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권향의 여우사이] '김상사'의 귀환을 알린 김상현의 '착한 FA'

조회수 2015. 12. 1. 13:17 수정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진심'이 '절실함'을 깨우다

지난 11월 30일 오후, 김상현(35, kt)이 하와이행 비행기를 탔다. 매 시즌 종료 후 가족여행을 떠났던 김상현은 올해 FA(자유계약선수) 계약 일정 탓에 아내와 세 아들을 먼저 휴가지로 보냈다.

공항으로 향하던 김상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수고했다는 인사에 "홀가분하다"고 대답했다. 이어 "'착한 FA'라는 기사를 봤다. 나에게 금액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대접을 받기보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야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설명했다.

< fa자격을 얻었던 김상현이 11월 28일 kt와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도장을 찍었다. 김상현은 자신에게 또 다시 기회를 준 kt의 믿음에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진=kt위즈 제공 >

김상현은 '김상사'란 별명과 함께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렸다. 우승 경험과 최우수선수(MVP), 골든글러브의 경력이 있지만 그가 FA 자격을 얻는 데까지 16년이 걸렸다. 그리고 11월 28일 김상현은 kt와 3+1년, 총액 17억원에 도장을 찍었다.

거품 논란이 일고 있는 요즘 김상현은 '착한 FA'라며 주목을 받았다. 선수의 몸값은 곧 자존심과 직결되는 상황에서 그를 향한 시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자존심보단 걱정이 더 많이 됐다. 나이 먹고 2군을 오갔던 해였기에 막바지에 걱정이 많이 됐었다. 미숙했던 부분이 많았기에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뿐이었다. 2009년의 '김상사'도 옛 말이다.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

군산상고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던 김상현은 졸업을 앞두고 맘고생을 했다. 수도권 소재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했으나 어려운 집안 사정을 고려해 계약금 2000만원을 받고 프로행을 선택했다. 대학을 포기할 만큼 큰 금액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김상현에게는 꼭 필요한 돈이었다.

김상현은 "대학에 갔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억대 계약금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프로에 입단해 빨리 성공해 집안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4년의 대학생활을 즐기기보다 3년 만에 성공하자라고 각오를 다졌었다. 프로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0년 광주의 부름을 받은 김상현(2차 6순위 전체 42번)에게 첫 시련이 찾아왔다. 7월 30일 LG 마무리 이상훈을 상대로 홈런을 때리고 경기를 마친 날 그의 트레이드설이 퍼졌다. 김성한 감독에게 "(트레이드가) 확실하지 않다"란 말을 들었고 자정이 넘은 후에도 별 다른 연락이 없었기에 숙소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눈치를 보던 김상현은 오전 훈련 도중 통보를 받고 짐을 쌌다.

어깨가 축 쳐져 서울로 올라온 그를 반갑게 맞아준 건 유지현(LG 코치), 이종열(SBS스포츠 해설위원), 최만호(롯데 코치), 이병규(41, LG) 등 고참급 선수들이었다. 김상현은 당시 KIA와 다른 자율적인 분위기의 LG에 빠르게 흡수됐다.

< 부상으로 인해 기복이 심했던 김상현이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보여 야구를 하는 것이었다. 김상현은 "이제 마음 편히 야구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며 미소를 지었다. 사진=표권향 기자 >

군대도 서둘러서 다녀왔다. 프로선수로서 생활하고 있지만 집안을 책임지기에는 적은 연봉이었다. "가능성에 비해 내 능력을 보여주지 못 했다"고 생각한 김상현은 2004년 상무에 입대했다. 그는 2군에서 경험을 쌓으며 북부리그 홈런과 타점 부문 1위를 차지하며 자신감을 키웠다.

팀에 복귀 후 김상현은 "내가 해보고 싶은 야구"를 하기 위해 방망이를 새로 잡았다. 스프링캠프에서도 공부하며 손바닥이 찢어지도록 훈련에 매진했다. 그러나 많은 기회에 비해 자리를 잡지 못하고 2009년 다시 KIA로 트레이드됐다.

김상현은 "기회를 못 잡은 건 내 잘못이다. 상무에서 성적이 좋았기에 유망주로 복귀했다. 그러나 내 고집 때문에 야구를 빨리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며 "아직까지 LG에게 미안하다"고 전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다시 광주를 찾았다. 김상현은 "마지막이란 생각을 하고 돌아갔었다. 감이 나쁘지 않았고 KIA팬들이 따뜻하게 맞아줬던 날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김상현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김상현은 그해 데뷔 첫 만루포를 시작으로 3할 타율(0.315) 36홈런 127타점을 기록, 우승에 목말랐던 KIA를 왕좌에 앉혔다. 반면 LG는 사상 최악의 트레이드라는 사례를 낳았다.

찬란하고 화려했던 그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잦은 부상에 시달려 경기 출장이 어려웠던 김상현은 2013년 SK로 트레이드됐다.

"가장 아프고 힘들었던 시기"였다는 김상현은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KIA를 원망했다. 김상현은 "LG에서 KIA로 갈 때 절실한 마음으로 제 3의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화 한 통으로 통보를 받은 건 상처였다"며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무거우니 경기가 잘 풀릴 리도 없었다. 잔뜩 위축됐던 김상현은 SK에서 적응하는데 실패했다. 2014년 11월 20인 보호 명단에서 빠진 김상현은 신생팀 특별지명으로 kt로 이적했다. 그의 5번째 팀이었다.

김상현은 kt에 대해 "정말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정의했다. 조범현 감독과 구단이 그에게 바라는 부분이 무엇인지 그가 팀에게 보여줘야 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김상현은 "감독님이 '옛날 생각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kt팬들은 물론 KIA팬들도 다시 '김상사'를 부르며 응원해줬다. 물론 악의적인 댓글도 있었지만 나를 봐주고 믿어준 팬들이 있었기에 야구장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김상현은 "'김상사'라는 별명을 이어가도록 노력하겠다. 항상 긍정적으로 좋은 생각만 하며 팬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야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 김상현이 자신감을 회복했다. 이는 여전히 그를 '김상사'라고 외치는 팬들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진=kt위즈 제공 >

▲ 에피소드...

"KIA에게 섭섭한 마음이 아직까지 남아있긴 하지만, 솔직히 친정팀에서 은퇴하고 싶은 꿈을 꿨었다. 내가 어디에 있든 '김상사'를 외쳐주는 팬들게 보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내 제 2의 고향인 수원에게 보답할 차례다. 내가 재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응원해준 고마운 구단과 kt팬들을 위해 뛰고 싶다.

kt는 돈이 아닌 야구선수 김상현의 가치를 깨워줬다. 난 이들을 위해 땀을 흘릴 것이고 kt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겠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