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기의 프로축구 30년(35)] 최순호 무릎 수술로 황금 다리 부활

김덕기 2013. 6. 9.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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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1987년 4월17일.

국내에서는 '4.13 호헌조치' 여파로 전국 40여대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국제적으로는 중국과 소련의 개방 열풍이 관심을 끌고 있었다.

프로야구 롯데의 홍문종은 빙그레와 부산 경기에서 한희민의 초구를 강타, 시즌 첫 만루홈런을 때려 롯데를 4연패의 수렁에서 건져냈다. 삼성은 해태와의 대구 홈경기에서 난타전 끝에 18-14로 승리, 7개 부문에서 신기록을 수립했다.

이날 '한국축구의 대들보'이자 포항제철의 주전 스트라이커 최순호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10년 동안 그를 괴롭혀 온 무릎 부상 악령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 입원 절차를 마쳤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 때다.

무릎에 칼을 댄다는 것은 축구선수에게는 치명적인 일로 일종의 금기사항이었다. 그러나 최순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80년 5월 18세(실제 나이는 20세)란 어린 나이로 국가대표 화랑 팀에 발탁되면서 태극마크를 달기 시작, '아시아 최고 스트라이커'로 발돋움했던 그는 항상 부상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1985년 멕시코월드컵 지역 예선전과 1986년 월드컵 본선, 1986년 아시안게임 출전 등으로 악화된 왼쪽 무릎의 고통은 1987년 2월 킹스컵국제축구대회에서 악전고투하면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무릎 수술을 했던 선배와 동료들을 찾아 자문을 구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무릎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포기할 뻔 했던 박성화는 1985년 수술 이후 거의 1년 동안 공백 기간을 가진 뒤 끈질긴 투혼으로 1986년 재기했으며 월드컵 대표 출신의 GK 오연교는 무릎 수술 후유증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정상 컨디션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또 월드컵 대표팀의 왼쪽 날개 김석원은 1985년 무릎 수술 이후 재기를 위해 몸부림 쳤으나 1987년 3월 끝내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다행히 최순호의 부상 정도는 심각하지 않았다.

박성화 오연교의 수술을 집도했던 연골치료의 권위자 경창병원 하권익 외과과장은 X레이 검사결과 치명적인 부상은 아니고 설명했다.

최순호의 왼쪽 무릎을 괴롭혀 온 것은 정상인에게 없는 추벽이 생겨 이 추벽이 대퇴골 연골 표면을 깍는 현상을 보여 통증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의학 용어상 '추벽증후군'으로 불리는 이 같은 현상은 추벽을 제거하고 손상된 대퇴골 연골을 손질하면 재발은 물론 후유증이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는 하박사의 설명에 따라 4월20일 수술에 들어갔다.

결과는 예상보다 좋았다. 2주일 뒤에는 실밥을 뽑고 비록 웨이트 트레이닝이지만 개인훈련도 할 수 있었다.

'악령이여 안녕' 최순호는 이후 어슬렁거리던 센터포워드에서 미드필더로 성공적으로 변신, 어느 해보다 의미 있는 한 해를 보냈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 격이 됐다.

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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