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짭용규에서 참용규로' 최용규 "내 타율은 오늘도 0할이다"

광주 | 김은진 기자 입력 2015. 4. 28. 06:31 수정 2015. 4. 28.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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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KIA에는 '짭용규'가 있었다. 1번타자 이용규(현 한화)와 같은 1985년생, 룸메이트 동기생인 최용규(30·KIA)를 KIA 팬들이 부르는 별칭이었다. 고졸로 일찍 데뷔해 워낙 오래 전부터 프로야구 스타로 우뚝 서있는 친구 이용규와 달리 대졸인 최용규는 2008년 입단해 백업 선수로 뛰어왔다. 팬들은 '가짜'라는 뜻의 '짭'을 붙여 이용규와 '짭용규'로 둘을 구분했다.

2015년. KIA에는 최용규가 우뚝 서있다. 잠깐 그라운드를 떠나있다 온 최용규는 더욱 큰 절실함으로 자신을 다시 조각했다. 불안했던 20대를 떠나보내 이제 30대. 파릇한 후배들과 주전 경쟁을 펼친 그는 2015년 KIA의 주전 2루수다.

처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갖게 된 최용규는 "매일 야구장에 나올 때마다 신인처럼 기대되고, 걱정도 되고, 설레기도 한다"며 "서른 한살이 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시즌을 준비하면서 당연히 대수비나 대주자로 출발할 줄 알았다. 주전이 계속 보장될 수는 없다. 언젠가는 부진할 때가 올 것이고 그때는 다시 대수비나 대주자로 갈 것이다. 그래서 계속 잘 해야 한다"고 생애 첫 주전으로 시즌을 출발하고 있는 벅찬 마음을 전했다.

■아직은 경험을 쌓아야 할 때

최용규는 2008년 원광대를 졸업하고 2차 2라운드, 전체 12번으로 지명돼 입단했다. 대학 시절은 물론 KIA에 입단한 뒤에도 국가대표로 선발돼 야구월드컵에 출전했을 정도로 인정받은 내야수다. 하지만 프로에 데뷔한 KIA에서는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했다. 올시즌 전까지, 2010년까지 뛴 3시즌 동안 100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글러브를 3개 갖고 다닌 적도 있다. 2010년 최용규는 내야수와 외야수를 겸했다. 주로 대수비로 출전하던 시절이다. 1루수 글러브와 내야 글러브, 외야수 글러브까지 3개를 갖고다니며 언제 어디에 투입되더라도 소화해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최용규는 "그게 나쁜 게 아니었다. 출전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많아지는 것인데 부담감이 정말 컸다"며 "2년차 때 연장전에 좌익수로 나갔는데 동점 상황 만루에서 파울 타구를 악착같이 쫓아가 잡은 적이 있다. 희생플라이가 돼서 상대 주자가 홈인해버렸다. 파울이니 안 잡았어야 하는데 나는 무조건 잡아서 홈송구해 잡겠다는 생각만 하고 죽어라 뛰어서 잡았다. 결국 나중에 우리가 이겨 다행이었다. 경험이 없어 그랬다"고 말했다.

4년을 쉬고 돌아온 지금도 살짝 실수를 하며 초반을 시작했다. 21일 롯데전을 예로 들었다.

최용규는 "1사 2루에서 폭투가 나와 주자가 3루에 갔는데 나는 맞았다고 항의했다. 볼카운트가 2-2였고 다음 타자가 필이니까 내가 맞고 나가면 1·2루가 돼 괜찮다고 순간적으로 그랬다. 지금도 가끔 그렇게 덩벙댄다"며 "다 경험에서 나오는 것인데 오래 쉬어서 더 그런 것 같다. 감독님이 웃고 넘어가주셨지만 아직은 경험을 더 쌓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주전 최용규를 만든 군인 최용규

프로 입단 3년차였던 2010년 이후 올시즌 사이, 4년은 최용규 프로야구 기록에서 통째로 비어있다. 그러나 최용규의 야구인생에서는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이다.

