을 때의 짜릿함 때문에 세터를 계속 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20년 넘게 세터로 뛰었던 이숙자는 좋은 세터에 대해 "절대 자기가 빛이 나려고 하면 안 된다. 상대를 빛나게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세터는 감정을 표출해선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10년 결혼했던 이숙자는 당분간 휴식 시간을 가지면서 아기를 가진다는 계획이다. 컴퓨터나 요리 관련된 자격증도 따는 등 그 동안 해보지 못했던 자기만의 시간들을 만끽할 예정이다. 이숙자는 "그래도 결국은 배구 관련된 일을 계속 하게 될 것 같다. 앞으로의 내가 더욱 기대가 된다"고 활짝 웃었다.

이숙자는

●생년월일 1980년6월17일●신체조건 175㎝ㆍ58㎏ ●소속 현대건설 배구단(1999~2007.5)-GS칼텍스(2007.6~) ●출신교 은혜여중-은혜여고-경기대●포지션 세터●경력제1회AVC컵여자배구대회 베스트 세터상(2008) 프로배구 V리그 올스타(2007) ●국가대표 경력 런던올림픽(2012) 아시아여자배구선수권대회(2008, 2009, 2011) 제1회 AVC컵 여자배구대회(2008)

용인=이재상기자 alexei@hk.co.kr

[ⓒ 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