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루이스 티앙이 한국에 왔을 때

최민규 2015. 5. 30.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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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스포츠 최민규]

루이스 티안트(74), 혹은 '루이스 티앙'이라고도 한다.

메이저리그에서 일세를 풍미했던 쿠바 출신 대투수다. 메이저리그에서 1964년 데뷔해 19시즌을 뛰며 229승을 거뒀고, 20승 이상 시즌만 네 번이다. 키킹을 한 뒤 상체를 오른쪽으로 홱 트는 특유의 투구 폼으로 유명했다. 칼튼 피스크의 홈런으로 역사에 남은 1975년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발 투수가 티안트였다.

1977년 월드시리즈 무대에서 역투하는 루이스 티안트.

그 티안트는 1991년 가을 한국에서 1개월 여를 보낸 적이 있다. 당시 LA 다저스 순회 코치를 맡고 있던 티안트는 삼성 라이온즈의 초청을 받아 경산에 머물며 2군 캠프에 합류했다.

삼성은 창단 이후 우승에 목마른 팀이었다. 티안트를 비롯해 미국과 일본의 유명 코치들을 초빙했다. 1984년 플로리다주 베로비치에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전지훈련을 보낸 팀도 삼성이었다. 우승을 위해 선진 야구를 받아들이려는 욕망이 강했다.

삼성의 베로비치 전지훈련 당시 모습.

송창근 이도산업 부사장은 당시 삼성 구단 직원으로 티안트의 통역을 맡았다. 그는 "티안트가 한국 선수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티안트의 투구폼은 미국 야구 기준으로도 특이했다. 비유하자면, 선수 생활 말년 구대성의 오른손 버전이었다. 송 부사장은 "티안트가 경산 구장에서 삼성 투수들에게 투구 폼 시연을 했다. 특이했다. 그러면서도 뒷다리를 축으로 삼으며 힘을 전달하는 원리는 다른 투구 폼과 같았다"며 "기본이 확실하면 개개인의 특징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나온다는 걸 배웠다. 선수들이 느낀 게 많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삼성 2군 감독이던 박용진씨는 "당시 한국 코치들은 전력 분석이란 게 뭔지 잘 몰랐다. 그런데, 티안트는 '나는 분석 따위 믿지 않고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대로 공을 던졌다'고 했다. 그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프로 선수에겐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박 전 감독은 "당시 한국 지도자들은 투수에게 '타깃', 즉 포수 미트를 보면서 던지라고 했다. 그러나 티안트는 그렇게 던진 적이 없다고 했다"며 "교과서에 적힌 이야기를 반복하는 지도자는 그때도 많았다. 그러나 왜 그런지에 대해서 이해하며 전달하는 지도자는 적었다"고 했다.

쿠바 출신인 티안트는 일과가 끝나면 한국 코치들과 막걸리도 자주 마셨다고 한다.

1991년 삼성 구단 사무실엔 '선진 야구 조기 정착의 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고 한다. 박 전 감독은 "알고보니 이건희 회장이 지시했다고 하더라"고 했다. 이 회장의 당시 나이 49세. 대개 이 나이 때 '오너'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다. 삼성은 원년 이후 해태 타이거즈에 밀린 늘 2등이었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하지만 한국보다 앞선 리그의 방법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는 점에선 가장 앞서 있었다. 박 전 감독은 "당시 삼성 2군 코칭스태프는 한·미·일 연합군이었다. 동봉철은 일본인 코치 도이 마사히로가 키운 선수였다. 일본 코치들은 선수가 힘들어할 때 방법을 찾아준다는 점에선 우리보다 확실히 앞서 있었다"고 했다. 이 회장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설인 나가시마 시게오와 친분이 두터웠다. 나가시마가 추천한 코치들이다. 그래서 일본인 코치들의 말을 경청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도 이점에선 좋은 영향을 미쳤다.

1992시즌 삼성 타격코치로 활동한 도이 마사히로(왼쪽)과 동봉철. 마사히로 코치는 선수를 세밀하게 파악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지도를 하기로 유명했다.

20세기가 끝날 때까지 삼성 라이온즈는 영원히 한국시리즈 우승을 못할 구단처럼 보였다. 하지만 21세기에는 가장 빛나는 구단이다. 박 전 감독은 "1991년에 프런트 관계자가 '어차피 코치는 계약직이다. 투자를 해서 키운들 다른 구단에 빼앗기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도 사람에 투자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솔직히 그시절 단골로 우승을 했던 해태 사람들은 비웃었다. 하지만 지금 해태 출신 코치 수가 적은 데는 이런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삼성의 가장 큰 무기 중 하나는 수비였다. 1984년 베로비치에서 배워 온 것이다. 김응용 감독은 2000년 10월 삼성 감독으로 임명된 뒤 기존 수비 포메이션을 바꾸려 했다. 당시 '루키 코치'였던 류중일 감독은 김 감독을 찾아 "그러면 안 된다"고 직언했다. 김 감독은 이를 받아들였다. 투자가 수익을 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 힘든 시간을 거친 뒤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 최고의 프로야구단이 됐다.

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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