최용규를 말하면서 군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최용규는 야구선수 가운데 흔치 않은 현역 병장 출신이다. 프로야구를 하면서 군 복무 할 수 있는 경찰청에 지원했지만 합격하지 못해 잠시 그라운드를 떠나야했다. 어깨 수술을 택했고 1년 반 동안 재활을 마친 뒤에도 해결되지 않자 시간이 아까워 육군 현역으로 입대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육군 30사단에서 21개월 복무했다. 가장 힘들게 보인 이 시간은 최용규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최용규는 "내가 방황했다고도 하던데 그런 건 아니었다. 경찰청에 합격하지 못하면서 어려운 시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야구를 그만 두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순간도 없었다"며 "사실 많이 힘들었지만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간절함이 50이었다면 그 시간 동안 100이 된 것 같다. 그때 주변에서 '서른 넘어 무슨 프로야구를 다시 하겠느냐'고 말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두고 봐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자극이 돼서 더 좋은 결과가 된 것 같다. 아마 그 사람들 모두 지금 후회하고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군인 최용규는 계속 야구 방망이를 놓지 않을 수 있었다. 군대 내에도 사회인 야구 동호회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최용규는 "자대 배치받고 사흘째 참모장이 불렀다. 우리 부대에 사회인 야구동호회가 있었다. 야구장도, 유니폼도 모두 구색을 갖춘 상태였다. 야구선수 출신이라고 들었는지 이등병인 내게 플레잉코치를 맡겼다. 주말엔 사회인 야구를 하고 주중에는 오후 체력단련 시간에 혼자 웨이트트레이닝과 캐치볼을 했다. 계속 방망이를 돌리고 글러브를 잡으면서 운동이 됐다고 생각한다"며 "다른 선수들에게 공익근무와 현역 중 추천해야 한다면 나는 현역으로 입대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훈련하고 짬짬이 내 운동도 할 수 있다. 덕분에 몸 잘 만들어서 제대 뒤 바로 2군에 합류했다. 나는 군대에 있던 시간이 참 좋았다. 체질이었는지 사단장 표창을 두 개나 받아서 제대할 때 간부 지원하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가라고 하면 절대 가지 않을 거다"며 웃었다.

더불어 최용규는 "어린 선수들 중에 조금만 안 풀리면 '군대나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선수들이 가끔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지는 것 같다. 뭐라도 하나 해놓고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고생한다. 그냥 단순히 '잘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간절함이 더 커야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내 타율은 오늘도 0할이다

올시즌 개막전을 앞두고 최용규는 머리카락을 짧게 밀었다. "다시 군대 가자"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깎은 머리다. 다시 군대에 간다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온 그라운드에서 절실하고 독하게 운동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곧바로 2군에 합류한 최용규는 2015년 시즌을 앞두고 텅 비어있던 내야 경쟁의 핵심 세력이 됐다. 지난 4년 동안 더욱 단단해진 간절함으로 전지훈련에서 보여준 성실한 노력이 주전 2루수로 시즌을 출발할 수 있게 했다.

최근 몇 경기에서 잠시 방망이가 침묵하고 있지만 최용규는 27일까지 23경기에서 타율 2할6푼5리 1홈런 10타점 3도루를 기록하고 있다. 출발이 나쁘지 않다.

최용규를 비롯해 주전 경험이 많지 않은 선수들로 내야를 꾸리고 있는 KIA 김기태 감독은 체력 안배를 위해 여러 명을 돌려가며 주전으로 기용할 계획을 갖고 있다. 올시즌 살아남기 위해서는 체력이 관건이다. 최용규의 올시즌 목표도 거기에 맞춰져있다. 최용규는 "체력은 144경기가 아니라 500경기도 자신있다. 풀타임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 올해 내 목표"라고 말했다.

개막 한달째, KIA 선수들에게 "최용규는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선수냐"고 물어오는 지인들이 많다. 별명도 바뀌고 있다. 최용규를 '짭용규'로 부르던 KIA 팬들은 이제 '참용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직 자신을 '짭용규'로만 알고 있던 최용규는 "참용규 좋다. 다시 짭용규 안 되려면 정말 잘 해야겠다"고 웃으며 "매일 경기한 것을 지워버리려 애쓰고 있다. 잘 했든 못 했든 '내 타율은 지금 0할'이라고 생각하며 매일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1년을 뛰어보고 나중에 한 번 확인해보려 한다"고 이제는 멈추지 않을 야구인생을 그리고 있다.

<광주 | 김은진 기자 muldero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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